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이중 효과
날이 차차 밝아오기 시작한 그때, 누군가가 두 사람의 방문을 두드렸다.
특별한 방문자가 아닌, 바로 같은 팀 동료인 백새벽과 용여홍이었다.
백새벽은 얼른 자리에 앉아 내내 생각했던 말을 전했다.
“저와 여홍이는 당분간 자취를 감추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팀장님과 건우에게도 영향이 가지 않을 테니까요. 두 분은 계속해서 배윤수 구조팀의 실종 원인을 조사해주세요.”
그들이 이곳에 숨어있어야 할 기간은 길어봤자 1, 2주 정도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짧아질 수도 있었다.
“나도 그 방법을 고민해보긴 했는데,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생겼어.”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면서도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자세한 설명은 추리 광대 능력의 효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백새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번 해보죠.”
이내 용여홍이 약간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너무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확실히 위험하기는 하지. 그 후에는 남이 이모를 비롯한 이들과도 입을 잘 맞춰야 할 테고.
새벽아, 둘 중 어떤 방법을 선택할지는 네 자유야.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나랑 건우한테는 아무런 차이도 없어. 중요한 건 네 의견, 네 생각이야.”
장목화는 전혀 강요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고민에 빠진 백새벽이 다시 입을 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으로서는 유진의 실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어요. 만약 온 도시를 봉쇄한 채 모든 집을 조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이곳에 숨는다 한들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죠. 그보다는 먼저 혐의를 벗고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게 낫겠네요.”
마찬가지로 한참 고민하던 용여홍도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래.”
장목화는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훌륭해. 갈수록 담이 커지고 있네. 그럼 우린 일단 나가 있을게. 방해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방 안에는 곧 성건우와 백새벽만 남게 되었다.
“시작해.”
백새벽이 침착하게 말했다.
성건우는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더니, 순간 짙어진 눈동자로 백새벽을 바라보았다.
“봐봐. 위드 시티에는 네가 잘 알지 못하는 유적 사냥꾼 팀이 아주 많아. 나랑 목화도 역시 그중 한 팀이고. 그러니까⋯⋯.”
백새벽의 표정이 점차 이상해졌다. 자신이 왜 이 방에 있는 건지 모르겠단 눈빛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경계심 어린 눈으로 성건우를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성건우는 일찍이 정해둔 역할에 맞춰 웃으며 물었다.
“얼마면 되겠어?”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새벽은 허벅지에 힘을 잔뜩 주고 오른발을 뻗으려 했다.
성건우는 그녀의 반응을 내내 주의 깊게 살피고 있다가, 때맞춰 몸을 틀면서 그녀의 발길질을 피했다.
“다음은 없어.”
경고의 한마디를 남긴 백새벽은 곧장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에 성건우가 황급히 그녀를 불러세웠다.
“잠깐!”
백새벽이 매서운 눈초리로 고개를 돌렸다. 허튼소리라도 했다가는 곧장 총을 뽑아 들 기세였다.
성건우는 의혹 가득한 눈빛을 한 백새벽 앞에서, 쪽지 한 장을 집어 들고 작은 별 모양으로 접어 보였다. 뒤이어 그의 눈동자가 다시 짙어졌다.
“난 유적 사냥꾼이고 너도 유적 사냥꾼이야. 난 남이 이모의 총포사에 묵고 있고 너도 그렇지. 내 주머니 안에는 종이로 접은 별이 하나 들어있어. 그러니까⋯⋯.”
말을 하는 사이 그는 자신의 사냥꾼 배지를 꺼내 보이며, 백새벽이 보는 앞에서 종이로 접은 별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로써 그의 추리 광대 능력은 이전보다 조건 반 개가 더 붙은 상태로 결과를 유도했다.
살짝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던 백새벽은 몽롱하게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내 주머니에도 종이로 접은 별이 하나 들어있어.”
성건우가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그거 아주 중요한 도구야. 아주 신비로운, 초자연적인 힘과 연루돼 있어. 넌 아직은 그걸 만질 수 없어. 만져서도 안 되고⋯⋯. 누군가가 너를 심문할 때만 1분에 한 번씩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걸 찾아봐. 그걸 찾게 되면 그게 너한테 꿈을 꾸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거야.”
“미친놈!”
