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유진
[오늘]
번쩍이는 불빛 아래 백새벽, 용여홍은 ‘오늘’이란 나이트클럽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미친 듯 몸을 흔들어대는 댄스 플로어를 우회해, 곧장 바 테이블로 직행했다. 그런 뒤, 백새벽은 손가락을 구부려 바 테이블을 연달아 일곱 번 두드린 후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주문했다.
“골든오레이 두 잔.”
골든오레이는 증류한 포도주였다.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 술이 퍼스트 시티에서 굉장히 유행하며 마치 오레이 지폐처럼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내 잔을 닦고 있던 바텐더가 고개를 들어 백새벽을 두어 번 살폈다.
“그보다 더 좋은 술을 추천해줄 수 있는데.”
“뭔데?”
백새벽의 호응에, 바텐더가 웃으며 답했다.
“이삭. 이 뒤쪽에서 직접 시음해볼 수도 있어.”
그가 주방으로 통하는 듯한 나무 문을 가리켰다.
“좋아.”
백새벽은 곧장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텐더는 때맞춰 바 테이블을 두드렸다. 총 여덟 번, 그 사이의 길고 짧은 간격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백새벽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지만, 변경된 암호임을 알았다. 다음에는 이 신호를 사용해야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잡다한 물건이 가득 쌓인 방과 좁은 복도가 나왔다. 그 복도 너머엔 기관단총을 든 검은 옷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바텐더가 알려준 암호를 제출하자 두 남자가 길을 비켜주었다.
백새벽과 용여홍은 그들을 지나쳐 지하로 이어진 계단으로 향했다.
* * *
계단을 내려가니, 드넓은 홀이 있었다.
곳곳에 테이블과 의자 등이 놓여 있고, 형광등 불빛 아래 사람들 수십 명 정도가 각기 다른 자리에 앉아 곁의 친구들과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이곳은 지하 시장이라기보다는 사적인 모임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것 같았다. 용여홍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백새벽은 자연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술집 구역에서 임보경을 봤는지 물어볼 사람을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때, 그녀의 눈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 암적색 긴 소파에서 일어나는 한 남자가 있었다.
키는 170센티미터 정도로 평범한 편이었지만, 팔은 상당히 굵고 단단해 언뜻 봐도 꽤 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싸늘한 겨울날인데도 춥지도 않은지 검은 반소매 티셔츠에 색이 선명하고 통이 넓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박박 민 머리에는 퍼스트 시티를 의미하는 흑청색 늑대 모양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어린아이를 기겁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흉악한 인상의 남자였다. 겉모습만 보고는 구체적인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의 뒤쪽엔 경호원으로 보이는 검은 옷차림의 남자 둘이 서 있었다. 허리춤이 불룩한 것으로 보아 무장을 한 듯했다.
이윽고 남자가 한 걸음, 한 걸음 백새벽을 향해 다가왔다.
“정말로 도망쳤더군? 그런데 감히 이곳으로 돌아와?”
남자는 비웃고 있었지만, 정작 눈빛엔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백새벽은 몸을 살짝 떨기 시작했다. 언제나 침착하기만 했던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를 보고, 용여홍도 침을 꿀꺽 삼키며 마음을 제대로 다잡았다. 두렵기는 해도, 그렇다고 이렇게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팀장님이 그랬어, 우리는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용여홍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몇 발자국 나아가 백새벽의 앞을 막고 보호했다. 그의 몸 역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떨고 있었지만, 대머리 남자를 마주한 눈빛은 단단했다.
막상 앞에 서니, 용여홍도 살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오, 나도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네.’
대머리 남자의 기세는 강했다. 백새벽은 그가 한발, 한발 다가올수록 꼭 거대한 바위에 가슴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잊으려고 애썼던 그 악몽들도 덩달아 떠올랐다. 천적을 마주한 듯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바로 그때, 백새벽의 눈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검은색 솜옷 차림에 몸을 약간 움츠리고 있는 용여홍이었다.
그의 등장에 백새벽이 느끼던 두려움의 원천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백새벽 대신 대머리 남자를 마주한 용여홍의 심장은 터질 듯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끊임없이 자기 최면을 걸며 버텼다.
‘이 사람은 그냥 건우야. 난 지금 건우랑 눈싸움을 하는 거야.’
대머리 남자는 기가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용여홍을 위아래로 몇 번 훑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미녀를 구하려는 영웅이라도 되시나?”
말을 하면서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두 경호원도 암적색 소파를 빙 둘러 빠르게 그의 뒤쪽으로 따라붙고 있었다.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용여홍도, 백새벽도 자꾸만 심장이 짓눌리고 있었다.
간담이 서늘해진 용여홍은 이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 앞에 아예 총을 뽑아 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눈앞의 세 녀석만 처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텐데.’
그 순간, 홀 안쪽 구역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 이곳에서는 소란 피우지 마라.”
대머리 남자의 이름이 바로 유진인 것 같았다.
이내 유진이 천천히 몸을 틀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를 저지한 것은 50대 남자였다. 남자는 겨울날 추위를 견딜 수 없다는 듯 두껍고 푹신푹신해 보이는 검은색 다운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얼굴은 다소 수척했고, 귀밑머리는 약간 하얗게 새어있었으며 왼손 손목에는 금색 시계를, 오른손 손목에는 반짝이는 염주를 찬 상태였다.
유진이 웃으며 대꾸했다.
“소란이라니? 난 그저 내가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으려는 것뿐이야.”
반백의 남자는 묵직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반복했다.
“뭐가 됐든 내가 있는 여기선 소란 피우지 마. 싸울 장소는 밖에도 많아.”
남자를 빤히 응시하던 유진의 눈빛이 점차 더 살벌해졌다.
