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46화 (146/649)

146화. 증거 인멸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길 끝에 이른 두 사람은 왼쪽으로 꺾어지면서 와일드울프 앨리 출구를 지나쳐 주차장으로 달려들었다. 지형을 잘 파악하고 있던 덕분에 모든 게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이때 유진 일행은 겨우 3분의 2지점에 이르러 있었다.

그리고 이들 역시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전방에서 달리는 것을 보았다. 바로 뒤에선 똑같이 야구 모자를 눌러쓴 여자가 그 남자를 뒤쫓듯 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유진은 나름의 추측을 하며 피식 웃었다.

‘한 판 해놓고 돈을 안 줬나?’

위드 시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유진은 그 안에 어떤 위험이 잠재돼 있을 거란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었으며 여러 번 암살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러니 사실 저렇게 우스운 상황이 자신에게 여파를 미치리란 생각을 하긴 쉽지 않았다.

곧이어 주차장 입구로 들어선 유진이 초소 안의 노인을 향해 물었다.

“방금 어떤 사람이 달려오지 않았나?”

유진은 그 두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굳이 해야 할 질문을 생략하지는 않았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랬지, 근데 어찌나 빠른지 막을 수가 없었어! 저쪽으로 달려갔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답한 노인이 한쪽을 가리켰다.

자신의 차 두 대가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라 유진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주차장 안으로 들어선 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큼직한 검은색 지프 근처로 향했다.

지프차 양옆 유리창은 짙게 선팅이 돼 있어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적들의 시선을 효율적으로 막아주었다.

이때 털모자를 쓴 기사는 보닛에 기대 조악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공두팔, 근처에 접근하는 녀석은 없었겠지?”

남자는 유진이 가장 신뢰한다던 바로 그 경호원이었다.

유진의 물음에, 기사 공두팔은 피던 담배를 버리고 발로 밟으며 웃었다.

“없었습니다. 누가 있었다면 제가 당연히 봤겠죠.”

고개를 끄덕이던 유진은 눈짓으로 옆쪽 경호원들에게 기본적인 확인을 지시했다. 그중 한 명은 차 뒷좌석 문을 열고 안까지 확인했다.

그러던 그때, 안을 확인하던 경호원의 마음속에서 돌연 한 줄기 불만이 피어올랐다.

‘왜 일은 나한테 시키고 자기들은 지켜보기만 해? 왜 난 목숨을 걸고 호의호식하는 보스를 지키면서도 부스러기나 주워 먹고 살아야 하는 건데. 왜 난 매번 이렇게 사력을 다해야 하지? 그냥 대충할 수 있는 건 대충 하자!’

이런 생각 속에 대충 검사를 마친 경호원이 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스, 문제없습니다.”

그제야 안심한 유진은 차 반대편으로 다가가 뒷좌석에 오르려 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탕!

어디선가 갑자기 총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멀리서 총을 쏜 모양이었다.

유진은 재빨리 쪼그려 앉으며 방탄 차량을 방어막으로 삼았다.

탕탕탕!

총성은 끊이지 않았다. 총알에 맞은 지면에서는 흙이 팍팍 튀었고, 유진의 경호원들은 곳곳에 몸을 숨긴 채 총을 들어 응사에 나섰다.

공두팔은 이를 보고 재빨리 외쳤다.

“보스, 얼른 차에 타세요! 일단 보스만이라도 주둔지로 모시겠습니다!”

적이 몇이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이에 유진은 곧장 보조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쾅-

소리도 요란하게 문이 닫히고, 지프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차는 속도를 줄일 생각 따위 없다는 듯 곧장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도 뒤쪽에서는 계속 총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 * *

유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옆쪽에서 운전 중인 기사는 털모자 대신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남자는…… 공두팔이 아니었다.

때맞춰 기사가 유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그리고 그 잘빠진 입꼬리가 조금씩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길가의 가로등이 아직 밝혀져 있긴 했지만, 짙게 선팅된 차창까지 스며들지는 못했다. 그로 인해 차 안은 굉장히 어둑했다.

어둠 속에 잠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사에게선 형언할 수 없는 음산함이 느껴졌다. 근거리 격투나 총싸움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무시무시한 상황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있었다.

뒤이어 그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면서 기계를 가동해 반격에 나서려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유진은 팔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의 팔인데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가 하려 했던 반격은 시작되기도 전에 상상을 초월하는 난관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다음 순간, 유진의 눈앞으로 시커먼 총구 하나가 들이 밀어지는가 싶더니 이마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침착해.”

운전 중인 기사는 아무런 감정도 어리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구모자를 쓴 남자는 당연하게도 성건우였다.

유진의 기사 공두팔과 친구가 되어 상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성건우는 운전석 아래 공간에 웅크려 숨어있다가, 유진이 보조석에 올라타자마자 곧장 몸을 일으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공두팔은 총소리에 성건우가 했던 말을 완전히 믿게 됐다. 사실 그 총소리는 장목화의 작품이었다. 그녀의 원거리 사격 솜씨가 빚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공두팔은 이것이 계획된 암살이고 경호원 중에 스파이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섰고, 가장 믿음직스러운 비밀 경호원에게 보스를 맡겼다. 이후 그는 내부 스파이의 경계를 늦추기 위해 분부에 맞춰 차 문을 여닫으며 마치 자신이 차에 오른 것처럼 연기하기도 했다.

실제 그는 땅을 한 바퀴 구른 후 근처에 있던 차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둡고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상황을 또렷하고 확실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멋지게 이용한 계책이었다.

“뒤돌아. 내 쪽으로 등 보이게.”

