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39화 (139/649)

139화. 허탕

뜰 입구에 이른 성건우가 초소에 앉아 있는 문지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뭘 묻고 싶다면 돈부터 내. 너희 유적 사냥꾼들 다 똑똑한 사람들이잖아.”

그는 눈을 부릅뜨며 성건우의 말을 냅다 끊어버렸다.

졸지에 추리 광대 능력을 위해 준비해둔 말들을 삼켜야 했지만, 성건우는 짜증보단 오히려 더 신난다는 듯 물었다.

“뭘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성건우의 특이한 반응에, 문지기는 살짝 놀란 듯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네가 얼마를 내느냐에 따라 달렸지.”

성건우는 흥정을 하려는 듯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어르신, 보세요. 어르신은 남자고, 저도 남자입니다. 어르신은 이 기회를 노려 돈을 벌려고 하시고, 저도 돈을 노리고 있죠. 그러니까⋯⋯.”

멍한 얼굴의 문지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가난한 사람끼리 서로 도와야지. 그래, 뭘 묻고 싶은 거요?”

“혹시 이 사람 본 적 있으세요?”

성건우가 임보경의 사진을 건넸다.

“봤지. 이 뜰 안에 사는 사람이야. 보이지? 저 건물.”

문지기가 옐로혼 앨리에 붙은 건물을 가리켰다.

“몇 층, 몇 호요?”

성건우가 조금 더 심층적으로 물었다.

“저 건물에 사는 정 영감이 그러는데 2층 맨 안쪽, 대문 옆 방에 산대. 그게 뭐 진짜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지기가 답했다.

“감사합니다.”

성건우는 에너지 바 하나를 건넸다. 대가를 줬으니 문지기는 나중에 정신을 차리더라도 자신이 귀신에 홀린 게 아니라 식량을 대가로 수매를 당했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문지기는 과연 에너지 바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아휴, 이럴 필요 없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벌써 에너지 바를 챙기고 있었다.

* * *

거래가 성사된 만큼, 문지기는 성건우와 장목화가 뜰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문지기가 가르쳐 준 건물 2층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목화는 즉각 임보경이 살고 있다는 방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잠시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 장목화의 무전기에서 백새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장목화도 복도를 따라 대문과 가까운 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몇 걸음 떼자마자 그녀가 미간을 팩 구겼다.

“양쪽 방 다 아무도 없어.”

복도 맨 안쪽에 자리한 방은 두 개로, 하나는 뜰과 가까웠으며 다른 하나는 그 방 창 너머로 옐로혼 앨리가 보였다.

장목화는 배윤수와 임보경이 도주에 편리한 바깥쪽 방에 묵었으리라고 추측했다. 백새벽과 용여홍을 옐로혼 앨리에 보내놓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네요.”

성건우도 장목화의 말을 반복했다.

속도를 높여 목표로 했던 방 앞에 이른 장목화는 허리띠에 달린 도구 하나를 꺼내 오래된 자물쇠를 가볍게 땄다.

방 구조는 구조팀이 묵고 있는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벙커 침대와 탁자, 스툴이 놓여 있는 것도 똑같았다.

그리고 방은 매우 깔끔했다. 손님의 물건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여길 버린 건가?”

장목화는 부지런하게 방 안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성건우는 아예 바닥에 엎드려 침대 아래까지 확인했다. 그러다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종이가 있어요.”

“어떤 종이?”

다른 곳을 살피던 장목화도 그대로 멈췄다.

성건우는 손을 뻗어 침대 아래에 있던 종이를 끄집어낸 뒤 몸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그와 장목화는 동시에 그 종이를 확인했다.

「사고는 함정이고 지식은 독약이다. 더는 어떠한 책도 건드리지 마라. 구세계의 전절을 밟아서는 안 된다.」

장목화는 자타공인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이 전단지를 보고서는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도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목화도 자연스레 이 방문을 연 순간 일어날 상황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익숙하고도 낯선 전단지를 발견하리란 건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배윤수 팀의 실종이 이 미치광이들이랑 연관돼있는 건가?”

장목화는 의혹 가득한 눈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불과 1분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였던 것들이었다.

