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도시 밖
용여홍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대꾸했다.
“그래서 저들을 밖에 세워둘 수밖에 없는 거야? 사람을 사기를 원하는 이들만 나와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는 거고?”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드 시티는 이렇게 많은 노예를 다 수용하지 못해. 퍼스트 시티에서 때맞춰 사람을 보내 데려가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지. 유진의 노예 포획대도 원래는 사람들 한 무리를 데려가려 했을 거야. 지금은 모르겠지만.”
이 말에, 용여홍이 약간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팀장과 건우가 유진이라는 그 나쁜 놈을 죽여서 오히려 무고한 죽음을 맞는 이들이 생겨났다는 거야?”
백새벽이 후배를 가르치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너도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해. 유진은 갈기갈기 찢고 뼈를 갈아 마셔도 부족한 악당이고, 그놈 목적은 그저 돈을 버는 거였어.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분명 상당수 사람한테 살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지.”
팔려 간 모든 이들이 광산으로 보내져 몇 년 안에 죽는 건 아니었다.
침묵하던 용여홍은 한참 뒤에야 짤막하게 외쳤다.
“이 빌어먹을 세상!”
백새벽도 곧 밖을 내다보았다.
“유진의 노예 포획대에는 머지않아 새로운 수장이 생길 거야. 그런 녀석들이 돈 벌 기회를 놓치려 할 리는 없으니까. 기다리는 사람은 벌써 이렇게나 많은데도 매일 새로운 유랑자들이 모여들어. 며칠 후에도 이런 상황이 해결되지 못한다면 분명 큰 소동이 일어나겠지.”
그녀는 그러한 일을, 진정한 인간의 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소동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 * *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구역을 벗어난 지프는 터비드리버로 꺾어졌다.
잎이 노랗게 시든 나무로 이루어진 숲을 끼고 돌아 4~5분 정도 더 나아갔을 무렵, 넓게 펼쳐진 밭이 시야에 들어왔다. 겨울을 만난 밭은, 황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프가 곧 장원 입구에 이르자, 총을 쥔 경비들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
백새벽은 사냥꾼 배지를 내보이며 황도명의 부모를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장원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다만 그들 대신 말을 전한 경비대원 하나가 황도명의 부모를 데리고 나와주었다.
50대로 보이는 부부의 머리는 거의 다 하얗게 세어있었다.
용여홍의 설명을 듣고, 황도명의 어머니는 무척 걱정스러워했다.
“우리 도명이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고? 분명 이틀 전 밤에 떠났는데!”
백새벽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떠나기 전에 이상한 모습을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황도명의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진 않았어요. 그냥 우리가 얼른 결혼하라고만 채근했지.”
황도명의 아버지는 굉장히 성실해 보였다. 옷 밖으로 드러난 그의 피부는 햇빛에 까맣게 그을려 있었으며, 곳곳은 말라서 갈라져 있기까지 했다.
그 역시 기억을 더듬으며 백새벽의 질문에 답했다.
“5시가 못 돼서 급히 떠났어요. 도시까지 가려면 걸어서 한나절은 걸리고, 날이 저문 뒤에는 굶주린 야수를 만날 수도 있으니⋯⋯. 혹시 그 야수들을 마주친 건 아니겠지?”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남자를 보고, 백새벽은 잠시 용여홍과 시선을 주고받은 뒤에 운을 뗐다.
“저희가 황도명 씨가 지났을 길을 따라 한번 찾아볼게요.”
부부의 기대 어린 눈빛 속에, 백새벽과 용여홍은 다시 차에 올랐다.
* * *
지프차는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속도는 장원으로 향했을 때보다 훨씬 느렸다.
백새벽과 용여홍은 면밀하게 주위를 살폈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차에서 내려 근처를 수색하기도 했다.
한참 뒤, 지프는 그 숲 밖에 이르렀다.
나무의 잎은 거의 다 떨어져 있었지만, 나무들에 가린 숲 안쪽은 매우 어두워서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차를 세운 백새벽이 용여홍에게 말했다.
