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48화 (148/649)

148화. 시작된 곳에서 끝나다

윤복 총포사 지하실.

느릿하게 깨어난 유진의 눈에 어스름한 빛을 발산하는 전구가 들어왔다.

‘여긴 어디지?’

정신을 차린 그는 이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내 그는 자신이 기습받은 이후 자발적으로 습격자를 따라 어디론가 이동했고, 도착한 곳에서 백새벽에게 중요 부위를 걷어차인 것을 떠올렸다. 그 때문에 지난 평생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극심한 고통을 맛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아래쪽이 다시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얼굴 몇몇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는 백새벽의 얼굴이었다. 나머지 역시 낯은 익었지만, 정확히 누구의 얼굴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읍⋯⋯. 으읍⋯⋯!”

유진은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으나 입이 뭔가로 꽉 채워져 있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백새벽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몸부림쳐도 소용없어. 네 몸에 설치된 기계는 모조리 망가져 버렸거든.”

말을 마친 그녀는 목에 두른 회색 스카프를 풀어 ‘여자 노예’와 ‘105’라고 새겨진 문신을 드러냈다. 곁에서 남이 이모 역시 스카프를 풀었다.

『여자 노예. 98.』

남이 이모의 목 양옆에도 똑같은 흑청색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주위에 자리한 여러 명의 여자 역시 분분히 그들의 목을 가린 스카프를 풀며 문신을 내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단박에 파악한 유진은 눈앞에 자리한 여자들을 마구 비웃고 조롱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백새벽은 그를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남이 이모를 바라보았다.

“먼저 하실래요? 아니면 제가 먼저 할까요?”

몇 초간 침묵하던 남이 이모가 이를 악문 채 답했다.

“내가 먼저 할게.”

남이 이모가 옆쪽에 놓여 있던 반짝이는 비수를 집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유진은 거친 눈빛으로 상대를 위협하려 애쓰는 한편 격렬하게 발버둥을 쳤다.

익숙한 그 눈빛에 남이 이모의 몸이 자동반사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결국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도 비수를 쳐든 그녀는 거친 숨을 몇 번 내쉬더니 아래쪽으로 칼을 맹렬히 휘둘렀다.

예리한 칼날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손끝을 타고 뇌까지 전달된 순간, 남이 이모는 마침내 보이지 않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죽어! 죽어! 죽어!”

그녀는 울음 섞인 절규를 내지르며 손에 쥔 비수를 미친 듯 휘둘렀다.

* * *

지하실 바깥에선 장목화와 성건우가 각자 한쪽 벽에 기대어 선 채 안에서 흘러나오는 울음과 고함, 그리고 욕설을 듣고 있었다.

모든 게 잠잠해진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몇 분 후, 남이 이모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의 온몸엔 혈흔이 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장목화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엔 더 이상 유진이라고 볼 수가 없는 피범벅이 된 시체 한 구가 놓여 있었다.

성건우는 본능적으로 무슨 말인가 하려다 열었던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린 오늘 밤 이 밀실을 봉할 거야. 더는 누구도 이곳을 열지 못하게.”

남이 이모가 약간 거친 목소리로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밝혔다. 뒤이어 한숨을 푹 내쉬던 그녀가 자조하듯 웃었다.

“여긴 원래 유진에게 체포될 게 두려워 숨기 위해 만든 곳인데……. 그런 곳이 저놈 무덤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유진의 영혼 역시 여기 봉인돼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했으면 좋겠다.”

짝짝짝!

성건우는 손뼉을 치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이에 지하실에 있던 모든 이들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장목화는 얼른 분위기를 수습하고 나섰다.

“좋아요, 일들 보세요. 저희는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부르시고요.”

남이 이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예, 모두 방값은 무료예요. 안타깝게도 오늘 밤에는 시간이 없네요. 여유가 있었다면 여러분한테 다 서비스라도 해줬을 텐데.

도망쳐 나온 뒤부터 감히 어딜 돌아다닐 생각도 못 하고 이곳에 웅크려서 총포사로만 벌어먹었어요. 가끔은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가기도 하고.

