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쪽지
뜰에서 나온 장목화와 성건우는 인적이 없는 옐로혼 앨리 구석에서 백새벽, 용여홍과 합류했다.
팀장의 설명을 듣고, 용여홍은 화들짝 놀랐다.
“곳곳에 전단지를 뿌리고 다니는 그 조직과 관련이 있다고요?”
그는 여태까지 그 조직을 우습게만 여기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 근데 어쨌든 진병욱에게 연락하긴 해야 할 것 같아. 회사에 그런 조직과 관련한 자료를 요구해달라고 해야겠어. 앞으로 우리는 그 미치광이들과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미리 준비해둬야지.
음, 너희는 일단 이 부근을 돌아다녀 봐. 사람들한테 검은 여행 가방을 든 여자를 봤느냐 그런 건 묻지 말고, 다른 유적 사냥꾼들이 어떤 단서를 찾아냈는지만 알아봐. 나랑 건우는 진병욱에게 소식을 전달하러 갈게.”
“예, 팀장님.”
백새벽과 용여홍이 곧장 답했다. 환경적인 제약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장목화가 몇 마디 더 당부하려는데, 용여홍이 불쑥 물었다.
“임보경이 그 뜰을 떠났을 때 위장을 했다고 했죠? 그런데 왜 유호중을 기다릴 때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했을까요?”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을 하자마자 용여홍은 자신을 훑는 성건우의 시선을 느꼈다. 약간 뜨끔한 용여홍은 뭔가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건지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잠시 2초간 멍한 표정을 드러내던 장목화가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네, 그 점에 주목하다니. 다음에는 조금 더 깊이 고민해봐. 너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렸을지 생각해 보는 거야.”
칭찬 후, 다시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만약 네가 평범한 유적 사냥꾼이라면, 레드실크 거리 주위 가게 사장들에게 유호중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을 때 또 어떤 질문을 했을까?”
용여홍은 몇 초간 고민하다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혹시 의심스러운 사람을 본 적은 없는지 물었겠죠?”
장목화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럼 눈에 띄게 예쁜 얼굴로 길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여자가 의심스러울까, 아니면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최대한 가린 사람이 의심스러울까?”
용여홍은 그제야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위장을 많이 하는 게 남들 눈에 더 띄겠네요.”
“그래, 게다가 당분간은 우리를 제외한다면 누가 임보경이라는 여자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다니겠어?”
웃으며 말하던 장목화가 돌연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지겠지.”
“왜요?”
용여홍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장목화는 그 질문에 곧장 답하는 대신 미소만 보였다.
“진병욱에게 연락한 뒤, 바로 사냥꾼 길드로 가서 임보경이 저격수의 동료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할 거니까.”
순간 용여홍이 화들짝 놀랐다.
“그럼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되잖아요? 우린 이점을 다 잃고요.”
현재 구조팀은 이 정보를 파악하고 있는 덕분에 다른 모든 유적 사냥꾼을 앞선 상태였다. 짧은 시간 안에 총격 사건이 지식은 독약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조직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용여홍이 덧붙였다.
“사냥꾼 길드에 보고하면 그 사람들도 경계심이 높아져서 불필요한 말썽을 일으키지는 않을까요?”
‘충분히 비밀로 할 수 있는 조사를 굳이 모두에게 알릴 필요가 있을까?’
장목화는 성건우와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둘 중 한 명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다른 한 명은 뭔가 생각에 잠긴 양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장목화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우리가 보고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을 일이 아니야.”
용여홍은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다시 장목화의 말이 이어졌다.
“배윤수 구조팀이 사냥꾼 길드에 찾아가 어떤 고위층을 방문하는 동안 그 안의 직원들과 접촉하지 않았을 리는 없어. 그들의 생김새나 기질을 감안할 때, 어디에 있든 관심 집중의 대상이었을 거야. 혹시 시선을 사로잡는 정도는 못 되었더라도 어느 정도 인상은 남겼겠지.