“차 보고 있어.”
이러한 상황에 이미 익숙해진 용여홍은 아이스모스 권총을 꺼내 들고 지프 옆에 서서 사방을 경계했다.
마찬가지로 권총을 뽑아 든 백새벽이 천천히 숲으로 들어갔다.
굵은 나무 한 그루를 지나친 그때였다. 순간 백새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숲 안쪽 깊은 곳, 높지는 않아도 굉장히 튼튼해 보이는 가지에 암적색 솜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몸을 축 늘어뜨린 채 걸려 있었다.
남자의 목에는 황갈색 허리띠가 매여 있었고, 바지는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바람이 살랑 불자, 가지에 목을 맨 남자의 몸도 살짝 흔들렸다.
* * *
윤복 총포사 2층.
백새벽의 보고에 장목화가 흠칫 놀랐다.
“……황도명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정광용이 운이 좋은 편이었네.”
“그 반 지성교 녀석들, 정말 미친 것 같습니다.”
용여홍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황도명의 시신을 확인한 부모의 반응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성건우가 그런 친구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럼 그놈들이 안 미친 줄 알았어? 언제부터 그런 착각을 했던 거야?”
“처음에는 그냥 맥없이 책만 불태우는 문맹 조직인 줄 알았지.”
용여홍도 세상 물정을 알지 못했던 스스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내 장목화가 말을 받았다.
“그놈들이 도서관을 불태운 거 기억나? 방화 자체도 심각한 범죄야. 너희도 한동안 조심해야 할 거야. 그 신부라는 자, 아주 아주 위험해.”
용여홍의 얼굴에 금세 심각하게 걱정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제 어쩌죠?”
“일단은 우딕이 조사를 마치길 기다려야지. 그가 반 지성교 교도를 한 명이라도 찾아내면 좋겠는데.”
장목화는 계속 우딕에게 전한, 성주와 만나고 싶다는 제안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백새벽에게 물었다.
“무선 통신기랑 관련된 일은? 뭐 진전이 좀 있었어?”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립할 수 있다는 사람은 찾았어요. 가격도 꽤 저렴하던데요. 내일 가서 이야기해볼게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장목화가 바로 성건우와 용여홍을 쳐다보았다.
“봐, 보라고. 이게 바로 너희가 전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야. 좀 배워.”
성건우가 곧장 대꾸했다.
“조건만 충분하다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조건이 뭔데.”
장목화가 예민하게 반문했다.
“연습할 기회요.”
언제나처럼 성건우는 솔직하게 답을 했다.
* * *
하늘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다. 유호중과 유진의 죽음이 연달아 일어난 터라 바깥의 순찰 인원도 적잖게 늘어난 상태였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온 구조팀은 각자의 무기를 정비하며 반 지성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단전이 될 무렵 그들은 빠르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 일찍 잠들었다가 일찍 일어날 작정이었다.
밤 몇 시쯤 되었을까, 누군가 장목화와 성건우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정적을 깨는 소리에 성건우는 1층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등 뒤에 숨긴 손에는 아이스모스가 들려 있었다.
장목화도 어느새 소리소문없이 일어나 총으로 문을 겨누고 있었다.
한밤중에 찾아온 방문객은 대표로 돈을 모아 임시 교사를 초빙했다던, 윤복 총포사 주주 고상아였다.
두꺼운 솜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잠들어 있다가 방금 막 일어나 달려온 것 같았다.
그녀는 성건우가 손을 등 뒤로 숨긴 건 인지하지 못한 듯 다급히 외쳤다.
“안 선생님이 너희를 찾아! 많이 다치신 것 같아. 아래층에 있어!”
‘안여향?’
장목화의 머릿속에 불이 켜졌다.
* * *
2층의 어느 방 안, 마찬가지로 놀라 깨어난 백새벽과 용여홍도 창문 너머로 사방을 감시하며 혹시나 일어날지 모르는 뜻밖의 상황에 대비했다.
