소설리스트

장야여화-177화 (177/649)

177화. 새로운 방향

다시 웃으며 1층으로 내려간 용여홍은 뜰로 이어지는 문 앞에서 또 남이 이모를 마주쳤다. 남이 이모는 7~8살 정도 된 여자아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이내 용여홍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동이는요?”

“난리 통에 목숨을 부지한 할머니와 엄마가 와서 애를 데리고 갔어. 새해가 되면 이곳에 있는 상점을 팔아 퍼스트 시티에서 생활하겠다더라고. 잘됐지, 뭐. 마침 나한테 애도 없으니 꼭 맞는 짝꿍이 된 거지.”

평온히 답한 남이 이모가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약간 겁을 먹은 듯 남이 이모 뒤쪽으로 숨어버렸다. 빼꼼히 내민 소녀의 까만 눈동자가 초롱초롱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용여홍은 마음속으로나마 아이의 축복을 빌어준 뒤 뜰로 나왔다.

고개를 들자, 용여홍의 눈에 겨울 하늘이 들어왔다. 겨울 하늘은 그다지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오묘하고 어중간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어느새 백새벽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생각해?”

용여홍은 시선을 거두고 백새벽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건물 복도를 지날 때마다 회사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폐쇄된 곳이고 수시로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서 몇 마디라도 대화를 나누기 때문일까?

근데 여기서는 계단만 벗어나면 하늘과 구름을 볼 수 있고 바람도 느낄 수 있어. 하……. 언제쯤이나 돼야 모두가 습격당할 걱정 없이 지상에 살면서 서로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고, 이 모든 걸 감상할 수 있을까⋯⋯.”

용여홍은 다시 고개를 들고, 두 눈 가득 구름이 노니는 하늘을 담았다.

* * *

가짜 신부 곽정수의 심문을 마친 장목화는 차를 몰고 노스 브리지를 통해 중앙 광장으로 돌아갔다.

이곳은 그야말로 흰색의 향연이었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곳곳 창문마다 내걸린 침대보, 분필 낙서 가득한 벽, 문에 매인 천 역시도 모든 게 다 흰색이었다.

이는 바로 위드 시티에서 친척의 죽음을 표시하는 방법이었다.

위드 시티는 보통 황야유랑자 거점들보단 물자가 훨씬 풍족한 편이었지만 그것도 다 귀족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귀족을 제외하면, 평범한 일반 주민들에게 상복을 지을 옷감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흰 깃발을 내거는 등의 방식으로 애도를 표하곤 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은 차가운 바람에 도시 곳곳에 걸린 흰색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장목화는 한탄이라도 몇 마디 하고 싶었지만, 정작 입을 열어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이어지던 끝에, 장목화가 조수석에 앉은 성건우를 쳐다봤다.

“도시 한 바퀴 돌아보자.”

“네.”

바깥을 보고 있던 성건우도 그녀의 제안에 순순히 응했다.

장목화는 곧장 핸들을 꺾어 웨스트 스트리트로 차를 몰았다.

* * *

차창 밖으로 바쁘게 일하는 여러 사람이 보였다. 더러는 길가 눈을 쓸고, 몇몇은 부서진 땅바닥을 메우고, 또 누군가는 길 양편의 점포를 보수하고 있었다.

이는 위드 시티 시청과 사냥꾼 길드가 연합해 실행 중인 구제 방안이었다. 모든 이들이 가장 기본적인 물자만 지원받고 있는 이때, 더 많이 지원받아 배불리 먹길 원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노동을 해야 했다.

이 방안으로 식량이 부족하지 않은 이들이 자원을 대량으로 점거하는 걸 방지하고, 소요 사태 이후의 도시 재건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입에선 전부 뽀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모두 하얀 입김을 흘리며 함께 어우러져 일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들은 확실히 딱 반으로 갈라진 집단이라고 봐야 정확했다.

장목화도 이 사태를 충분히 이해했다. 이건 큰 소란 이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후유증이었다.

위드 시티 주민들이 어떻게 외부인인 황야유랑자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겠는가. 주민들의 친척과 친구를 죽인 유랑자들은 이미 처형되거나 각지에 노예로 팔려 간 상황이지만, 그래도 주민들 눈에 황야유랑자는 어차피 다 똑같아 보일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열심히 일하는 황야유랑자를 보는 주민들의 눈빛엔 다들 또렷한 거부감과 은근한 원한이 어려 있었다.

장목화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짧은 시간 안에 해결될 문제는 아닐 거야. 길에 핏자국은 금세 지워지겠지만, 마음에 생긴 멍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모두 형제가 된다면 좋을 텐데요.”

한숨을 쉬는 성건우를 보고, 장목화가 눈을 흘겼다.

“설마 또 모두 형제로 만들어 인류를 구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하나의 방향이죠.”

성건우는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해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짜 형제라도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장목화가 가장 큰 문제점을 지목했다.

성건우의 집중력은 그리 길게 지속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쪽은 멀쩡하네요.”

성건우가 보고 있는 건, 와일드울프 앨리를 포함한 술집과 나이트클럽이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이쪽 사장들에게는 용병도 있고, 무기도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지형에도 익숙하거든. 조직을 이루지 못한 황야유랑자 정도는 거뜬히 막아낼 수 있었을 거야. 여긴 처음으로 공격당한 구역도 아니니까. 충분히 인력도 모으고 준비할 시간이 있었던 거지.

웨스트 스트리트는 악한 사람, 착한 사람이 마구 뒤섞인 곳이라 얼마나 많은 교파와 얼마나 많은 각성자가 숨어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야.”

장목화는 사뭇 의미심장하게 말을 끝냈다.

“다른 사람 심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에버나이트 교단 각성자처럼요.”