또 진병욱은 이 도시 안에서 배윤수를 비롯한 그들의 흔적을 추적해줄 사람들을 찾고 있어. 그들도 임보경이 배윤수의 동료라는 사실을 알아. 심지어는 임보경과 배윤수로 의심되는 대상을 맞닥뜨린 적도 있고.
거기다 배윤수를 목격한 사람이 그의 몽타주까지 만들어 냈으니, 조금만 지나도 분명 배윤수에게 동료가 있었단 사실을 떠올릴 사람이 생길 거야.”
이 대목에서 백새벽이 끼어들었다.
“사냥꾼 길드에서는 저격수 몽타주를 스캔으로 떠서 등록된 사냥꾼 중 그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찾아내려 할 거예요. 흔하게 쓰는 방법이죠.”
배윤수와 그의 팀원들은 사냥꾼 길드에 흔적을 남겨둔 바 있었다.
점차 상황을 파악하는 용여홍의 모습에 장목화가 미소를 지었다.
“이 일은 언제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돼 있어. 어쩌면 오늘을 넘기지 않을지도 몰라. 그럼 차라리 우리가 먼저 보고해서 돈이라도 버는 게 낫잖아?”
용여홍은 몇 초 후에야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좀 켕겨요. 꼭 동료를 팔아먹는 느낌이랄까⋯⋯.”
장목화는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팔아먹는 게 아니라 합리적으로 이용하는 거야. 애쉬랜드에 도덕적 결벽증이란 있을 수 없어. 어떤 상황에서는 최대 한계를 융통성 있게 바꿀 수도 있어야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꼭 지켜야 하지만 말이야.
사실 반드시 드러나게 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관련된 정보를 모두 공개하는 게 나아. 그래야 수많은 유적 사냥꾼과 함께 배윤수와 임보경을 비롯한 이들을 최대한 빨리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잠재된 위험을 방지하려면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지. 저격수의 목격자가 있으니 그들 역시 이런 방면에 대한 심리적인 준비를 해뒀을 거야. 지나치게 놀라거나 할 리는 없어.”
“하긴⋯⋯.”
결국 용여홍도 설득당했다.
이때 성건우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유적 사냥꾼들을 이용하는 건 공짜라는 거지. 그들 도움에 비용을 치를 필요는 없어.”
비용을 치러야 하는 건 위드 시티의 도시 방위군이었다.
성건우가 주목한 지점은 중점에서 약간 벗어났지만 장목화도, 용여홍도, 백새벽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공짜 인력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장목화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
“게다가 우리에게 남은 물자도 많지 않아. 위드 시티에 얼마나 더 머물러 있어야 할지 누가 알겠어? 이 틈을 타 생활비를 좀 버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찢어져서 움직이자고.”
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 * *
사우스 스트리트로 돌아간 용여홍과 백새벽은 레드실크 앨리 근처를 오가며 유적 사냥꾼들의 동향을 살폈다.
방금 막 임무를 받은 이들은 재차 사건 현장을 관찰하는 중이었고, 이미 목격자와의 대화를 마친 이들은 초상화 두 장을 들고 주민들을 탐문하고 있었다. 새로운 목격자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는 듯했다.
그런가 하면 옥상에서 흔적을 발견한 소수의 사냥꾼은 레드실크 앨리에 있는 집과 가게를 돌아다니며 의심스러운 사람을 본 적이 없느냐고 묻고 다녔다.
주위를 둘러보던 용여홍은 골목 입구의 헌 옷 상점 안을 힐긋 들여다보았다. 계산대 앞에 앉은 사장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짙은 검은색 트위드 코트 차림의 남자가 가게 안에 걸린 헌 옷들을 고르고 있었다.
30대로 보이는 그 남자는 머리 색이 검었고 눈동자는 파랬다. 혼혈인 듯 상당히 높은 콧대가 두드러져 보였다.
그 광경을 보고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영업 중에 졸고 있다니⋯⋯. 일찍 일어나셨나?’
그때, 옷을 고른 남자가 계산대 앞으로 다가가 사장을 흔들어 깨웠다.
