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정광용
뜰 입구는 변함없이 그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성건우는 이번엔 아무 말도 없이 압축 비스킷 한 봉을 남자의 품에 안겨주며 그의 입을 다물렸다.
이윽고 두 사람은 소녀의 말한 라인을 따라 4층으로 올라갔다.
406호를 향해 몇 걸음 나아가던 그때, 장목화가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안에 사람이 있어.”
“네.”
성건우도 그 사실을 인지했음을 표했다.
옷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아이스모스 권총을 움켜쥐면서 준비를 마친 장목화가 406호 문 앞에 이르러 왼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안에서는 막 잠에서 깬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아빠다.”
성건우가 거침없이 대꾸하자, 할 말을 고민하고 있던 장목화의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방 주인은 차오르는 분노에 경계심도, 망설임도 잊은 듯 냅다 달려와 문을 벌컥 열었다.
모습을 드러낸 건, 아무 특색도 없는 30대 정도의 평범한 남자였다. 남자는 가장 먼저 장목화를 발견한 후, 화도 잊은 듯 저도 모르게 웃음을 보였다.
“어, 어쩐 일이시죠?”
그 음흉한 눈빛에 장목화는 상대가 정광용임을 확신했다.
“정광용 씨?”
장목화가 웃으며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제야 성건우에게도 시선을 돌린 정광용은 한참 큰 상대의 키에 압도된 듯 경계심을 높였다.
그 사이 장목화는 사냥꾼 배지를 꺼내 보였다.
“조사 임무와 관련해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다면 응당⋯⋯.”
정광용은 말끝을 흐리며 엄지와 검지를 문질렀다. 하지만 그도 성건우가 있어, 차마 선을 넘는 요구까지는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장목화는 에너지바를 던지듯 건넨 뒤, 상대에게 값을 흥정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곧장 물었다.
“전에 임시 교사 일을 하셨죠? 왜 갑자기 그 일을 그만두셨어요?”
순간 정광용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떠오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답을 하지 않을 듯한 그의 모습에 장목화가 선수를 쳤다.
“지식은 독약이라는 주장과 관련된 일인가요?”
정광용은 얼마나 놀랐는지 몇 초간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뭘 알고 있는 겁니까?”
장목화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상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성건우 역시 상대가 시선을 피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그와 눈을 맞추려 했다.
정광용은 좌우를 한 번 두리번거린 뒤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이야기했다.
“들어와서 이야기하시죠.”
장목화와 성건우도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 * *
두 사람이 모두 안으로 들어오자, 정광용은 문을 꼭 닫고서 한동안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러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여태 여러 가족의 임시 교사를 맡고 있었어요. 날도 점점 추워지는데 밖에 나가서 모험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던 와중에 연달아 전단지 몇 장을 받게 됐어요. 거리에 붙어있는 것들이랑 거의 똑같았죠. 사고는 함정이고 지식은 독약이라는 그 전단지요.
그래서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냥 머저리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이스트 스트리트에서 옐로혼 앨리로 돌아와 뜰 입구에 들어가기도 전에 한 사람을 마주쳤죠. 저보다 키가 좀 컸어요. 그래요, 당신만 했죠. 거기다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요.”
정광용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장목화를 가리켰다.
“거기다 아주 말랐고 안색도 좋지 않았어요. 매우 초췌해 보였습니다. 꼭 큰 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요.”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남자는 제 앞으로 걸어와 저를 똑바로 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선생, 지식은 구세계 파멸의 근원입니다. 선생의 행위는 인류를 독살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부탁이니 당장 멈추세요. 그러지 않으면 달지기의 올가미가 선생을 찾아올 겁니다.’
그 사람의 두 눈은 너무 끔찍했습니다. 검은 눈동자는 이상한 구석이랄 게 없었는데 그냥…… 정말 끔찍했어요. 정확한 생김새도 기억 안 날 정도로요!
당시만 해도 전 그 사람을 무시했어요. 웬 미친놈이 난리를 피운다고 생각했죠. 근데 그날 밤 갑자기 깨어났을 때, 제가 옷걸이에 목을 매고 있지 뭡니까! 분명 그 직전까지는 잠들어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정말 죽음의 코앞에 이르러 있었죠!
전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어요. 다행히 옷걸이가 썩어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러져 버렸죠. 하지만 방에는 저 말고 아무도 없었어요…….
저는 너무 겁이 나서 다른 사람한테 감히 이 사실을 알릴 엄두도 안 났어요. 그래서 그냥 임시 교사 임무도 전부 다 취소해버렸죠. 그것 때문에 엄청난 손해도 보고요.”
정광용은 아직도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 감정이 격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침대 옆의 암적색 옷장 문을 벌컥 열고 직접 안을 보여주었다. 옷장 안에는 정말 그의 말대로 부러진 봉이 놓여 있었다.
‘최면인가?’
장목화는 조용히 추측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옆쪽의 성건우를 살피니, 그는 이미 정광용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곧이어 성건우는 아주 진심 어린 눈으로 이야기했다.
“당신은 유령을 만난 겁니다.”
“말도 안 돼⋯⋯! 그, 그럼 어쩌죠?”
정광용은 다짜고짜 부정했다가도 점차 그 말에 믿음이 실린 듯했다.
그 역시 자신이 귀신을 만난 걸지도 모른단 생각에 최근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임무를 받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간 모은 돈으로만 하루하루 버티는 중이었다.
“최대한 빨리 이사 가세요.”
성건우가 진지하게 제안했다.