의심스럽다는 듯 성건우를 노려보다 욕설을 내뱉은 백새벽은 곧장 용여홍과 머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0여 초 후, 용여홍이 고개만 쏙, 들이민 채 물었다.
“성공했어?”
방금까지 그는 장목화와 층계참에 숨어있었다.
“대충은.”
성건우가 웃으며 답했다.
백새벽은 이제 성건우가 동료라는 것도 잊고, 그와 관련된 기억도 다 잊어버렸다. 그들이 유진을 처리했다는 사실도 그 기억 속에 포함돼 있었다.
앞으로 그녀는 추리 결과에 위배되는 사실을 마주한 후에야 묻힌 기억을 전부 떠올릴 것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용여홍이 물었다.
“이제 내 차례인가?”
“그럴 필요 없어.”
성건우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대답에 순간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차으뜸에게 대적했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고 갑자기 강렬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설마 벌써 나한테도 능력을 발휘한 거야?”
“여홍이 좀 놀리지 마!”
결국 장목화가 나서서 성건우를 타박하곤, 용여홍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넌 지금 우리랑 새벽이 사이를 잇는 다리야. 너마저 우리를 잊어버리면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진행해? 계획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나면 건우가 적당한 때를 틈타 너한테도 능력을 발휘할 거야.”
“알겠습니다.”
용여홍도 비로소 상황을 파악했다.
* * *
오전 9시 5분, 사냥꾼 길드에서 비스듬히 떨어진 맞은편 골목.
용여홍은 미행이 없음을 확인하고, 구석에 숨은 백새벽을 향해 조심스럽게 뛰어왔다.
“이제 길드로 가서 임무를 받아도 될 것 같아.”
백새벽은 베레모와 마스크를 벗고, 목에 두른 회색 스카프를 살짝 잡으며 답했다.
“알겠어.”
그녀는 반드시 조사에 협조해 혐의를 벗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유적 사냥꾼들이 계속 자신을 찾아와 귀찮게 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는 안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용여홍이 그렇게 위험한 장소도 아닌 사냥꾼 길드의 홀을 굳이 먼저 살펴보고 오겠다고 고집을 피웠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길드에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신입 사냥꾼이 이렇게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구는 건 분명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다.
백새벽과 함께 골목길 밖으로 나온 용여홍은 그들을 훑어보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며 당부하듯 말했다.
“누군가 널 심문하기 시작하면, 1분에 한 번씩 꼭 주머니를 더듬어야 해.”
백새벽이 피식 웃었다.
“정상도 아닌 것 같던 그 녀석이 한 말을 진심으로 믿는 거야?”
맞은편 방의 남자는 확실히 미남이긴 했어도 정신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새벽 자신도 방으로 돌아가 주머니를 더듬어 보고 만져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여태까지도 자신의 주머니에 틀림없이 종이별이 들어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심문을 받게 될 때 주머니를 더듬어 보라는 둥, 그 안에서 별이 만져지면 그건 꿈을 꾸고 있다는 뜻이라는 둥, 그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보노라면 애초에 종이별 따위는 없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백새벽은 특히 각성자와 관련된 비현실적인 일들을 직접 경험해본 적도,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내 잠재의식은 그 말을 믿고 있나 봐.’
백새벽은 얼른 생각을 털어버리곤 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유적 사냥꾼들보다 한발 앞서 사냥꾼 길드 홀로 들어갔다.
* * *
건물 안에 진입한 백새벽은 곧장 창구로 향하는 대신, 잠시 고개를 들어 대형 패널을 바라보았다. 그 안의 내용은 확성기를 통해 방송으로도 나오고 있었다.
[임무 : 유진 실종 사건 용의자 수배.
설명 : 남성 1명, 여성 1명.
남성 인상착의 : 키 180센티미터 정도, 파란 다운재킷과 야구모자 착용.
여성 인상착의 : 키 170센티미터 정도로 회색 솜옷과 야구모자 착용.
보수 : 심사 통과 후 유효한 단서 확인 시, 단서 하나당 최소 10오레이, 최대 500오레이.
임무 등급 : C, 신용 점수 100점.
⋯⋯.]
그리고 백새벽은 연이어 대형 패널에 떠오른 자신의 사진을 발견했다.
[임무 : 유적 사냥꾼 ‘백새벽’ 수색
설명 : 여성. 전하얀, 백단풍 등 가명 사용. 유진 실종 사건과 관련된 인물. 키 160센티미터 정도, 단발머리. 사진 참고 바람.