“이들이 사고를 포기한 걸까요?”

성건우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마치 중간 과정이 생략된 수식 같았다.

몇 초간 고민하던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금으로 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 일단은 추측일 뿐이야. 우리는 아직 이 전단지가 배윤수 팀이 실수로 흘린 건지, 아니면 조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일부러 놓고 간 건지 확신할 수가 없잖아.”

“그 조직의 조직원 한 명만 찾아도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성건우는 매우 진지하게 제안했다.

“그리고 그 조직에 섞여 들어가 집회에 참석하면서 단서를 모으려고? 진상도 찾고, 공짜 음식도 먹겠다?”

장목화는 안 봐도 뻔하다는 듯 성건우의 계획을 줄줄 읊어댔다. 분명 어린아이의 계책처럼 황당무계한 계획이었지만, 사실 성건우의 능력이 더해진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이내 손에 들린 전단지를 보던 성건우가 오른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이 사람들 지능으로 보면 전 음식을 나눠주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죠.”

바로 실소하던 장목화가 주의를 주었다.

“오타가 있다고 해서 멍청하다고 볼 수는 없어.”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애들이라면 속이기 쉬울 것 같은데요.”

성건우의 말투에서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장목화도 결국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웃었다.

“그건 그래. 이런 조직의 일원이 됐다는 건 그만큼 순진하다는 뜻일 테니까. 음, 아마 쉽게 위협받거나 유도당하는 이들일 거야. 이 조직의 조직자들이 속이기 쉬운 사람들에게 음식까지 아끼지는 않겠지?”

“그건 선을 넘는 짓입니다!”

성건우가 돌연 강력히 분개했다.

이후, 잠시 생각하던 장목화가 천천히 운을 뗐다.

“방심하면 안 돼. 배윤수와 임보경도 바보는 아냐.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왜 그런 자들과 함께하고 있는 걸까?

난 네가 정말로 이 조직에 휩쓸리면서 거기 물들어 지적 수준이 떨어질까 걱정돼. 농담이 아냐. 각성자의 능력은 전부 기이하고도 무시무시하잖아.”

“감염은 상호적인 거예요.”

매우 진지한 그의 대답에, 장목화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윽고 그녀는 창문 앞으로 다가가 유리창을 열고, 아래쪽에 있는 백새벽과 용여홍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더는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 후 장목화는 성건우와 함께 방 안을 한 번 더 수색해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 * *

한 방의 탐색을 마친 장목화, 성건우는 맞은편 방문도 따고 들어갔다. 이곳도 임보경이 묵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이었다.

이 방은 굉장히 지저분하고 어수선했다. 각종 물건이 곳곳에 널려 있고, 덩달아 옅은 곰팡이 냄새도 풍겨왔다.

그에 반해 테이블은 아주 깨끗한 편이었다. 그 위에는 책, 종이, 투명한 테이프로 둘둘 싼 만년필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살피던 성건우와 장목화는 책 대부분에 위드 시티 공공 도서관의 인장이 찍혀있음을 확인했다. 인장이 찍혀있지 않은 책은 다 어디에서 난 건지 더럽고, 낡고, 해진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 방의 주인이 누군지 대강 파악해냈다.

이 방은 부모와 아이 한 명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사는 곳이었다. 아빠는 힘을 쓰는 일을 하는 것 같았고, 엄마는 집에서 삯바느질로 돈을 버는 듯했다. 또한 11~2살로 추정되는 아이는 독학 중이었다.

“이런 사람들이라면 그 미치광이들 말을 믿지 않겠지.”

장목화가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

결국 이곳은 아무 상관도 없는 방이라 곧장 떠나면 되었다.

성건우도 이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위에 있던 만년필을 집어 드는 걸 보고 장목화가 물었다.

“뭐 하려고?”

“틀린 부분을 고쳐주려고요.”

성건우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답했다.

“⋯⋯시간 없어. 남은 단서를 놓치면 조사는 중간에 끊길 수도 있어.”

장목화는 팀장의 권한으로 팀원을 윽박지르는 대신, 사실만 나열하며 최대한 차분히 설득했다.

