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곧장 뒤로 물러난 장목화는 달리고 굴린 끝에 금세 문 근처에 이르렀다.
성건우를 버려두고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거리를 벌려서 신부의 각성자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을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상대에게 통제되지만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거리에서도 그녀는 거의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뽐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장목화는 갑자기 두 다리가 뻣뻣해졌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도 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겨우 넘겼다.
신부는 한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조금 전 몸을 숨겼던 그 방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러곤 엷은 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소용없습니다. 이 건물 전체가 제 능력 범위 안에 있으니까요. 조금 전 달려들면서 거리를 좁힌 건, 그저 우딕을 통제하기 위해서였어요.”
이 기묘한 환경과 분위기 속, 그의 창백한 얼굴은 더 아파 보였다.
그 시각, 성건우 역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두 손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때맞춰 양손 동작 불능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는 줄곧 장목화를 보호하기 위해 그 능력의 효과를 그녀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신부는 계속해서 능력의 대상을 바꾸면서 혼자서 두 적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목화를 벽으로 몰아 직접 머리를 박아 죽게 하는 등의 정교한 조작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이내 성건우가 자신과 장목화의 상태에 주의해 시종일관 능력을 사용하는 한편, 약간 흥분한 듯 웃으며 말했다.
“빌런은 언제나 말이 많아서 죽는 법이지. 설마 그걸 모르나?”
병약해 보이기만 한 신부가 웃음을 지었다.
“제가 이렇게 말이 많은 건 별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한 가지 능력을 사용하는 중에는 다른 능력을 사용할 수가 없어요. 심령의 복도에 진입해 특수한 물건을 얻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당신도 각성자이니 알고 있겠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당신 역시 다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걸.”
다시 말해, 신부는 지금 저도 모르는 사이 덜미를 잡힐 일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천천히 좌우를 둘러보던 그가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저한테는 하인도 둘이나 있지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양쪽 복도에서 각각 한 사람씩 걸어 나왔다. 빠른 속도로 다가온 까닭에 그들의 모습도 곧바로 드러났다.
한 명은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눈썹이 곧은 미남이었지만 눈은 완전히 뜨지 않고 있었다. 긴 머리를 올려 묶은 다른 사람은 부드러운 이목구비에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눈썹 안에 난 검은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그들은 바로 배윤수와 임보경이었다.
두 달 가까이 실종상태였던 두 사람은 그렇게 멍한 눈빛으로 나타났다.
그때, 두 사람이 동시에 총을 들어 올려 성건우와 장목화를 겨눴다.
신부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아, 참. 알려드리는 걸 잊었네요. 제가 도시 밖으로 나가 한 바퀴를 돈 건, 조금 전 최면 의식을 증강하려는 게 아니었어요. 여러분이 기다리는 지원군은 아마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겁니다.”
* * *
장목화, 성건우, 우딕이 신부를 쫓아 차를 몰고 북쪽으로 향하던 그 시각, 성벽 밖의 수많은 황야유랑자는 여전히 영혼을 잃은 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유난히 날씨가 추웠다. 오늘 같은 날 도시 밖으로 나오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노예나 각종 쓰레기를 사려 하는 이들도 지금은 이미 충분히 많이 사둔 상태였다.
땅굴 옆, 언제 깎았는지 모를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는 텅 빈 눈으로 굶주림에 지쳐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부인과 아이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 솜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 행색이 꼬질꼬질하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다. 남자는 땅굴 옆에 앉은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성진, 우리 무슨 방법이라도 마련해야 하지 않겠어?”
땅굴 옆에 앉아 있던 남자의 이름은 조성진이었다.
조성진은 다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로 매우 무기력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두한, 무슨 방법이 있겠나?”
그러자 이두한이 응답한 동료를 향해 씩, 웃음을 보였다. 그런데 그 웃음에서는 어쩐지 잔인한 느낌이 났다.
“쳐들어가야지! 다 함께 쳐들어가는 거야! 이곳에 이렇게 앉아 있다가는 오늘 밤을 견디지 못해. 밤에 눈이 내릴 거야. 하지만 쳐들어간다면 적어도 살길은 강구해 볼 수 있잖아!”
조성진은 아내와 아이를 바라보며 망설였다.
“어떻게 쳐들어가? 전에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이두한이 엄숙하게 말을 꺼냈다.
“그때는 너무 성급했어. 충분히 거칠게 굴지도 못했지. 일단 성문 쪽에 있는 인파에 섞여든 뒤 성문을 지키는 경비를 처리할 기회를 노리는 거야. 그리고 후에는 모두를 선동해 함께 성문 안으로 들이닥치면 돼! 성벽 위의 총이 많아봤자, 총알이 많아봤자 이곳에 있는 사람들보다 많겠어?”
그리고 그가 옷을 살짝 들어 올려 오래된 리볼버 한 정을 드러냈다. 이를 보고, 조성진이 깜짝 놀랐다.
“이 총, 안 팔았어?”
그러자 이두한이 입꼬리를 뒤틀며 대꾸했다.
“다들 배가 불렀는지 최근엔 뭘 사려는 사람이 없어. 휴, 팔고 싶어도 팔지를 못해. 아마 나 같은 사람 많겠지. 그런 사람들을 모으면 수십 정에서 100정 정도는 될 거야. 그런데도 겁나? 어쩌면 이건 운명일지도 몰라.”
조성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죽게 될 텐데⋯⋯.”
“뭘 그렇게 겁내?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그런데도 겁을 낼 필요 있어? 정 못 들어가겠으면 부근의 장원이라도 털면 돼. 그곳에는 사람도, 총도 훨씬 적지만 먹을 건 아주 많지. 그마저도 안 되겠으면 죽은 사람이라도 먹으면 될 테고.”