혹시나 허튼짓할까 봐 성건우를 저지하려 했던 장목화는 생각을 바꿔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반 지성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든,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다시는 모종의 암시로 인해 발작하지 않기 위해서든, 머무는 곳을 옮기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었다.
한동안 망설이던 정광용이 답했다.
“⋯⋯좋습니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그와 작별한 뒤, 집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 * *
1층에 이르렀을 때야 장목화가 질문해왔다.
“네가 생각하기에는 정광용이 만난 그 사람이 누구인 것 같아?”
성건우가 웃음을 지었다.
“신부요. 제가 때려주고 싶다고 했던 그 신부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장목화가 실소했다.
“자신감이 넘치네. 뭐, 나쁘진 않아. 나중에 혹시 우리가 곤경을 맞닥뜨려서 낙담하고 있거나 아무 의지도 발휘할 수 없을 때, 네 그 강한 자신감이 전 팀원한테 전염될 거야. 그게 바로 이상주의적 낙관론이라는 거지. 음, 이거 네가 했던 이야기였나?”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갖다 쓰셔도 상관없어요.”
이제 층계참을 벗어난 장목화는 성건우를 살짝 노려보다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이 뜰에도 반 지성교 신도들이 있을 거야. 정광용에게 경고했던 사람이 근처에 숨어있을지도 몰라.”
그들에게 통제당한 임보경도 이곳에 묵고 있었고, 경고뿐만 아니라 스스로 목을 매 죽을 뻔했던 정광용도 이곳에 묵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면, 한 마디로 이 구역에는 반 지성교의 감시자들이 아주 많다는 뜻이었다.
장목화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진이 없다는 게 아쉽네. 그것만 있었어도 문지기한테 물어봤을 텐데. 집마다 찾아다니며 조사하는 건 너무 힘들어. 우린 절대 할 수 없어. 공연히 그 사람들 경계심만 높여서 뜻밖의 화를 일으키게 될 가능성도 크고.”
그때, 성건우가 눈을 반짝이며 얼른 입을 열었다.
“제가 진술을 토대로 정광용에게 경고했던 그 사람 얼굴을 그려볼게요.”
“꿈 깨. 일단 사냥꾼 길드로 가자. 가서 우딕을 찾는 거야. 그라면 정광용의 꿈을 통해 그 사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몰라.”
장목화가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건, 일전에 성건우가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성건우는 못내 아쉽다는 듯 대꾸했다.
* * *
옐로혼 앨리의 왼쪽 건물 문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은 사우스 스트리트를 따라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사냥꾼 길드가 자리한 웨스트 스트리트로 방향을 틀려던 그때, 갑자기 측면 전방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광!
별안간 들린 폭발음에도 두 사람은 민첩하게 행동했다. 한 사람은 몸을 빠르게 굴려 벤치 뒤에 웅크렸으며, 다른 한 사람은 시체처럼 그 자리에 납죽 엎드렸다. 총알을 막을 순 없지만, 혹시 모를 습격자의 시선은 피하기 위해서였다.
요란한 폭발음 이후, 중앙 광장은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날카로운 비명, 고함, 다급한 발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장목화는 전투가 발발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숨었던 곳에서 나왔다.
그녀는 곧 어렵지 않게 폭발음의 근원지가 어딘지를 찾아냈다.
폭발이 일어난 곳은 바로 위드 시티 공공 도서관이었다.
건물 유리창은 이미 전부 다 깨져버렸으며, 그 안에선 시커먼 연기와 붉은 화염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소방대에서는 한창 소방대원들이 급히 달려와 각종 수단을 동원해 불을 끄기 시작했다.
이윽고 온몸이 피로 범벅된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밖으로 이송됐다. 개중에는 신음을 흘리는 이도 있었지만, 이미 축 처진 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이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건우를 바라보던 장목화의 머릿속에 순간 한 단어가 떠올랐다.
‘반 지성교!’
다행히 도서관은 그다지 심각한 피해를 보진 않은 것 같았다. 일단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장목화는 습관적으로 주위의 상황을 살폈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경보가 해제된 걸 확인하고 이스트 스트리트와 중앙 광장의 경계에 모여 사건 현장을 구경 중인 사람들이었다.
그 무리 가장자리에, 검은색 트렌치코트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그는 장목화보다 살짝 더 큰 키에, 조금 헝클어진 짧은 머리칼, 그리고 굉장히 마른 체격의 소유자였다.
안색도 이상하리만치 창백했는데, 큰 병을 앓았다가 이제 막 낫기 시작했거나 어쩌면 아직 회복하지 못한 것처럼 병색이 완연했다.
그 순간, 남자도 장목화의 시선을 느낀 듯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카만 눈동자는 꼭 사람의 영혼마저 매장할 수 있는 심연 같았다.
그렇게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던 남자는 곧 인파를 비집고 장목화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몇 초간 침묵하던 장목화가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봤어?”
“네.”
성건우의 상체는 어느새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두 다리는 땅에 붙은 듯 조금도 움직이질 않았다.
장목화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곧바로 달려가서 저 사람에게 주먹을 날릴 줄 알았는데.”
성건우는 되레 이상하다는 얼굴로 장목화를 보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뛰어가봤자 따라잡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 덕분에 네가 저 사람이 위험인물임을 알아챘다는 건 안 들켰네.”
그리고 장목화는 불길이 좀 잡힌 도서관을 보며 느리게 숨을 토해냈다.
“타버린 책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도서관에 있는 책은 위드 시티 아이들의 희망이었다. 단순히 글을 익히기 위해서라면 임시 교사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배우려면 결코 책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장목화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성건우와 함께 웨스트 스트리트로 옮긴 그녀는 사냥꾼 길드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