용여홍은 두 사람을 보다 다시 시선을 거두고 다른 곳을 마저 살폈다.
* * *
중앙 광장 변두리, 나무 벤치.
펜을 쥔 장목화는 허벅지 책상 삼아 쪽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유호중을 죽인 저격수가 배윤수인 것 같아요. 레드실크 앨리 안에서 임보경으로 의심되는 이를 찾고 그 사람의 거주지도 특정했으나, 임보경은 이미 이주한 상태였습니다.
아무래도 임보경은 지식은 독이라고 주장하는 그 조직에 가입한 듯합니다. 회사에 이 조직과 관련한 자료를 요청해주세요.
저희는 이 단서를 사냥꾼 길드에 보고하고, 이전에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마침 그들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고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가능하다면 당신이 연루될 리 없으면서도 믿을만한 고용주를 한 명 찾아주세요. 그럴 수 없다면 직업 윤리상 고용주를 밝힐 수는 없다고 둘러대겠습니다.」
간단히 할 말을 적은 장목화가 쪽지를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건우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오가는 행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 돌아올게.”
“도서관에 가시는 건가요?”
불쑥 묻는 성건우를 보고, 장목화가 표정을 살짝 굳혔다.
“야, 그렇게 대놓고 얘기해야겠어? 좀 프로답게 굴 수 있도록 해주라.”
장목화 역시 전에도 도서관에 방문한 적이 있는 데다가 도서관 화재 사건에 관심을 두기도 했으니, 성건우가 끝까지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까발리면…… 당연히 난감하지 않은가.
그러자 성건우가 입을 꾹 다물고 손짓으로 입에 지퍼를 채워 보였다.
피식 웃던 장목화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적당한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 * *
위드 시티 공공 도서관으로 들어온 장목화는 능숙하게 구석 서가를 찾았다. 그러곤 ‘국내 소득 법전’을 뽑아 들었다.
첫 장에 누군가 접어둔 표시가 있었다. 이에 장목화는 책을 세로로 든 채 몇 번 흔들어보았다.
툭-.
역시 책장 사이에 끼워져 있던 쪽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장목화는 허리를 굽혀 쪽지를 주워 펼쳤다. 진병욱이 남긴 쪽지였다.
「유호중 총살 사건의 범인은 배윤수로 의심됩니다.」
‘소식이 꽤 빠르네.’
장목화는 곧 자신의 쪽지를 책에 끼워 넣고, 접혀 있던 첫 장을 펼친 뒤 650쪽을 접어서 원래 자리에 꽂아 두었다.
이윽고 장목화는 도서관을 떠났다.
도서관을 나간 장목화는 다시 성건우에게로 돌아갔다.
“가자, 길드로.”
잠시 공백을 둔 장목화가 덧붙였다.
“이제 말해도 돼.”
성건우도 비로소 웃음을 지으며 입에 걸린 지퍼를 푸는 척했다.
* * *
곧이어 웨스트 스트리트에 이르러 길드에 들어간 장목화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곧장 맨 끝 창구로 향했다.
지금 홀 안에 유적 사냥꾼이 많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알아서 임무를 받을 수 있는 기계 앞에 모여 있어서 둥근 단 주위 구역은 상당히 여유로웠다. 덕분에 장목화는 줄을 설 필요도 없이 소민영의 창구로 직행했다.
“또 왔어요.”
장목화의 웃음에, 소민영도 미소로 화답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세요?”
“유호중 관련 임무 때문에요. 새로운 단서를 찾았거든요.”
장목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순간 소민영이 흠칫 놀랐다.
“이렇게 빨리요?”
그도 그럴 것이 임무가 발표된 지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장목화가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운이 좋았죠. 사람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아둔 상태였거든요. 그때만 해도 전 아직 길드 사냥꾼이 아니었고요. 그런데 찾아야 할 사람 중 한 명이 자꾸 그 저격수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내 장목화가 창구 구멍으로 배윤수의 사진을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