하지만 남자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도 않고 태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하하, 그래, 손 영감 체면 한 번 세워주지.”
끝내 한발 물러난 유진은 용여홍과 그 뒤에 자리한 백새벽을 돌아봤다.
“밖에서 마주치는 일은 없어야 할 거다.”
용여홍은 험한 말로 응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이런 경험이 전무 하니 암적색 소파 쪽으로 돌아가는 유진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백새벽이 용여홍의 등을 톡톡 건드리며 속삭였다.
“난 괜찮아.”
속으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용여홍이 몸을 살짝 틀어 길을 내주자, 백새벽은 일인용 소파에 앉은 그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손 영감님.”
손 영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백새벽을 보다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여길 오갔던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네가 누군지 기억나진 않네.”
지하 시장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손 영감이라고 부르니 그럴 법도 했다.
백새벽은 손 영감 뒤쪽의 경호원을 한번 보다가, 임보경과 배윤수를 비롯한 이들의 사진을 꺼내 들며 허리를 굽혔다.
“괜찮아요. 사냥꾼 임무 때문에 혹시 이 사람들 가운데 와일드울프 앨리 술집에 들어왔던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받아든 사진을 하나씩 넘겨보던 손 영감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잘 아는 유적 사냥꾼 몇몇도 찾아와서 묻더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 며칠 내가 운영하는 술집과 찻집, 나이트클럽에 이런 사람들이 방문한 적은 없었어. 이 답에 대한 대가는 요구하지 않겠다. 아무 가치도 없는 정보니까.”
“고맙습니다.”
백새벽이 공손하게 답했다.
그런데 손 영감이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질문을 이어왔다.
“물건엔 관심 없고? 최근 새로운 물건들이 들어왔거든. 퍼스트 시티에서 막 생산된, 활주와 방탄 능력이 강화된 지프차도 있고, 바주카포를 포함한 중무기들도 있고, 스피릿 아일랜드산 대마, 그보다 더 자극적인 것도 있지.”
백새벽은 위드 시티 지하 시장에 몇 차례 방문했던 황야유랑자 출신인 만큼, 스피릿 아일랜드라는 곳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아는 건 많지 않았다. 그저 파라다이스 아일랜드라고도 불리는 그곳이 골드코스트 밖에 자리해 있으며,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공장 따위 없는 그 섬은 대마와 양귀비 등의 식물을 키우기 적합한 곳이었다. 애쉬랜드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러한 물건으로 참담한 생활에서 기인하는 스트레스를 해소했으며, 심지어 그것을 쟁탈하기 위한 전투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식량은 없나요?”
백새벽은 여유롭게 목표를 바꿨다. 팀의 식량을 보충하는 것 역시 그녀가 맡은 역할 중 하나였다.
“밀가루는 있지만 이미 예약돼있어.”
손 영감이 고개를 저었다.
재차 감사 인사를 한 백새벽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가서 이전의 그 질문을 반복했다. 그렇게 지하 시장을 한 바퀴나 돌았지만, 임보경이나 배윤수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백새벽은 결국 용여홍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용여홍은 끝까지 유진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향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이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끈질긴 눈빛이었다.
* * *
나이트클럽 오늘에서 나온 백새벽은 사우스 스트리트로 돌아가며 내내 침묵했다. 용여홍은 몇 번이고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묵직한 침묵 속, 반 바퀴 정도 우회하면서 미행이 없음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은 윤복 총포사 2층으로 향했다.
이내 백새벽과 용여홍이 골목길 쪽 방에 들어가자, 미리 도착해 있던 장목화가 문을 닫으며 물었다.
“어땠어?”
“봤다는 사람이 없네요. 그 사람들 표정도 관찰했는데 별다른 이상 반응을 보인 적도 없었고요.”
백새벽이 솔직하게 답했다. 만약 누군가 임보경을 숨겨줬다면 그녀를 보고서도 봤다고 곧이곧대로 답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 때문에 백새벽은 그들의 대답보다는 표정 등의 반응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 다른 유적 사냥꾼들이 성과를 내기를 기다리자고.”
장목화가 말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 용여홍은 계속 백새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팀장에게 유진과의 만남을 알려야 하는 건지 갈등 중이었다.
그가 머뭇거리고 있던 그때, 백새벽이 목에 두른 회색 스카프를 살짝 잡아당기며 찰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지하 시장에서 원수를 만났어요. 그러니 팀장님도, 다른 사람들도 조심해야 할 거예요.”
“원수?”
장목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성건우도 바로 관심을 보였다.
재차 침묵하던 백새벽은 몇 초 후에야 불분명한 의미의 웃음을 흘렸다.
“그냥 일방적인 원수요. 저한텐 원순데, 그 사람에겐 전 그냥 사냥감이죠.”
장목화는 순간 뭔가를 떠올린 듯했다.
“이름이 뭐지? 어느 세력 출신인데?”
백새벽은 느릿하게 숨을 토해냈다.
“유진이요, 퍼스트 시티의 한 노예 포획대 대장이에요. 전에 그 사람에게 잡힌 적이 있어요. 전 한동안 노예 생활을 했었고요⋯⋯.”
백새벽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느 정도의 추측을 하고 있었음에도 장목화를 비롯한 팀원들은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백새벽은 목에 두른 회색 스카프를 풀기 시작했다. 둘둘 풀려나간 스카프 안쪽으로 곧 그녀의 맨 목이 드러났다. 햇볕을 덜 쬐어 그런지 다른 곳보다 훨씬 흰 편인 목 양옆 아래쪽에는 흑청색 문신이 남아있었다.
『여자 노예. 105.』
안쓰럽단 표정을 짓던 장목화는 얼른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랬구나. 회사에는 그걸 가릴 방법이 있을 거야.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면 내가 직접 배워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