성건우는 조여름의 남편 장이경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장이경은 친구가 위드 시티 술집에서 에버나이트 교단 각성자와 마주쳤다고 말했었다.

그 말에 장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너 아직 이곳 교파에 가입해 성찬 맛볼 기회도 없었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네 무근자 형제들은 이틀 전에 여길 떠났어. 안 그랬다면 신성한 눈 교파 각성자들이 어떻게 황야유랑자 무리에 대적하는지 볼 수 있었을 텐데.”

성건우는 느릿하게 방향을 트는 차 앞머리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황야유랑자들이 소란을 일으킬 줄 미리 알아차리고 일찍 떠난 거예요.”

“언제 또 만났어?”

장목화가 놀란 듯 물었다.

사실 그녀도 곳곳을 다니며 식견을 쌓은 무근자 플린이라면 황야유랑자 무리 속에 잠재된 위험의 씨앗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형제끼린 서로 통하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성건우를 보고, 장목화가 다시 소리 내 웃었다.

“널 데려갈 데가 있어.”

성건우는 굳이 어디냐고 묻지 않았다. 배를 문지르며 넌지시 신호만 보낼 뿐이었다. 그 사이, 방탄 SUV는 이스트 스트리트 쪽으로 미끄러졌다.

* * *

SUV는 이스트 스트리트에 진입한 뒤 금세 거리 끝에 이르렀다.

이곳 옆쪽에 주차장과 정원이 딸린 건물이 한 채 자리해 있었다. 또한 건물엔 애쉬랜드 문자와 레드리버 문자로 병기된 이름도 붙어있었다.

[위드 시티 제2 병원]

차를 잘 세워둔 장목화는 성건우를 데리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방팔방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려왔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매우 무겁고 불편해졌다.

홀에는 요가 깔린 병상이 여럿 있었다. 그 위에는 이번 소란으로 다친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다들 다친 부위는 대강 붕대로 두르고, 평범한 약만 복용 중이었다. 운이 좋으면 수술을 받을 수 있겠지만, 운이 나쁘면 끝없는 고통에 잠식된 채 계속 기다려야만 했다.

이곳에 부족한 건 물자뿐만 아니라 의사도 포함됐다.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끙끙 앓고, 몸을 뒤척이고, 큰 소리로 악을 쓰는 이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인데 의료진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러다 결국 숨을 거두고, 가족들의 울음 속에 어딘가로 이송되는 이들도 수시로 나타났다.

성건우는 이러한 광경에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내 장목화가 천천히 시선을 거두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다친 사람이 정말 많지? 이거야말로 지옥이야. 천사들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바쁘게 일하고 있지만, 그 수가 너무 적어서 전부를 구하지는 못하나 봐. 하……. 이제 위층으로 올라가 보자.”

2층, 3층, 4층도 다친 이들로 가득했다. 상처나 병세가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환자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진 상태였다.

이후 5층에 다다랐을 때야, 장목화와 성건우는 중환자들을 마주했다.

병실 안에서 흰색 침대보를 덮고 누워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무 의식이 없었다. 이것도 모자라 복도 병상에도 환자들이 누워 있었지만, 그들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손목에 꽂힌 튜브만이 겨우겨우 틀어쥔 이승과의 끈인 듯했다.

장목화가 이들을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다들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이야. 하지만 이들도 병이 나면 이 정도 치료밖에 못 받아. 그나마 위드 시티라서 이만한 거야. 다른 황야유랑자 거점은 상황이 다르지.

물론 해자 마을처럼 최소한 의사와 약이 있고, 가끔 주사도 맞을 수 있는 곳도 있지만, 보통은 민간요법에 의지하면서 살고 죽는 것을 오로지 운명에만 맡겨. 그보다 더 형편이 나쁜 곳은 민간요법도 못 쓰고.”

성건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흰색 침대보를 덮고 죽은 듯 누워있는 환자들만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금 장목화의 표정이 더욱 진지해졌다.

“저들에 비하면 회사 내부 병원은 훨씬 나은 거야. 의사, 간호사도 약, 도구도 넉넉하고 의학도 온전히 전수되고 있잖아. 심지어 여러 실험실에서는 관련 연구도 진행 중이고.

큰 병이 나면 위드 시티와 황야유랑자 거점에서는 열에 여덟아홉은 죽어. 하지만 회사에서는 살 가능성이란 게 있지.

질병은 아주 무서운 거야. 모두가 대적해야 하는 공포스러운 적이지. 하지만 우리는 절대 혼자서 싸우고 있는 게 아냐. 서로를 도와 강력한 집단 하나만 형성한다면, 질병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어.

강력한 집단은 충분한 자원을 동원해 약과 도구를 넉넉히 생산할 수 있으니까. 동시에 학교와 각종 실험실을 조직해 지식을 전수하고, 인재를 기르고, 첨단 영역을 탐색할 수도 있잖아.

난 네가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려면 이런 방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 단순한 의지와 끈기, 현실에서 병을 앓고 회복한 경험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싶네.”

장목화는 주요 임무를 마치고 사건이 일단락된 후부터 성건우가 섬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주었다. 지금 성건우를 데리고 위드 시티 병원에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성건우가 반고 바이오 내부 의학과 대비를 통해 어떤 영감이라도 찾기를 바랐다. 질병을 이겨내려고 할 때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병원, 의사, 그리고 약이었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던 성건우가 천천히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일리 있네요. 조금 더 넓게 생각하려고 노력해야겠어요.”

말을 마친 그가 고민스럽다는 듯 오른손을 주먹 쥐고 왼손바닥을 쳤다.

장목화는 순간 성건우가 또 자신의 말뜻을 오해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후 장목화와 성건우는 윤복 총포사 2층으로 돌아갔다.

성건우는 곧장 침대에 누워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그는 다시 그렇게 꿈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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