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경제적인 뇌
크리스티나는 성건우의 출중한 외모와 어떤 적개심도 드러내지 않는 모습에 안심한 듯했다. 그녀가 곧 온화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애쉬랜드어를 써도 돼. 무슨 일이지?”
그녀의 발음은 매우 정확했다.
곧이어 성건우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티나 회장님, 저는 길드에 새로 가입한 사냥꾼입니다. 회장님도 길드 일원이시죠. 전 외부인입니다. 회장님도 외부인이시고요. 그러니까⋯⋯.”
성건우의 말은 비논리적이고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듣기엔 고위층에 빌붙고자 하는 신입 사냥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서로를 도와야겠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답하던 크리스티나가 홀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난 일단 회의에 가야 하니 9시 30분에 내 사무실로 와. 3층 308호야.”
그녀가 성건우의 옆을 스치며, 아무도 몰래 그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계속 성건우를 주시하던 장목화는 순간 넋을 놓을 뻔했다. 다행히 자기 통제력이 강한 그녀는 겉으론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와 그녀의 경호원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장목화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성건우의 곁으로 다가갔다.
“느낌이 어때?”
“방심했어요.”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응?”
장목화도 성건우의 말뜻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때맞춰서 엄마라고 불렀어야 하는 건데.”
성건우가 반성하듯 중얼거렸다.
낮게 두어 번 웃다가 감정을 추스른 장목화가 말했다.
“네 잘못은 아냐. 크리스티나가 지나치게 능수능란한 거지. 가볼 거야?”
성건우는 알 수 없는 그만의 생각에 푹 빠져 있는 듯했다. 그러한 반응에 장목화도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했다.
“내 생각에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팀원이 희생해야 할 임무 같은 건 없어. 다른 방법도 아주 많아. 목표도 아직 많이 남아있고.”
성건우가 천천히 말했다.
“전 저 사람을 억지쟁이로 만들 수 있어요.”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것도 방법이긴 하지⋯⋯. 그래도 좀 더 생각해 보자. 신중해야지.”
그러던 사이, 홀 안 대형 패널에서 또 다른 임무가 나타났다.
[긴급 임무 업데이트 : 유호중 총살 사건 단서 추적.
설명 : 사건이 발생한 건물 안에서 저격수와 마주친 사람이 있다고 함.]
해당 문장 다음으로는 목격자의 진술에 따라 만들어진 몽타주가 떠올랐다.
패널 속 인물은 키가 꽤 큰 남자로,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눈썹이 굉장히 곧았으며, 눈이 작아 완전히 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순간 장목화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완전히 빼다 박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몽타주 속 특징적인 요소가 딱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윤수……!’
실종된 구조팀 팀장이 몽타주가 되어 떠올랐다.
‘그럴 리가…….’
자제력이 뛰어난 장목화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냥 배윤수가 아직 살아서 위드 시티에 있다는 정보였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팀장이 분명히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총살 사건에 연루됐으면서도 회사에 상황을 보고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었다.
백번 양보해 그들의 무선 통신기가 망가졌거나 잃어버린 거라면 그걸 고치거나 지하 시장에서 다른 무선 통신기를 빌리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설마 뭔가 발견한 뒤 배신하고 도망친 건가? 아냐, 그런 상황이라면 위드 시티에 남아있을 리가 없어. 회사에서 자신들이 사라진 것에 대해 조사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 회사를 겨냥한 음모 때문에 일부러 이곳에 남아있는 게 아닌 이상⋯⋯.’
장목화가 성건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성건우 역시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물었다.
“살인을 통해 회사에 경고하려는 걸까요?”
장목화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복잡하진 않을 거야. 그건 그렇고 너, 사고방식이 좀 위험하네. 난 저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붙잡힌 게 아닌가 의심이 드는데.
누군가가 구조팀원들을 볼모로 삼아서 배윤수에게 자기들이 하는 더러운 일을 도우라고 협박한 게 아닐까? 그런 거면 배윤수와 임보경으로 의심되는 두 명만 도시에 나타났다는 단서가 있고, 나머지 세 명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도 설명이 돼.”