보수 : 유효한 단서 하나당 5오레이. 길드나 도시 방위군에 직접 데려오면 20오레이.
임무 등급 : E, 신용 점수 10점.]
‘정말 날 찾고 있네.’
백새벽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다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색 트위드 코트 차림의 남자 하나를 발견했다.
전에 본 적 있는 남자였다. 조금 전 용여홍이 저 남자가 고급 사냥꾼 우딕이라는 설명도 해준 바 있었다.
하지만 백새벽은 그의 존재에 개의치 않고 시선을 거둔 뒤, 둥근 단 구역의 한 창구 앞으로 다가가 덤덤하게 말했다.
“임무 접수하러 왔습니다.”
“어떤 임무 말씀이세요?”
창구 안 여자 직원은 본능적으로 응대했다. 그들의 직업 수칙에 따르면 창구를 찾아온 유적 사냥꾼에게 옆쪽 기계에서 직접 접수하라고 해선 안 됐다. 안내는 임무를 접수할 수 있도록 도와준 후에나 할 수 있었다.
“유적 사냥꾼 백새벽을 찾는 임무요.”
백새벽은 거리낌도 없이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임무를 거론했다.
“알겠습니다. 사냥꾼 배지 좀 주시겠어요?”
친절한 미소의 직원은 백새벽의 배지를 긁자마자 흠칫 놀라 굳어버렸다.
그녀는 몇 초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제야 창구 너머에 선 손님의 얼굴을 제대로 살피며 물었다.
“백새벽 님 본인이세요?”
백새벽은 사냥꾼 등록을 할 때 전하얀이라는 가명을 썼지만, 유진의 노예 포획대는 그녀의 본명으로 임무를 의뢰한 상태였다.
“맞아요. 이 기회에 돈이나 좀 벌려고요.”
백새벽은 아주 침착했다.
창구 안 직원은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직접 임무 완수 처리를 해드릴게요. 음,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보고부터 해야 하거든요.”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데려오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제 요구 조건만 만족시켜 주신다면 조사에 협조할 용의가 있거든요.”
백새벽은 거침없이 대꾸했다.
직원은 어떠한 결정도 내릴 자격이 없기에, 일단 책상 위의 전화를 들고 상부에 상황부터 보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남자는 여러 경호원을 대동하고 있었다.
좀 성기기는 해도 아직 머리는 새카맸지만, 눈가와 입가, 이마에는 주름이 나 있었다. 그리고 비교적 큰 코가 두드러지는 편이었다.
남자가 곧 자기소개부터 하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왔다.
“길드 부회장, 최은이라고 합니다. 백새벽 양? 긴장할 것 없어요. 도시 방위군은 그저 조사에 협조해주기를 바라는 거니까.”
백새벽도 즉각 자신의 조건부터 밝혔다.
“말씀드릴 조건이 있어요. 일단 전 그들을 믿지 않아요. 아시겠지만 진범을 찾지 못해 희생양 몇몇을 끌어다 없는 죄도 억지로 실토하게 하는 곳이 워낙 많잖아요. 그래서 전 오직 이곳, 사냥꾼 길드에서만 심문받고 싶어요. 조사에는 무조건 협조하겠습니다.
그리고 전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임무도 남았고, 생계를 꾸릴 돈도 벌어야 해서 시간이 무척 귀중하답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사냥꾼 길드는 언제나 사냥꾼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들을 도우면서, 그들의 집과 같은 장소가 되기를 바라는 곳이었다.
이 목표가 실제로 달성되든, 되지 않든, 최소한 사냥꾼 길드 고위층이라면 대놓고 이런 역할을 거부하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은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기다 이곳 사냥꾼 길드는 성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이 정도로 간단한 요구쯤은 얼마든 들어줄 수 있었다.
그래도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최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좋아, 걱정하지 말아요. 백새벽 양이 한 짓이 아닌 이상, 길드는 절대 그 죄를 백새벽 양에게 함부로 뒤집어씌우지 않을 거니까.”
최은은 주위 유적 사냥꾼들도 들을 수 있게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백새벽도 사냥꾼 관리를 담당하는 부회장의 약속이라면 충분히 안심할 수 있었다. 이내 그녀는 최은을 따라 2층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