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지인
곧이어 세 사람은 5층에 도착해 골목길 쪽에 붙은 방으로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넓은 방엔 침대, 테이블, 스툴, 종이, 간이 칠판이 마련돼 있고, 4개의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모든 것들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방에는 이미 일고여덟 명 정도의 여자들이 모여있었다. 제각기 스툴이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종이를 들고 전에 배운 글자들을 조그만 소리로 복습하는 중이었다.
방을 전체적으로 한번 둘러본 장목화는 성건우를 데리고 17~8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소녀의 옆에 앉았다.
쪼글쪼글한 흰색 솜옷을 입은 소녀는 지난 수업의 필기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또 방이 냉골처럼 추워서인지 몸을 살짝 떨고 있기도 했다.
이윽고 소녀가 복습을 일단락 지은 뒤 고개를 들었다. 소녀는 예쁘장한 편이었지만 다소 좀 초췌해 보이긴 했다.
장목화는 고개 든 소녀를 향해 아주 무해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넌 여기서 수업 들은 지 얼마나 됐어?”
“거의 두 달 다 됐어요.”
소녀가 예의 바르게 답했다.
“선생님은 어떠셔?”
장목화는 뭐라도 알아내기 위해 계속 질문을 이었다. 또한 이는 처음 이곳에 방문한 학생이 가장 관심 있어 할만한 부분이기도 했다.
“아주 좋으세요. 인내심도 강하시고, 아는 것도 되게 많아요.”
소녀는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이때 성건우가 끼어들었다.
“임시 교사를 초빙하자고 돈을 보탤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거야?”
그제야 뭔가 이상한 걸 느낀 듯, 소녀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에 왜 남자가 있지?”
뜰 주위에서 몸을 파는 여자들이 연합하여 마련한 이 수업에 남자가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남자는 몸 팔지 말라는 법 있나?”
성건우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장목화도 얼른 입을 열었다.
“내 친구야.”
소녀는 더욱 의혹 가득한 눈으로 성건우와 장목화의 얼굴을 훑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질문을 하는 대신 한숨을 쉬며 조금 전 질문에 답했다.
“우리 언니는 나이트클럽 매춘부였어요. 거기선 손님을 받지 말지, 어떤 손님을 받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가 없어요. 노예랑 다를 바 없는 거죠.
그러다 반년 전, 언니는 성병에 걸려 거기서 쫓겨났어요. 한동안 치료해줄 사람을 찾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얼마 못 가 죽었어요.
언니는 줄곧 이 업계에는 희망이 없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가 없다고 말했어요. 결국에는 몇 년 안에 병에 걸려 죽어버릴 거라면서 절대 자기처럼 살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난 그래도 내가 손님을 선택할 수 있으니 그나마 나은 편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도 방법은 아니죠. 언젠가는 언니처럼 그렇게 되겠죠, 나도⋯⋯.”
이 대목에서 말을 멈춘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그래서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글을 익혀야겠다고, 뭐라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시청 건물 직원으로 일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유적 사냥꾼 임무를 맡을 수도 있고요. 그럼 더 이상 이 일을 안 해도 되잖아요.”
“맞아.”
장목화가 동조했다.
대화를 더 이어가려던 소녀는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를 보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녀를 따라 일어난 장목화는 순간 흠칫 놀랐다.
방으로 들어온 임시 교사는 장목화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검은 늪 황야와 늪 1호 유적에서 만났던 그 사람, 바로 유적 사냥꾼 안여향이었다. 장목화는 오수혁과 같은 팀인 그녀에게 오수혁의 시신이 있는 곳도 알려준 바 있었다.
안여향은 이전처럼 카무 플라주 패턴이 들어간 옷 대신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이윽고 안여향의 차갑고 냉담한 표정이 살짝 무너졌다.
“너희는…….”
“놀랐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건우가 열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여향은 입을 벙긋거리며 한동안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경계심과 함께 혼란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장목화는 얼른 문밖을 가리켰다.