이두한의 표정이 이상하리만치 음침해졌다.
“……그래.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 이건 전부 빌어먹을 세상 때문이야! 성진, 수아와 천호가 이대로 굶어 죽길 바라? 더 이상 버티지도 못하게 됐을 때 우리가 서로의 아이를 바꿔 먹기를 원해? 내가 네 아이 천호를, 네가 우리 현이를 먹을 날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거야?”
순간 조성진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좋아! 널 따를게. 차라리 죽으면 그렇게 끔찍한 일도 못 저지르겠지.”
이두한이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성진, 네 그 낡은 확성기. 아직 안 팔았지?”
조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팔았어. 아직 쓸만해.”
이두한은 한숨을 들이마셨다가 느릿하게 내쉬었다.
“좋아, 이따가 나한테 그걸 줘. 모든 이들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줘야 할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모두가 목숨을 걸지 않는다면 다 죽게 될 거야.”
조성진은 이제 더는 이의를 표하지 않고 다급하게 물었다.
“내가 또 뭘 도울 수 있겠어? 또 찾아야 할 사람은 없고?”
“됐어, 이미 다 연락을 취해뒀어.”
말을 마친 이두한이 고개를 돌려 성문을 바라보았다. 점차 거칠어지는 눈빛이 조금씩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조성진과 주위의 상당한 사람들도 같은 눈빛으로 성문을 응시했다.
* * *
북풍이 몰아치고, 납빛 구름이 묵직하게 드리운 하늘 아래, 성문을 지키는 경비들은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있어도 추위를 떨칠 수 없었다. 특히 밖으로 드러난 얼굴은 얼음처럼 굳어선, 칼로 에는 듯한 통증이 일기도 했다.
하늘은 당장이라도 폭우를 퍼부을 것처럼 어둑했지만, 아직은 오전이었다. 그래서 경비들도 딱히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있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주위를 훑으며 도저히 산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성문 밖 황야유랑자들의 뻣뻣한 얼굴만 보고 있었다. 황야유랑자들은 꼭 부족한 솜씨로 아무렇게나 만든 조각상들 같았다.
허리춤에 권총을 찬 하급 장교가 성문을 이리저리 다니며 중얼거렸다.
“퍼스트 시티의 다른 노예 포획대는 언제쯤 오려나. 계속 이대로 갔다가는 무슨 사달이 날 텐데. 죽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전염병이 돌지도 몰라.”
이는 많은 이들에게 전쟁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악몽 같은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릉-!
그의 귓가에 갑자기 굉음이 닿았다. 폭발음이었다. 소리는 노스 스트리트 깊은 곳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성문에 배치된 모든 경비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틀었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중얼거리던 하급 장교의 곁눈에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황야유랑자 한 무리가 들어왔다. 그들은 성문 근처에 모여있던 인파 속에서 손에 총을 든 채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리볼버, 산탄총, 더러는 매우 낡아 보이는 소총을 들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것들은 전부 총이었다.
“조심⋯⋯.”
하급 장교가 막 경고하려던 찰나, 대량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탕탕탕탕탕!
눈앞이 캄캄해진 하급 장교는 밀물처럼 밀려드는 극심한 통증에 그대로 잠식되어 버렸다.
한 차례 격렬한 사격에 성문을 지키던 경비 중 절반이 쓰러졌다. 남은 이들도 전부 부상을 당해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래도 저마다 방어시설로 달려가 손에 든 무기로 반격에 나섰지만, 놀랍게도 황야유랑자들은 자신들을 향해 날아드는 총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오직 성문으로만 달려들고 있었다.
총에 맞은 이들은 끊임없이 픽픽 쓰러졌지만, 남은 이들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마치 그들의 전방에 자리한 것이 신세계나 극락정토라도 되는 것처럼 멈추지 않았다.
황야유랑자들의 표정은 전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눈도 잔뜩 충혈되어 있어, 꼭 지능이 있는 야수나 무심자 같은 모습이었다.
이때, 확성기를 든 이두한이 미친 듯이 외쳤다.
“돌격! 돌격! 안에 들어가면 먹을 게 있다! 안에 들어가면 살 수 있어!”
성문 밖 셀 수 없는 황야유랑자들의 눈빛이 전부 이곳으로 쏠려 있었다. 어느 하나 붉게 물들지 않은 눈이 없었다.
그들은 곧 성문을 지키는 경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직 체력이 좀 남아 있는 듯 빠르게 움직이는 자도 있었고, 이미 상당히 허약해져 있어서 뒤쪽에서 겨우 따라오기만 하는 이도 있었다.
다다다!
성 위에 배치된 기관총 여러 정이 불을 뿜자, 황야유랑자들 다수가 지푸라기처럼 풀썩 쓰러졌다.
단 1분간의 사격에 상당히 많은 이들이 숨을 거뒀다.
이 광경을 보고 겁을 먹은 뒤쪽의 황야유랑자들이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엔 아예 멈춰서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기관총이 조용해졌다. 다시 장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가장 먼저 성문으로 달려들었던 조성진을 비롯한 이들은 이미 그곳의 경비를 해치우고 더 많은 무기를 빼앗아, 빠른 속도로 성곽 위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기관총의 위력에 당장이라도 흩어져버릴 것처럼 머뭇거렸던 황야유랑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또 한 번 광분해 다시 위드 시티로 몰려들었다.
제1 병원에서 일어난 폭발에 결집하기 시작했던 도시 방위군과 성주의 호위대는 이 상황에 어느 쪽을 지원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기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