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제가 하겠습니다
모리치는 테이블 아래에 숨어 있어서, 허양원의 허리춤에 매인 폭약을 더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폭약과 마주한 그는 황급히 튀어나와 조기정이 자리한 구석으로 달아났다.
“폭약이다! 저 사람이 폭약을 두르고 있어!”
모리치의 외침에, 귀족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좀 멀리 떨어져 있던 데다, 테이블 때문에 허양원의 모습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어떤 폭약?”
“뭐라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귀족들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만약 상황이 통제되지 않고 있었다면, 다들 경호원들에게 의지해 망설이지도 않고 당장 방에서 튀어 나갔을 것이다.
“리틀머시룸! 허양원이 리틀머시룸을 두르고 있다고!”
모리치가 답했다.
오렌지컴퍼니에서 생산된 그 폭약의 모델번호는 H404였으나, 어마어마한 위력 때문에 리틀머시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제기랄!”
또 다른 레드리버인 귀족 의원 프란시스코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허양원 허리춤에 매인 리틀머시룸이 폭발한다면, 그 주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란한 상황 속, 조정기가 우딕과 유 비서, 그리고 가운 차림의 알 수 없는 인물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그리고 이, 일단 그 폭약부터 좀 제거해봐.”
충격적인 상황에 그의 몸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빈승이 나서겠습니다.”
기계 승려 정념은 칩의 도움 아래, 정밀한 제어가 가능한 금속 손가락으로 허양원의 허리춤을 에워싼 폭약을 천천히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사실을 간과하여 실수한 것을 깊이 번민하고 있었다. 위드 시티에 경호원으로 온 이후, 평소엔 사용하지 않는 모듈까지 장착한데다, 조금 전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과 경호원들이 폭발물을 휴대했는지 확인까지 했는데도 고용주에게만은 소홀했다.
우딕도 순순히 한발 물러나 조기정을 보며 간단히 설명했다.
“아까 전 반 지성교의 신부가 허 성주를 습격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애초부터 성주를 죽이는 게 아니라, 거리를 좁히고 눈을 맞추며 성주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었어요.
성주에게 최면을 걸어 모든 귀족이 소집된 이곳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해, 위드 시티 고위층을 완전히 쓸어버리려 한 거죠.”
그는 이제 이 추측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단순히 허양원만 죽이려고 했다면 신부는 이렇게까지 다양한 수작을 부리고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실제 목표는 그보다 훨씬 크고 심층적이었다. 처음부터 위드 시티의 모든 대귀족을 제거해버리는 것이 진짜 목표였다.
그러나 허양원에게 일반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몰래 최면을 걸 순 없었다. 내내 그의 곁을 지키는 기계 승려 정념이 가진 예지 능력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 영생인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최면을 건다는 건 아예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시도 단계에서 쉬이 발각될 테고, 들킨 순간부터는 도망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일단 허양원이 연 회의에 참석하려면 모두 삼엄한 몸수색을 받고, 몸에 숨길 수 있는 경화기만 소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갖가지 제한이 많아 위드 시티의 모든 귀족을 단번에 쓸어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또한 이곳에는 충분한 보안 조치도 설치돼 있었다. 그런데도 신부의 이 어마어마한 목표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었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랬군요⋯⋯.”
정념이 낮게 염불을 외웠다. 이제야 앞뒤 상황을 파악한 그는 위험한 예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여태까지는 두 번째 암살 시도가 있으리라고만 믿고 있었다.
“대단해!”
성건우도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지금 아이스모스 권총을 쥔 채 혼자 경비 십여 명과 대치 중인 상황이 아니었다면 손뼉까지 쳤을 것이다.
장목화 역시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성건우가 몹시 감탄 어린 얼굴을 하고 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신부의 수작에 대한 감탄이었다.
어렵사리 상황의 진상을 파악한 귀족들은 우딕이 데려온 웬 남자가 감탄하는 것엔 신경 쓰지도 않고 분분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 이미 각자 소식통을 통해 이 고급 사냥꾼이 위드 시티에 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던지라 얼른 돌아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우딕이라고 했나? 정말 고마워. 자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끝장났을 거야.”