“나가서 이야기하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안여향은 밖으로 향했다. 그녀가 방을 완전히 떠나기 전까지, 줄곧 학생들의 의혹 가득한 눈빛이 뒤따르고 있었다.
* * *
안여향, 성건우와 밖으로 나온 장목화는 5층 복도 끝에 이르렀다.
“우리는 임무를 맡아 조사하는 중이었어. 너를 만날 줄은 전혀 몰랐네.”
장목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여향의 안색은 살짝 어두워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우린 수혁을 데리고 그 유적에서 떠난 후 위드 시티로 돌아와 수혁을 고향에 묻어줬어. 얻은 수확은 많았지만 남은 사람은 둘뿐이었지.
우리는 또 제각기 할 일을 찾아 찢어졌어. 난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안 나서 한동안 어떤 임무도 맡지 않았는데, 조금 회복한 뒤로는 도시 내의 임무만 맡아서 처리하는 중이야. 그중에 임시 교사 일도 포함되어 있고.”
“계속 이렇게 살려고?”
장목화가 보기에 안여향은 모험과 전투에 굉장히 적합한 인물이었다.
안여향은 고개를 돌려 임시 교실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원래는 일주일 정도만 하고 다른 일을 찾으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 일이 좋아진 거야?”
성건우 역시 그 이유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좋다기보다는…….”
안여향은 아무런 기복 없이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도움을 주고받았던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그녀는 평소보다 말이 좀 많아졌다.
“난 어느 살인자 조직에서 자랐어. 숨길 것도 없지. 신력 초기에는 그런 조직이 아주 많았으니까. 그러다 그 조직이 파괴된 어느 날, 난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때부터 애쉬랜드를 유랑하기 시작했지.
난 어릴 때부터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교육받았어. 글 역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배운 거였지. 그런데 목표가 없어지고 나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목표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수혁의 표현을 빌리자면, 난 조직이 사라진 뒤로 삶의 의미를 잃은 거야. 수혁을 만나고 나서야 서서히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하지만 내 깨달음이 너무 늦었나 봐. 수혁이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한 걸 보면⋯⋯.”
안여향은 몇 초간 침묵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수혁이 죽고, 난 또다시 삶의 의미를 잃고 말았어. 하지만 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으면, 나를 보는 저 사람들의 눈이 반짝거리는 게 보여.”
장목화는 안여향이 자신과 성건우에게 얘기하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안여향은 그저 이를 핑계로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장목화는 그녀의 말에 동조하지도, 이야기를 도중에 끊지도 않았다. 또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도 않으며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재차 침묵하던 안여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난 내 눈에서도 그런 빛을 본 적이 없어. 그래서 그런 눈빛을 더 많이 보고 싶어. 너희는 그 매혹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서 벗어난 거야?”
간단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뒤, 안여향은 덤덤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모처럼 나온 차으뜸의 이야기에 성건우는 살짝 흥분한 듯했다.
“그 녀석이 우리에게 진 빚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
장목화도 덧붙였다.
“우린 후에 너희들이 만났다는 고등 무심자와도 마주쳤어. 그로 인해 일어난 혼란 덕에 매혹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래도 그때 경고해준 건 고마워. 안 그랬으면 그 녀석의 매혹에서 순조롭게 벗어나진 못했을 거야.”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
안여향이 간결하게 답한 뒤, 임시 교실 쪽을 돌아보았다.
“근데 무슨 조사를 하고 있는데? 난 이제 수업을 시작해야 해.”
최대한 짧게 끝내달란 뜻임을 알아챈 장목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린 지금 지식은 독약이라는 전단지를 뿌리고 다니는 조직을 조사 중이야. 혹시 임시 교사 일을 하는 동안 위협을 받거나 한 적은 없어?”
순간 안여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며칠 전 내 방문 틈에 쪽지가 끼워져 있었어. ‘인류를 독살하는 행위를 멈춰라. 그러지 않으면 신의 징벌을 받게 되리라.’라고 적혀 있더라고. 근데 징벌을 ‘진벌’로 잘못 적어뒀었어. 앞뒤 문맥으로 이해했으니 망정이지…….