그러자 성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몸을 숙여 종이 위에 빠르게 몇 자를 남겼다. 그는 단 몇 초 만에 펜을 놓고 돌아섰다.

장목화는 살짝 몸을 틀어 테이블 쪽을 힐긋 살펴보았다. 성건우는 그곳에 반듯한 글자를 남겨두었다.

「열심히 공부해라.」

장목화는 순간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방을 나와 문을 다시 잠근 장목화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깜짝 놀라겠는데.”

“두려움도 일종의 동력이 될 수 있죠.”

성건우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장목화는 상대를 살짝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씁, 자꾸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래?”

* * *

장목화, 성건우는 건물을 나와 옐로혼 앨리로 이어지는 뜰 입구에 이르렀다. 이곳에도 초소가 있었다. 그 안엔 짙은 파란색의 낡은 솜옷을 입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은, 피부가 귤껍질처럼 거칠었으나 머리숱은 빽빽했고 흰머리도 없었다. 그 때문에 겉모습만 보고는 그의 나이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때, 장목화가 따로 분부하지도 않았건만 성건우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웃으며 말을 붙였다.

“어르신.”

문지기 노인은 손에 들고 있던 국방색 모자를 머리에 쓰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지 마. 할 말 있으면 하고, 질문이 있거든 돈을 내.”

“어르신은 남자고, 저도 남자입니다.”

성건우는 침착하게 조금 전 다른 문지기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노인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스듬히 떨어진 맞은편을 가리켰다.

“여자라면 저기, 저 건물에 많아.”

“…….”

노인은 성건우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

성건우는 그의 말을 정정하기보단 바로 임보경의 사진을 내밀었다.

“혹시 이 사람 본 적 있으신가요?”

“봤지. 하지만 그런 생각일랑 접어둬. 그 여자는 창녀가 아니거든.”

조금 음량이 커졌던 노인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노스 스트리트에 사는 한 귀족 영감의 정부인 것 같아. 며칠에 한 번씩 어떤 남자가 와서 이 여자를 찾더라고.”

“그걸 어떻게 아세요?”

성건우가 물었다.

“난 이 여자와 같은 건물, 같은 층에 살거든. 그러니 당연히 알지.”

노인이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럼 혹시 정 영감님을 아시나요?”

성건우는 뜬금없이 질문을 바꿨다. 레드실크 앨리 문지기는 여태껏 임보경 관련 정보는 대부분 정 영감에게서 들은 것이라고 했었다.

노인은 흠칫 놀란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정 영감인데.”

“아, 그럼 됐습니다.”

성건우는 대화를 다시 본론으로 돌렸다.

“이 여자가 지내는 방은 창문으로 옐로혼 앨리가 보이는 그 방인가요?”

“맞아.”

정 영감의 말투는 매우 단호했다.

“이 여자를 수시로 찾는다는 그 남자는 어떻게 생겼는데요?”

이어진 질문에, 정 영감이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설명하기 어려운데. 매일 모자를 쓰고 옷깃을 세우고 있거든. 거기다 마스크까지 써. 아주 수상쩍은 차림이지. 딱 봐도 지체가 높아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어. 키는 꽤 큰 편이야. 음⋯⋯, 자네보다 약간 더 작은 정도일걸.”

성건우가 계속해서 물었다.

“오늘 이 사진 속 여자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정 영감이 웃기 시작했다.

“봤다마다. 8시 좀 넘어서 나가던데. 마스크도 하고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어. 여자를 잘 모르는 사람은 절대 알아볼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나는 매일 외출했다 돌아오는 걸 봐서 체형만 보고도 알았지.”

정 영감은 임보경을 꽤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성건우는 다시 또 캐물었다.

“어디로 갔는데요?”

정 영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큰 가방을 끌고 사우스 스트리트 쪽으로 가는 걸 보기는 했다만. 검은색 여행 가방이었어⋯⋯.”

장목화는 이미 임보경이 이곳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임보경은 아마도 유호중이 죽든 안 죽든 이곳을 떠날 작정이었던 듯했다.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성건우는 주머니에서 압축 비스킷 한 봉지를 꺼냈다.

“녀석, 예의 하나는 바르구나!”

정 영감은 온화한 표정으로 성건우를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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