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47화 (147/649)

147화. 고용

인근 골목길 입구에 이른 그때였다.

장목화는 암녹색 수류탄 하나를 꺼내 핀을 뽑고 뒤쪽으로 휙 던졌다. 수류탄은 문이 활짝 열려 있던 지프차 안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콰릉!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차 안에서 일어난 불길은 주위로 흘러나간 연료를 따라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그 시각, 지프차 흔적을 추적하던 유진의 경호원들은 그 우렁찬 소리에 서로를 바라보다가 각자 총을 들고 화염이 솟구쳐 오르는 곳으로 돌진했다.

그러다 보스를 태우고 떠난 줄 알았던 기사 공두팔이 주차장 내 자동차 뒤쪽에 숨어있던 것을 발견했다. 총격이 멈추고서야 그가 거기 있단 걸 알아본 것이었다.

당시 이상하리만치 잔뜩 긴장된 분위기에 경호원들은 무척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다 내부 스파이로 의심되는 공두팔을 잡으려 했으나 먼저 총을 쏴대며 배신자라고 욕을 하는 그에게 응사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공두팔은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죽은 공두팔의 얼굴에는 고통과 의혹이 가득 어려 있었다. 자신을 돕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과 경호원 모두가 배신자였다는 사실에 충격받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곳으로부터 한참을 달린 끝에 경호원들은 마침내 활활 타오르는 검은색 지프차를 발견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들은 다 같은 생각을 했다.

‘……망했다.’

* * *

윤복 총포사 2층.

용여홍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백새벽은 2층 침대에 누운 채 뜬 눈으로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곧장 잠들고 싶었지만, 눈을 감기만 하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이 떠올라 머릿속을 시끄럽게 하는 통에 그럴 수도 없었다.

유진의 흉악한 눈빛, 기름 냄새를 풍기며 묵직하게 짓눌러오던 몸, 굴복하지 않으면 곧장 날아드는 구타와 징벌,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가던 당시의 고통……. 끔찍한 기억에 백새벽은 저도 모르게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유진을 보자마자 악몽 같던 경험이 백새벽을 잠식하고 있었다. 두려움, 무력감……. 어떤 것으로도 표현하기 힘든 괴롭고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줄곧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던 용여홍이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야.”

장목화가 큰소리로 답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용여홍이 곧장 문을 열어주러 가는 동안 백새벽 역시 침대에서 내려왔다.

곧이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성건우가 용여홍을 곧장 지나쳐 백새벽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어느새 야구모자를 벗고, 옷도 원래대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백새벽은 어렴풋이 장목화의 곁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버킷햇을 쓴 그 사람은 파란색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백새벽의 물음에 성건우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친구를 데리고 왔어.”

백새벽이 흠칫 놀랐다. 그녀는 성건우가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 팀장은 일반인으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동료가 이럴 때마다 곧장 나서서 몇 마디 설명을 덧붙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장목화도 침묵하고 있었다.

이윽고 성건우가 몸을 살짝 틀어 백새벽에게 친구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유진이었다. 그 듬직한 체격의 남자가 약간 비실비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흉악했던 눈에는 무기력하고도 애처로운 빛이 가득했다. 지금의 그는 1년 넘게 ‘교육’을 받고도 아직 죽지 않은 노예 같았다.

유진을 본 순간, 백새벽의 몸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상대가 당장이라도 자신의 뺨을 후려치고, 짓밟고, 끔찍하고 치욕적인 갖가지 일을 시킬 것만 같았다.

저항은 용납되지 않았다. 행여나 저항이라도 하려 했다가는 곱절의 징벌이 쏟아졌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최초의 저항 몇 차례가 모두 실패로 돌아간 이후, 고통스러운 고문에 정신이 나간 백새벽은 잔뜩 겁을 먹고 오로지 굴종만 했었다.

반면, 백새벽을 본 유진은 자신의 정체성을 떠올린 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점차 흉악한 눈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성건우가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유진의 몸도 떨리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짊어진 것처럼 등도 저절로 굽어졌다. 두 눈에서도 흉악한 빛은 사라지고 오직 애처로운 빛만 나타났다. 만약 유진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이 순간 그 꼬리도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을 것 같았다.

용여홍은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광경이 환각이 아님을 확신했다.

‘젠장! 진짜 유진이야? 저 사람이 어떻게 팀장이랑 건우랑 함께 온 거지? 그것도 저렇게 볼썽사나운 꼴로! 옆에 붙어있던 경호원들은? 유진의 몸은 기계 개조가 돼있다고 하지 않았나?

조금 전 노스 스트리트 쪽에서 들려온 폭발음은 혹시 팀장과 건우가 유진을 노리고 그 사람 무리를 습격한 소리였나? 그 후에 건우가 유진한테 추리 광대 능력을 발휘했나?

팀장은 분명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면서 단서를 찾겠다고 나갔었는데? 그래놓고 이렇게 어마어마한 짓을 저질렀다고? 진짜 어딜 잠깐 놀러 나갔다가 사귄 친구를 데리고 돌아온 것만 같잖아. 어떻게 저렇게 여유로워?’