하지만 오늘까지 별다른 이상은 없어. 난 멀쩡해.”
“그게 바로 그들의 특징이야.”
장목화가 입을 열자, 성건우가 뒤이어 한 문장처럼 말을 덧붙였다.
“지능이 좀 낮지.”
잠시 생각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앞으로 며칠간은 더 조심하면서, 무슨 일이 있거든 우리를 찾아. 우리도 이곳에 묵고 있어. 고상아와 친구이기도 하고.”
“그래.”
혼자가 된 안여향도 꺼림칙한 일 앞에 다른 팀과의 합작을 꺼리진 않았다.
“그래, 다른 일이 없다면 이만 가봐도 돼. 아, 잠깐만. 우리가 늪 1호 유적에서 헤어진 지 아직 두 달이 안 됐지?”
대화를 마무리하려던 장목화가 갑자기 자문자답하듯 말했다.
“응, 한 달 정도밖에 안 됐지.”
안여향이 답했다.
“그럼 네가 이곳에서 임시 교사로 일한 지는 얼마나 된 거야?”
장목화가 캐물었다.
“한 3주 정도.”
안여향은 아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에는 다른 임시 교사가 저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거네?”
조금 전 그 소녀는 수업을 들은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고 했었다.
“맞아. 그 사람이 갑자기 일을 그만둬서 내가 이 일을 맡게 된 거야.”
안여향이 솔직하게 답했다.
“혹시 그 사람이 사직한 이유가 뭔지 알아?”
장목화는 약간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 난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아니면 직접 가서 저 여자들한테 물어보지 그래.”
안여향이 임시 교실을 가리켰다.
“좋아.”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성건우는 이미 임시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 * *
다시 방으로 들어온 성건우는 고상아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질문 하나만 할게.”
그의 모습에 고상아는 살짝 긴장했다.
“뭔데?”
“전 임시 교사는 왜 갑자기 일을 그만둔 거야?”
성건우가 거침없이 물었다.
고상아는 주위 여자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딱히 말씀하지는 않으셨어. 근데 참 좋은 분이셔. 우리가 미리 지불한 일주일 치 학비도 그대로 돌려주셨어.”
그때, 그를 따라 들어온 장목화가 자연스레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어디에 사는지는 알아? 어떻게 생긴 사람이야?”
고상아는 뜬금없는 질문에 약간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순순히 답해주었다.
“아주 평범한 남자야. 이름은 정광용. 눈빛이 좀 음흉하기는 해도 수업에는 매우 열심이었어. 구체적으로 어디에 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 순간, 조금 전에 같이 얘기를 나눴던 소녀가 머뭇거리며 끼어들었다.
“난 알아요.”
“어딘데?”
성건우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수려한 외모의 성건우와 장목화에게 본능적으로 호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래서 살짝 망설였다가도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일을 그만두기 전, 옐로혼 앨리에서 만난 적 있어요. 나, 나랑……. 자고 싶다고 했어요.
마침 돈도 부족했고, 알고 있는 사람이니 화를 당할 리는 없겠단 생각에 제안에 응했어요. 어쨌건 누구랑은 하룻밤을 보냈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나한테 준 돈도 꽤 많았어요.
집은 옐로혼 앨리와 레드실크 앨리 사이 뜰을 중심으로 옐로혼 앨리에 붙어있는 왼쪽 건물이에요. 2번째 라인 4층, 406호. 그래, 406호였어요.”
옐로혼 앨리와 레드실크 앨리 사이의 뜰이란 말을 들은 순간 장목화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임보경이 이전까지 묵었던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소녀의 진술에 주위 여자들이 킥킥 웃기 시작했다.
“왜 미리 이야기 안 했어?”
“잠자리가 형편없어서 다신 널 볼 낯이 없으니 그만둔 거 아냐?”
“어때, 잘하든?”
대담한 말이 오가는 와중, 성건우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곤 장목화와 함께 방을 나선 뒤 곧장 윤복 총포사를 떠나 레드실크 앨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