나머지 세 사람은 인질이 되어 어딘가에 갇혀 있을 터였다.
“그것도 너무 복잡한데요.”
성건우는 아까 전 장목화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장목화도 그냥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단순히 누군가에게 더러운 일을 시키자고 이렇게 복잡한 일을 꾸밀 필요는 없지. 동기가 부족해.
복수일까? 유호중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이 배윤수 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혀서 그 사람이랑 임보경 둘만 남은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회사에 연락하는 게 먼저야. 회사의 지원을 받는다면 일은 훨씬 간단해지니까.”
한동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한숨을 토해냈다.
“이곳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봐도 소용없어. 일단 임무부터 받자. 어쨌든 적어도 어느 정도의 단서는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성건우는 곧장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위에 놓인 기계를 밝힌 뒤, 사냥꾼 배지를 긁어 임무를 접수했다. 이 임무는 딱히 제한이 없어서 신입도 얼마든 받을 수 있었다.
장목화도 같이 임무를 접수하는데, 갑자기 1층에 크리스티나가 나타났다. 이번엔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고 있었다.
이내 그녀가 성건우를 발견하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안 되겠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사냥꾼 길드 부회장은 그 길로 황급히 옆문을 통해 홀을 떠났다.
“급한 일?”
뭔가 생각하던 장목화가 성건우의 곁으로 다가가며 씩 웃었다.
“보니까 네가 모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뭔가 달라진 거 눈치챘지?”
“혼자였어요.”
성건우가 답했다.
장목화는 옅게 웃으며 칭찬했다.
“훌륭해. 평소에 경호원 셋을 대동하는 사람이 감히 혼자 외출했어. 그건 저 사람의 실력도 약하지 않다는 뜻이야. 아니면 지금 저 사람이 만나려는 자가 매우 믿을 만한, 안전한 사람이고 그 사람과의 거리도 그렇게 멀지 않다는 거겠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수많은 비밀이 연루돼 있을 일인 것만은 분명해.”
그때, 장목화는 곁눈으로 백새벽, 용여홍도 긴급 임무를 접수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에 그녀가 말을 끊고서 문을 가리켰다.
“가자, 현장을 봐야지.”
* * *
장목화가 사우스 스트리트로 돌아가서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사건 현장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유적 사냥꾼 한 무리가 유호중이 총격을 당해 쓰러진 곳을 에워싸고 있었다. 단서를 찾기 위해서라면 노면까지 다 뒤집어엎을 기세였다.
장목화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게 무슨 소용이야? 중요한 건 저격수 위치랑 유호중의 소지품인데.”
유호중의 시체는 일찍이 도시 방위군이 수습한 상태였다.
저격수가 자리해 있던 건물을 확인한 장목화는 성건우와 함께 그 건물에 대응하는 뜰로 들어갔다.
장목화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찡그렸다.
수많은 이들이 계단 밖으로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장목화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몇 초간 상황을 진지하게 성건우가 답했다.
“구경이요.”
“옥상 구경을 하겠다고 줄을 선 거야?”
장목화는 황당해하면서도 우스워했다.
이 임무를 받아들인 유적 사냥꾼의 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몇 걸음 나아가 줄 맨 끝에 선 장목화가 바로 앞에 있는 남자의 팔꿈치를 톡톡 두드린 뒤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게 무슨 줄인가요?”
남자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가 장목화를 보고 친절하게 웃었다.
“목격자와 얘기하려고 기다리는 겁니다. 새로운 단서를 얻을까 하고요.”
새로운 단서는 하나당 최소 10오레이였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장목화는 이 기묘한 상황이 참 흥미로우면서도 우스웠다.
이내 그녀는 성건우에게 얼른 눈짓한 뒤, 계단 쪽으로 향했다.
“여기 거주민입니다. 우린 여기 사는 사람이에요⋯⋯.”