걱정하지 마, 손님도 선별적으로 받았고 피임 시술도 한 데다 몸도 다들 건강한 편이거든요. 하하, 물론 남자도 있고.”

장목화는 순간 헛기침을 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시죠, 나중에.”

* * *

구조팀 세 사람은 얼른 2층 방으로 올라가 각자 방으로 향했다.

그때, 백새벽이 문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성건우와 장목화를 등지고 있었지만, 그녀에게선 조그만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고맙습니다.”

“뭐? 뭐라고?”

귀를 만지작거리며 물은 것은 장목화가 아닌 성건우였다.

이에 살짝 흠칫한 백새벽은 그대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장목화는 고개를 돌려 성건우를 노려보았다.

“팀장님이 하고 싶었을 이야기를 대신해 준 겁니다.”

성건우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확실히 새벽이가 하는 말을 못 듣긴 했는데, 뭔 말인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고. 너 때문에 분위기랑 감동이 모조리 깨져버렸잖아! 팀원끼리 동지애를 강화할 좋은 기회였는데!”

장목화는 그를 원망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힌 순간, 장목화가 다시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입가엔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쩌면 넌 방금 그 말 때문에 우리 작은 흰둥이랑 잘 기회를 날려버렸을지도 몰라. 아까 같은 상황에서 조금 더 따뜻한 말이나 영웅이 할 법한 멋진 말을 해줬다면, 새벽이는 감동한 나머지 나랑 방을 바꾸자고 했을걸?”

성건우는 진지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무리입니다.”

“얼씨구, 그건 알아?”

장목화가 성건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새벽이는 춤추는 걸 싫어하잖아요. 우리는 어울리지 않아요.”

성건우는 여전히 진지하게 답을 했다.

“⋯⋯.”

장목화는 성건우의 그 말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상대의 입버릇으로 답을 대신했다.

“사랑은 전 인류를 구하고자 하는 숭고한 목표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하룻밤 잠자리 상대를 사랑이라고 하기는 어렵죠.”

성건우가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한 말투로 받아쳤다.

“⋯⋯구분이 확실하네.”

이런 화제로 말할 때는 성건우를 절대 이길 수 없었다. 이를 깨달은 장목화는 얼른 화두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추리 광대 능력, 전보다 더 강해진 거지? 유진은 네 노예가 된 후 겁을 잔뜩 먹은 것 같던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교육받은 것처럼. 거기다 네 주문도 더 이상 ‘당신은 그렇고 나도 그렇다.’ 이런 형식에 국한되지도 않았어. 이제는 공통점을 찾지 않아도 되는 거야?”

“이전에도 그런 주문을 사용할 수야 있었지만 대신 목표와 긴밀하게 관련된, 또 이미 발생한 사실이어야 했어요. 각각의 사실은 각기 다른 추리 결과를 도출하거든요. 그 결과가 꼭 저를 가리키리라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알아서 선택하거나 창조해내야 했던 거고요.

저도 유진이 왜 그런 모습을 보인 건지는 모르겠네요. 경호원이나 기사에게 능력을 썼을 때도 이렇게까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는데요.”

성건우는 두 번째 질문에 먼저 답한 후, 첫 번째 질문에 답을 이었다.

이내 장목화가 천천히 1층 침대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네. 오늘 밤 넌 능력을 세 번 발휘했어. 하지만 앞선 두 번은 효과가 그렇게까지 강력하진 않았지. 혹시⋯⋯ 추리 광대의 효과가 목표 자체의 인지와도 관련된 건 아닐까?

아주 오랫동안 노예를 포획하고 조교한 유진은 제대로 된, 적합한 노예의 기준을 알고 있어. 그러다 너의 노예가 된 걸 인정한 순간부터는 그 기준에 맞춰 행동하게 된 거지. 네 앞에서 발발 떨고 전전긍긍하면서 감히 저항할 엄두도 못 낸 건 바로 그 때문인 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노예가 된 걸 인정했다 한들 그렇게까지 과한 모습을 보일 리는 없어. 왜냐하면 원래 제대로 된 노예가 어떤 모습인지 잘 모르잖아.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모방하진 못하니, 그냥 단순하게 낮은 자세로 복종만 하면 되는 줄 알 거 아냐.”