성건우는 아이스모스 권총을 유진의 이마에 가져다 대고, 한 손으로는 핸들을 돌리며 침착하게 지시했다.

눈을 가늘게 뜬 유진은 차창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사이 그는 계속해서 상대의 손에 들린 권총을 주시했지만, 놀랍게도 총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도 언제든 당겨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한 마디로 유진은 어떠한 기회도 잡을 수 없었다.

* * *

성건우는 주차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난 후에야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와중에도 자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거의 동시에 주차장 울타리 너머로 한 인영이 바람같이 넘어왔다. 그리곤 단 두세 걸음 만에 지프차에 이르러선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인영의 주인은 장목화였다. 그녀는 어느새 검은색 장갑까지 낀 상태였다.

장목화가 곧 유진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직 안 죽였네?”

장목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진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려 하는 그 틈을 타 몸을 아래쪽으로 당겼다. 총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유진의 몸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이에 장목화가 앞으로 몸을 기울여 왼손으로 유진의 등을 눌렀다.

그 순간, 유진의 몸에서 발산된 수많은 은백색 전광이 차 안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유진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기계음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버렸다. 인조 심장도 고장 난 듯 스트레스 보호 시스템이 알아서 가동됐다. 눈도 점차 뒤집히고 피부에서는 푸른 연기와 탄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를 보고 성건우는 총을 거두고 액셀을 밟아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전광이 사그라들자 유진은 풀썩 쓰러져버렸다. 그 아래쪽으로는 오줌을 싼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인간 몸은 기계 개조를 해도 전기 충격에는 취약하군⋯⋯.”

장목화가 왼손을 살짝 털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인체 신경과의 연결을 위해서는 전류 통로가 필수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그녀가 다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자가 차에 오른 순간 곧장 총으로 죽인 후에 차로 포위망을 뚫고 나갔어야지! 반격의 수단이라도 있었으면 어쩌려고 살려둔 거야? 이 사람은 기계 개조까지 받은 사람이라고!”

성건우는 차를 몰며 장목화의 잔소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꾸했다.

“생포하려고요.”

“다음부터는 이렇게 어려운 목표는 노리지 말도록 해.”

장목화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당부했다.

잠시 후 그녀가 옷에 달린 큼지막한 주머니 안에서 손바닥보다 살짝 큰 스피커를 꺼내더니 콘솔박스 위에 올려놓았다.

“솔직히 이 스피커, 녹음이랑 반복 재생 기능은 꽤 쓸 만하더라. 덕분에 총알도 대폭 아꼈어. 하지만 이게 뭐 그렇게 절대적인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지는 마. 실제로도 총을 쏘지 않았더라면 그 녀석들은 절대 속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 이 계획에는 반드시 내가 참여해야만 했어.”

그녀는 목소리에 더 힘을 실으며 자신의 말을 강조했다.

장목화도 비밀 작전을 수행하러 나온 성건우가 스피커를 지참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이 스피커는 휴대가 가능한 제품이라 다행이었다. 만약 무근자 고향단의 앰프처럼 차에 싣고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면, 성건우가 대체 어떻게 작전을 수행하려고 그러는 건지 골치깨나 아팠을 것이다.

* * *

중앙 광장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안으로 꺾어 들어간 지프는 감시 카메라도, 인적도 없는 구석에 멈춰 섰다.

“그 사람 깨우세요.”

성건우가 안전벨트를 풀며 장목화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안전벨트까지 매셨어?”

‘세상에 목적 달성하고 빠져나온 살인자와 납치범 중에서 안전벨트까지 곱게 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근데 그게 뭐 잘못된 건 아니지⋯⋯.’

속으로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왼손을 뻗더니 전기 충격으로 유진을 깨웠다.

눈을 번쩍 뜬 유진의 시야에 가장 먼저 짙은 눈동자 한 쌍이 들어왔다.

성건우가 깨어난 그를 향해 이야기했다.

“넌 나한테 납치됐다. 네 몸은 내가 통제하고 있지.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도 못한 유진은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인님.”

고개를 끄덕이며 야구모자를 더 푹 눌러쓴 성건우가 장목화에게 말했다.

“트렁크에 있는 옷 좀 가져다주세요. 바꿔 입을 수 있게요.”

트렁크에 옷이 있다는 건 공두팔와 대화하며 파악한 사실이었다. 이따금 납치를 자행하는 유진은 늘 차 트렁크에 위장용 옷을 챙겨두는 편이었다.

장목화는 유진의 몸과 트렁크에 있던 옷에 위치 추적 장치가 없다는 사실부터 확인한 뒤에야 보조석 쪽으로 옷을 던져주었다.

유진은 알아서 검은 긴 바지와 파란 외투를 입고, 갈색 버킷햇과 평범한 선글라스까지 썼다. 그런 그에게선 더 이상 전과 같은 특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장목화는 어이없다는 듯 성건우의 어깨를 살짝 치며 웃었다.

“선글라스는 왜 씌워? 저녁이잖아. 이런 시간에는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게 훨씬 더 의심스러워 보인다고.”

성건우가 난감하다는 듯 답했다.

“눈이 너무 못생겨서요.”

“그럼 고개나 푹 숙이고 다니게 해.”

장목화가 빠른 말투로 받아쳤다.

유진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장목화는 이미 차의 보닛을 열고 각종 도구로 그 안에 들어있는 연료를 흘러나오게 해뒀다.

그리고 이제 성건우가 유진의 선글라스를 벗기고 스피커까지 챙기자, 장목화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방향을 가늠했다.

“가자!”

그늘진 구석을 따라 감시 카메라가 없는 다른 골목길로 향하는 세 사람은 그저 보기엔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며 친해진 친구들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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