“돌아가 반드시 사례하지.”
“젠장, 평생 수많은 풍파를 겪어오기는 했지만, 오늘은 정말로 누구의 손에 죽는지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날 뻔했어. 우딕, 우리도 서로 천천히 알아가자고. 일이 마무리되면 내 꼭 우리 장원에 초대하지.”
“도시 질서가 회복되기만 하면, 바로 반 지성교의 신도들을 잡아 중앙 광장에서 화형 시켜 버리겠어!”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기계 승려 정념은 허양원에게서 H494 폭약을 분리했다. 검은 리모컨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고위험 물품을 직접 의사당에서 먼 곳으로 옮기고 싶었으나 허양원을 살펴보곤 마음을 접었다. 경호원은 고용주로부터 3미터 이상 떨어져서는 안 되었다.
“누가 이걸 가져가겠습니까?”
폭약을 든 정념에게서 전자합성음이 흘러나왔다.
위드 시티는 승려 황원의 가장자리에 자리해 있었다. 그래서 기계 승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귀족들은 대략이나마 정념의 신분을 짐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폭약 여러 묶음과 리모컨을 보고 선뜻 나서기는 어려웠다. 체면까지 버리고 직접 이 일을 맡으려 하는 귀족은 없어 보였다.
경호원을 보내는 것도 그들의 방어력을 약화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밖에 있는 호위대를 부르는 건 규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연쇄 반응을 일으키게 될 아찔한 가능성이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혼란한 틈을 타 무력으로 이곳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폭약 묶음에 다른 리모컨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혹여나 신부와 그의 동료가 성주 저택 어딘가에 숨어 리모컨을 누를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아마 폭약을 인계받은 사람은 뼛조각 하나 남지 않을 터였다.
물론 다들 위험한 물건을 최대한 빨리 밖으로 옮겨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 마땅한 수 없이 전부가 다 우딕을 바라보았다. 귀족들 모두 우딕이 폭약을 맡아 처리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입을 열기 직전, 누군가가 기꺼이 자원하고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지원자는 바로 성건우였다.
“좋아!”
“용감하군!”
귀족들은 곧장 동조하며 각자 경호원들에게 성건우와 장목화에게로 향한 무기를 거두라는 손짓을 취했다.
이내 성건우는 빠르게 걸어가 왼손으론 정념에게 물건들을 넘겨받은 후, 오른손으론 악수를 청했다.
정념은 뜻밖의 청에 흠칫 놀라긴 했지만, 순순히 금속 골조로 이뤄진 오른손을 내밀며 성건우의 손을 맞잡았다.
“선사, 나중에 노래 하나 들려드릴게요.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성건우가 열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황이 이토록 심각하고 진지하지 않았다면 장목화는 당장 손으로라도 얼굴을 감쌌겠지만, 지금은 그냥 잠시 고개만 돌려버렸다.
정념은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으나, 조기정이 먼저 이 적막을 깨뜨렸다.
“이제 성주를 깨워야지. 성주만 아는 세부적인 사항도 있을 테니.”
우딕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정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념은 즉각 허양원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성건우는 이를 지켜보고 싶었지만, 손에 든 위험한 물건 때문에 빨리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겨우겨우 조금씩 문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몇 초 후, 허양원이 깨어났다. 한동안 그는 멍한 얼굴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또 급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허리춤을 살폈다.
“허 성주님, 성주님께선 신부에게 최면이 걸렸습니다.”
우딕이 말했다.
허양원은 여러 차례 표정 변화를 보이다 탈진한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생각나⋯⋯. 씻을 때 머릿속에서 계속 저들을 날려버리란 속삭임이 들렸어. 그 후에 나는 방 안의 비밀 무기고에서 폭약 한 묶음을 꺼내왔지.”