곁에 있던 백새벽도 점차 정신을 차리며 상황을 파악해 나가고 있는 듯했다. 그만한 경험과 식견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외출 전에 했던 팀장의 말이 그저 변명에 불과했음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녀도 성건우와 장목화가 처음부터 유진을 노리고 나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놀라운 건, 나간 지 불과 수십 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백새벽도 만약 유진이 남긴 트라우마가 없었다면, 거기에 충분한 정보가 파악된 상황이라면 자신이라도 유진을 저격해 죽일 순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여러 경호원의 삼엄한 보호를 뚫고, 자체적인 실력 역시 막강한 유진을 생포해 돌아왔다. 이는 그를 암살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든 일이었다. 아니, 아예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몸을 바들바들 떨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백새벽은 고개를 들어 유진을 마주 보려 애썼다. 그러나 상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 유진의 눈빛은 재차 흉악해졌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사냥감에 불과했던 백새벽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때, 성건우가 또 즉각 낮은 소리를 냈다.

“흠…….”

눈빛을 번득이던 유진도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렇게 긴 시간 대치가 이어지는 와중, 주먹이나 발길질이 날아들지도, 얼굴에 가래침이 날아오지도 않았다. 덕분에 백새벽도 천천히 안정을 찾아갔다.

‘영원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던 저 악마도 겉만 그럴듯해 보이는 놈이었어. 저 사람은 더 이상 날 해칠 수 없어.’

몸의 떨림은 점점 잦아들어 갔지만, 그녀의 표정은 조금씩 일그러졌다. 눈이 붉게 달아오르는 가운데 숨소리가 비정상적으로 거칠어졌다.

백새벽은 왼쪽으로 반 바퀴 정도 몸을 돌림과 동시에 오른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발을 채찍처럼 휘둘러, 유진의 두 다리 사이를 걷어찼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피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퍽!

두 다리를 힘껏 오므린 그가 사타구니를 부여잡은 채 그대로 쓰러졌다.

끔찍한 고통에 유진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목을 틀어 쥐인 수탉처럼 목구멍 사이로 꺽꺽 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헉!’

이 광경에 흠칫 놀란 용여홍이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웅크렸다.

장목화는 속으론 혀를 차면서도 백새벽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진을 걷어찬 백새벽은 양손을 무릎에 얹은 채 허리를 살짝 굽혔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꼭 온몸의 힘을 다 써버린 것만 같았다.

툭툭-.

바닥으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내내 그녀의 시야를 부옇게 흐리고 있던 서글픈 눈물이었다.

백새벽은 소매로 눈가를 쓱 훔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잔뜩 움츠러든 유진을 보며 긴 한숨을 뱉던 그녀는 약간 거칠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이 이모와 함께 이 자를 처리해도 될까요? 남이 이모라면 분명 비밀을 지켜줄 거예요.”

“물론이지.”

장목화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기억 속, 남이 이모 역시 목에 회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던 게 떠올랐다.

백새벽은 그 길로 곧장 밖으로 나가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 이 자를 잡기 위해 외출했던 겁니까?”

용여홍이 물었다. 극심한 고통에 기절해버린 유진을 보니 그도 더는 질문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성건우가 웃으며 답해주었다.

“위험 요소를 미리 제거한 거지.”

“너, 너무 급한 거 아냐?”

용여홍은 좀처럼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를 보고, 성건우가 잠시 생각한 후에 대꾸했다.

“무시무시한 괴담을 현실로 옮기지 않기에는 이 밤이 아깝잖아.”

소리 없이 성건우를 째려보던 장목화는 살짝 닫힌 문 앞에 서서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새벽이 붉은 솜옷을 입은 남이 이모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높게 틀어 올린 머리는 언제봐도 매력적이었다.

곧이어 남이 이모가 조심스레 방문을 닫자, 백새벽은 기절한 유진의 모습이 똑바로 드러나도록 그를 굴려 보였다.

순간 동그랗게 벌어진 남이 이모의 입술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뒤이어 그녀의 몸도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전의 백새벽보다 훨씬 강한 떨림이었다.

그렇게 고개 숙인 남이 이모의 입가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그건 웃음이라기보단 흐느낌에 가까웠다.

한참을 웃던 남이 이모는 곧 유진의 곁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더니 상대의 외투와 티셔츠를 들춰보았다.

등불 아래, 드러난 유진의 가슴과 복부에 금속광택이 번득였다. 그곳에는 소켓 여러 개가 달린 기계 부품이 하나하나 박혀 있었다. 소켓은 금방이라도 열릴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총구인가?”

장목화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남이 이모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유진이야! 정말 유진이야!”

웃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풀썩 주저앉은 남이 이모의 입술 사이로, 결국 아주 가느다란 울음이 쏟아졌다.

백새벽은 그녀를 막지 않고 스스로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남이 이모가 성건우, 장목화, 용여홍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마워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성건우가 아주 유창하게 답했다.

장목화는 그를 흘겨보고 싶었으나 사실 성건우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차츰 가까스로 안정을 찾은 남이 이모가 물었다.

“이 자를 처리하러 위드 시티에 온 거야?”

남이 이모는 아마도 백새벽이 복수를 위해 세 사람을 고용했나보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음⋯⋯.”

장목화가 망설였다. 상대의 추측을 긍정해야 할지, 부정해야 할지 모호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답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대안이 있었다.

장목화가 고개를 돌려 성건우를 바라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겸사겸사요.”

“⋯⋯.”

남이 이모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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