한편 장목화와 성건우는 빠르게 윤복 총포사 뒷문에 이르렀다.
그곳에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안여향이 있었다.
밤하늘 달빛 아래, 안여향은 붕대로 간단히 둘러놓은 왼쪽 하복부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의 손과 옷에는 또렷한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괜찮아?”
장목화가 물었다.
“괜찮아.”
안여향은 상당히 침착했다. 심각하게 다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자 장목화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올라가서 이야기하자.”
장목화와 성건우의 방에는 구급상자가 있어서 조치도 더 세밀하게 하고, 감염 예방에도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일단 응급처치를 마친 뒤, 장목화가 고상아에게 말했다.
“이만 돌아가 봐. 앞으로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계속 이 일에 끌려들었다가는 너한테도 불필요한 문제가 생길지 몰라.”
아이가 떠오른 고상아는 고집 피우지 않고 곧장 방을 떠났다.
나무 문을 잘 닫은 뒤 돌아선 장목화가 안여향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여태 이 질문을 하지 않은 건 안여향이 급하게 상황부터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시간을 다투는 일이 아님을, 10여 분 일찍 상황을 파악한다고 해서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뜻했다.
역시 안여향은 침착하게 말했다.
“습격을 당했어.”
“습격?”
장목화는 살짝 의아해했다. 그녀가 보기에 직접적으로 공격을 하는 건 신부의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안여향은 조리 있게 말을 이어나갔다.
“난 저녁에 또 다른 곳에서 임시 교사 일을 해. 그곳에서는 아주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쳐. 11시 반쯤, 수업을 마치고 웨스트 스트리트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한 사람을 마주쳤어.”
저녁 8시 반 이후에는 웨스트 스트리트와 노스 스트리트에만 전기가 끊기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 임시 교실은 웨스트 스트리트에 사는 한 학생의 집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때, 성건우가 끼어들었다.
“검은 트렌치코트 차림에 비쩍 말라서 꼭 병든 것처럼 보이는 사람?”
안여향은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역시 그 사람이었네.”
성건우가 웃었다.
“그 사람이 내 앞으로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어.
‘부인, 지식은 구세계 파멸의 근원입니다.’
난 그런 수상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경계하고 있어. 거기다 오후에 너희들이 조사도 했었잖아. 그래서 그 사람이 더 이상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비수를 뽑으며 거리를 벌렸어.”
안여향이 솔직하게 말했다.
‘역시 안여향이야⋯⋯.’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신부가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 건 순전히 안여향의 반응 때문인 듯했다.
그런데 성건우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왜 총을 쏘지는 않은 거지?”
“그때는 그 사람을 놀라게만 할 작정이었어. 총보다는 비수를 뽑는 게 더 쉽기도 했고. 총이 아니라 비수를 선택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안여향이 간단히 설명했다.
“음?”
장목화가 의문을 표하자, 안여향은 왼쪽 복부의 상처를 가리켰다.
“갑자기 내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나를 찔렀거든.”
“또 다른 각성자 능력이네.”
장목화는 크게 놀라기보단 경계심을 더욱 높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만약 내가 총을 들었다면 분명 나를 쐈을 거야.”
유적 사냥꾼인 안여향 역시 고등 무심자를 본 적도 있고 각성자와 접촉한 경험도 있었다.
“그다음에는?”
장목화의 질문에 안여향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 틈을 타 나를 공격하지도, 곧장 자리를 뜨지도 않았어.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날 보면서 하던 말만 마저 하더라고.
‘부인의 행위는 인류를 독살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부탁이니 당장 멈추세요. 그러지 않으면 달지기의 올가미가 부인을 찾아올 겁니다.’
난 다시 그 사람을 공격하지 않으려고 꾹 참았고, 그 사람은 말을 마친 후엔 그대로 떠나버렸어.”
“미친놈!”
장목화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욕설을 내뱉었다.
반면, 성건우는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의식적인 느낌을 아는 사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