자살 폭탄 테러가 실패로 돌아가고 진상을 파악한 순간, 그에게 걸린 최면도 자연스레 풀렸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조기정이 은근한 방식으로 핀잔을 주었다.
“성주, 잔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사냥꾼 길드 출입을 좀 줄이세요.”
애써 기운을 차린 허양원은 상대의 잔소리를 무시한 채 문밖의 경비들을 향해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외쳤다.
“손성봉에게 알려! 팀이 조직 되는대로 곧장 반격에 나선다. 1시간 안에 황야유랑자들을 도시 밖으로 몰아낼 수 있도록.”
성주의 정신이 말짱해진 것을 확인한 귀족들은 마음을 완전히 놓고선 분분히 자리로 돌아가 각자의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요, 그 빌어먹을 짐승들이 우리 도시를 얼마나 파괴했습니까. 물자들을 최대한 덜 망가뜨렸기를 바랄 뿐이에요.”
“우리 식량은 모두 우리가 고생해서 심고 거둔 겁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쉽게 넘길 수는 없어요! 일부에게 노예가 될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을 충분히 한 거예요.”
“그냥 성문 밖에서 얌전히 지내면서 퍼스트 시티의 노예 포획대를 기다릴 수는 없답니까?”
“그러게, 평소에 식량 좀 아끼지. 그러지 못해서 굶어 죽는 데 누굴 탓하겠습니까?”
“그들을 도시 밖으로 몰아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잔혹한 교훈을 주지 않는다면 나중에 또 이렇게 기어오를 거에요!”
“살려둬봤자 골칫거리일 뿐입니다. 총알을 낭비하지 않고 그들을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갖가지 의견이 쏟아지는 와중, 이들은 다시 허양원이 전에 언급한 사후 처리 대책을 겨냥했다.
“성주,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는 안 됩니다.”
“구제하더라도 아무 대가도 받지 않을 순 없어요. 도시 주민들에게도 부동산과 상점, 가구가 있잖아요? 그런 것들로 식량을 교환하면 될 겁니다.”
“많이들 죽었으니 식량이 부족할 리는 없잖습니까?”
“죽은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묻으라고 해야겠어요. 썩은 시체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그것도 골치 아파져.”
“잠깐은 도와줄 수 있겠지만 겨우내 부양할 수는 없습니다. 더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해요. 아니면 성주께서 직접 나서서 퍼스트 시티에 식량과 물자를 빌려보는 게 어떻습니까?”
“정 안 되면 새 주민을 받으면 되지요. 온다는 사람은 많을 겁니다.”
“사람보다 식량이 귀한 세상이라⋯⋯.”
“여러분, 여러분! 무엇보다 평화가 우선입니다.”
어지럽게 뒤얽힌 여러 목소리에 허양원의 머리가 다시 웅웅 울렸다.
탕!
그 순간, 또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아까 전 장목화의 총을 맞고 망가진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그대로 추락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말투가 느릿한 모리치는 또 한 번 미끄러지듯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숨겼고, 뚱뚱한 조기정은 놀란 고양이처럼 튕기듯 일어나 구석으로 돌진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이번에 그는 큰아들을 챙기는 것도 잊어버렸다.
귀족들이 흩어지는 사이 우딕은 테이블 상석으로 몸을 날려 샹들리에를 피하며 정념과 함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자리한 성건우는 한 손으로는 리틀머시룸 여러 묶음과 검은색 리모컨을,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스모스를 쥔 채 테이블을 겨누고 있었다.
이윽고 방 안의 모든 시선이 하나둘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그가 환한 웃음을 그려 보였다.
“내가 이 단추를 누르면 폭약들은 펑! 터질까?”
펑, 소리를 강조하듯 말한 그의 질문에 순간 모든 귀족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너 미쳤어?”
우딕이 놀란 얼굴로 외쳤다.
성건우는 더 환한 웃음과 함께 우딕을 돌아보았다.
“이제 알았어?”
곁에 선 장목화는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돌아서 뒤쪽의 경비들을 총으로 겨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