성건우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장목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건 추리 광대 능력에 자기 최면까지 더해졌을 때 더 강력한 효과가 일어난다는 뜻이기도 해. 죄짓고는 못 산다는 말이 이렇게도 들어맞네.”

그녀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평생 자신의 기준에 맞는 노예를 조교하던 유진이 결국에는 그 기준에 더없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노예가 됐다는 말씀이시죠? 흥미롭네요, 정말 흥미로워요. 인생에 운명적이지 않은 순간이란 없다. 이 순간⋯⋯.”

“그만!”

점점 라디오 방송 앵커처럼 변하는 성건우의 말투를 보고, 장목화가 얼른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불길한 말이라도 나올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성건우는 상당히 아쉽다는 듯 테이블 앞의 스툴에 앉았다.

2초 후, 그가 다시 불쑥 입을 열었다.

“유진은 노예를 교육하는 일을 담당했어요.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노예를 산 건 누구였을까요?”

장목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짐작이 가는 바는 있지만, 일단은 묻지 말고 우리 작은 흰둥이가 스스로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자. 그건 어쩌면 새벽이가 유전자 개조를 받으려 하는 이유와 관련돼 있을지도 몰라.”

침묵이 길어지던 그때, 장목화가 성건우를 돌아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뭘 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있지?”

“복기요. 하나하나 임무가 마무리될 때마다 복기해야 하잖아요.”

성건우는 상당히 능숙하게 답했다.

살짝 구겨져 있던 장목화의 미간이 풀어졌다.

“훌륭해. 처음부터 한 번 생각해봐. 남들에게 추적당할 수 있는 허점을 남기지는 않았어?”

성건우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맨 처음으로 추리 광대 능력을 발휘했던 대상인 그 경호원이요. 나이트클럽 옆문 근처는 빛이 닿을 때도 있고 안 닿을 때도 있었어요. 줄곧 야구모자를 쓰고 있기는 했지만, 녀석은 저보다 키가 작아서 제 얼굴을 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요.

나중에 돌이켜보면 자신이 어떤 능력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죠. 그럼 제 추리 광대 능력도 어느 정도는 드러나게 될 테고요.”

장목화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총격으로 혼란을 조성했을 때 내가 처음에 노린 목표가 바로 그 사람이었어. 이미 죽었을 거야.”

장목화는 성건우와 그 경호원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상대의 생김새와 특징을 똑똑히 기억해뒀었다.

“그래도 그 경호원들, 꽤 전문적이던데. 내내 자신들의 몸으로 유진을 보호했어. 그래서 난 그 사람을 제대로 겨냥할 수가 없었고. 안 그랬으면 그 자리에서 모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옅은 한숨을 내뱉은 장목화가 다시 고갯짓을 했다.

“계속해.”

성건우는 오늘 밤일들을 순서대로 회상하며 세세한 부분들을 짚어냈다.

“주차장으로 뛰어가는 동안 남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어쩌면 용의자로 지목될지도 몰라요.”

그러자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무지하게 빨리 뛰었던 데다 야구모자도 썼고, 가로등이 많은 곳도 아니었으니 우리 생김새를 정확히 목격한 사람은 없을 거야. 달릴 때 난 일부러 허리도 더 숙였거든. 목격자가 있더라도 내 키를 제대로 짐작하지 못하게.”

“저보다 더 빨리 달리려고 그랬던 거 아니었습니까?”

성건우가 물었다. 그는 당시 장목화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그녀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며 더욱 빠른 속도를 낸 바 있었다.

장목화가 순간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처럼 정신질환이 있는 줄 알아? 그때 우린 옷도 바꿔입은 상태였으니, 전체적인 이미지와 낮과는 전혀 달라 보였을 거야.”

워낙 어스름했던 데다 다른 이들 가까이에서 춤을 추지도 않았고, 나이트클럽에선 시종일관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두 사람의 얼굴이 노출된 적은 없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기껏해야 그런 두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 정도만 기억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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