장목화가 고장 난 라디오처럼 반복하는 소리에 이어, 주변에서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부업 좀 할래…….”
“하룻밤 얼마…….”
참 난잡한 소리 속에서, 장목화와 성건우는 계단을 비집고 4층으로 갔다.
* * *
유적 사냥꾼들이 선 줄은 이곳에 반쯤 닫힌 방문 앞에서 끝이 나 있었다.
장목화는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가, 그 문 위에 탄필로 쓴, 삐뚤빼뚤한 글씨를 발견했다.
「총격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대화 1분당 2카스.」
1오레이는 10드라세였고, 1드라세는 10카스였다.
“머리가 꽤 잘 돌아가네.”
장목화는 약간 복잡한 감정이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심지어 가격은 꽤 합리적인 편이었다. 금액이 이보다 더 높았다면, 유적 사냥꾼들도 과연 목격자와의 대화가 가치가 있는지, 임시로나마 더 큰 팀을 꾸려야 하는 건 아닌지 따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수준이라면 혼자서라도 더 좋은 질문을 만들어 내면서 유효한 단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성건우 역시 감탄했다.
“왜 한 번에 빵 하나를 요구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랬더라면 한 달은 거뜬히 먹고 살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물리지 않을까?”
장목화는 대충 대꾸한 뒤 이 층에 자리한 다른 방들을 살폈다. 상당한 사람들이 문을 반쯤 열고 서서, 길게 늘어선 줄을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수시로 목청을 높여 외치는 이도 있었다.
“저 사람은 유일한 목격자가 아니야! 어쩌면 나도 봤을지 모른다고. 생각이 나지 않을 뿐이지⋯⋯.”
장목화는 이제 이 상황에도 점차 익숙해져서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사냥꾼 길드가 주도하는 거점의 시민 문화는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이는 장목화가 관심을 보이는 여러 방면 중에 속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관찰하는 대신 성건우를 데리고 얼른 5층으로 올라가 옥상으로 향했다.
* * *
옥상에 있는 유적 사냥꾼의 수는 적은 편이었다. 게다가 현장 보존을 위해 질서 유지를 담당하는 도시 방위군들도 배치되어 있었다.
뒤따라 올라온 백새벽과 시선을 주고받은 장목화가 거리 쪽 벽 앞에 자리를 잡고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저격수는 아마 이곳에서 총을 쐈을 거야.”
그녀는 총격 과정을 목격한 바 있었다.
그때, 장목화의 옆으로 다가온 백새벽이 저격 총을 쥔 양손을 들고서 상황을 재현해보았다. 물론 계속해서 일행이 아닌 척, 남남처럼 행동 중이었다.
“좀 어색한데?”
총에 맞았을 당시, 유호중은 거의 사우스 스트리트 중앙에 다다라 있었다. 이 건물과의 거리는 3~4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이 각도에서 목표를 명중하려 한다면 저격수는 몸을 옥상 밖으로 한참 빼야만 했다. 상당히 어색하고 불안정한 자세였다.
백새벽이 시선을 거두며 다시 한번 덧붙였다.
“나라면 유호중이 레드실크 앨리에서 걸어 나오기 전에 쐈을 거야.”
옥상 좌측에서는 레드실크 앨리가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그 안에 있는 적을 저격하기는 훨씬 쉽고 편했다.
“저격수도 유호중이 레드실크 앨리에서 걸어 나오기 전까지는 여기 없었는데, 나중에야 헐레벌떡 자리를 잡고 방아쇠를 당겼다는 건가?”
장목화는 백새벽에겐 눈도 돌리지 않고, 오직 성건우만 보며 얘기했다.
“더 이상 못 참을 것 같아서 급하게 화장실에 다녀온 것일 수도 있죠.”
성건우의 진지한 답에, 장목화도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 이따가 한 번 찾아봐. 옥상과 5층 어딘가에 혹시 배설한 흔적은 없는지.”
유적 사냥꾼이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데, 여태까지 그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