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총격
그때, 장목화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럼 일단은 그렇게 정하자고. 사진을 자세히 보면서 그 사람들의 생김새도 기억하자. 혹시 알아? 내일 외출을 하자마자 그들을 맞닥뜨리게 될지.”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운이 좋다고 봐야 할까요, 운이 나쁘다고 봐야 할까요?”
성건우가 물었다.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
만약 운이 좋다면 그들과 맞닥뜨리지 않게 될 가능성이 컸고, 운이 좋지 않다면 그들과 직접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컸다. 성건우의 말뜻을 이해한 장목화는 용여홍을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냈다.
용여홍은 성건우와 운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나누고 싶지 않아서, 즉각 고개를 숙여 사진을 살폈다.
27~8살 정도로 보이는 배윤수는 눈썹이 곧고 잘생긴 편이었다. 다만 상대적으로 작은 눈은 아직 다 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임보경은 겉보기에는 배윤수보다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였다. 긴 머리에 달걀형 얼굴의 그녀는 기질이 온화해 보였고, 눈썹에는 어렴풋하게 보이는 검은 점이 있었다.
서른 살이 갓 넘은 듯한 노기호는 상당히 준수했으며, 얇은 입술과 고동색 피부가 특징이었다.
김원해는 온갖 시련을 다 겪은 사람처럼 보였다. 매우 홀쭉한 얼굴은 반고 바이오의 직원이라기보다는 지상의 사람 같았으며, 아래턱에는 아주 오래된 듯한 흉터가 나 있었다.
위보배의 얼굴에서는 앳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사람들이 꽤 좋아할 법한 모습이었다. 정보에 따르면 그녀의 키는 166센티미터라고 했다.
사진들을 살피던 용여홍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다들 결혼해서 배우자도, 아이들도 있겠죠⋯⋯.”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성급하게 굴면서 상대의 경계심을 자극해서는 안 돼.”
용여홍이 자료를 더 살피려던 순간, 갑자기 모든 불이 꺼져버렸다.
“단전 시간인가?”
장목화는 바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미 8시 40분이 지나있었다.
“그래도 회사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네.”
그녀가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반고 바이오의 가로등 소등 시간은 저녁 9시로, 단 1분도 지연되지 않고 즉각 꺼져버렸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정해진 시간보다 10분이나 더 지난 후에야 소등이 이뤄졌다.
“인간적이라는 건 관리층이 좀 해이하다는 뜻 아닌가요?”
백새벽은 팀장의 말에 숨겨진 뜻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자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장단점이 있지. 구체적인 상황은 자세히 분석해 봐야겠지만.”
돌연 성건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안 하느니만 못한 얘기네요. 새벽이는 차마 못 할 말 같아서 대신합니다.”
“와, 친절도 하셔라.”
이제 성건우의 이런 모습에도 면역이 돼서, 장목화는 언제나처럼 그를 잠깐 째려보고 말았다. 이내 장목화가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이만 쉬자. 하루 내내 고생했고, 내일도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예, 팀장님!”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목청을 높였다.
그러자 장목화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어. 이 건물 사람들한테 우리가 한 팀이란 걸 알리고 싶은 건 아니지? 하하, 그래도 괜찮아. 앞으로 더 조심하면 되지. 환경이 달라지면 또 그 나름의 주의사항이 있는 법이니.”
그래도 단전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은 주위가 시끌벅적한 덕분에 용여홍의 목소리가 적절히 묻혀서 다행이었다.
* * *
전에 정한 그대로 백새벽과 용여홍은 뜰 쪽에 붙은 방으로 돌아갔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백새벽은 용여홍을 데리고 곧장 뜰로 뛰어내려 지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또한 초인간적인 감지 능력을 가진 장목화와 성건우 역시 거리에서 문제가 발생해도 그 여파를 효율적으로 피할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이 돌아가자, 장목화가 방 안에 있는 벙커 침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위에서 잘래, 아니면 내가 위에서 잘까?”
“팀장님이 위에서 주무세요.”
성건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
잠시 후, 장목화가 웃으며 물었다.
“자다가 깨어나면 나까지 깨울까 봐 걱정돼서 그러지?”
“오늘 먹은 게 좀 많아서요.”
성건우는 역시 매우 솔직했다.
피식 웃던 장목화가 순간 뭔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었다.
“그래, 근데 오늘 밤에는 질병 섬에 도전하지 마. 내일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체력을 최대한 보충해두는 게 좋아.”
“알겠습니다.”
성건우가 다시 거침없이 답하자, 장목화가 웃으며 칭찬했다.
“그래도 일의 경중은 구분할 줄 아네.”
말을 마친 그녀는 창문에 붙은 책상 옆으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사우스 스트리트와 이스트 스트리트는 새카만 어둠에 잠겨있었다. 가로등도 더는 빛을 발하지 않았다.
반면, 웨스트 스트리트 일부 구역은 어둠 속 등대라도 되는 듯 여전히 빛이 새어 나왔고, 노스 스트리트는 땅 위에 내려앉은 은하수처럼 환했다.
“구분이 확실하네.”
한숨을 내쉬던 장목화는 외투를 벗고 2층 침대로 올라갔다.
탕- 탕, 탕!
장목화와 성건우가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무렵, 갑자기 또렷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웨스트 스트리트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몇 발의 총성 이후 밤은 다시 평안해졌다. 웨스트 스트리트에서 퍼지는 강렬하고 생동감 넘치는 음악 소리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이어졌다.
짝짝짝!
성건우가 난데없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장목화는 이제 그의 생각을 추측하기도 귀찮아서 바로 물었다.
“손뼉은 왜 쳐.”
“활기가 넘쳐서요.”
성건우가 아주 부럽다는 듯 답했다.
“이게 바로 위드 시티인가 봐.”
장목화는 다시 눈을 감고, 느릿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이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성문에서 왁자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는 총성도 몇 발 섞여 있었다.
“왜 총을 쏘는 거지?”
1층 침대에서 자고 있던 용여홍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아래를 택한 건 백새벽이 저격에 능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높은 곳에서 뜰의 동정을 감시하는 일은 용여홍보다 백새벽이 더 뛰어난 편이었다.
“낮에 성문을 통과하지 못한 유랑자들이 밤을 타서 난입하려는 걸 거야. 그래서 경비대가 발포한 거지.”
백새벽이 자신의 식견과 현지 상황에 근거해 추측했다.
용여홍의 감정이 복잡해졌다. 추운 겨울밤 천천히 얼어 죽어가야 하는 유랑자들이 안쓰러우면서도, 맡은 소임에 따라 발포한 경비대를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순간 용여홍은 누군가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이 빌어먹을 세상.’
이는 반고 바이오 안전부의 오래된 직원들이 가장 즐겨 하는 말이었다.
다시 성문 밖이 잠잠해지고, 용여홍은 애써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또 위층인지 그 위층인지 모를 곳에서 울려 퍼진 신음이 용여홍의 귀를 파고들었다. 다른 방에서도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뜰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끼리 공명하는 듯했다.
사실 용여홍은 이런 상황이 그렇게 낯설진 않았다. 반고 바이오의 일반 직원들이 사는 방의 방음도 그렇게 좋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귀가 붉게 달아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같은 공간에 이성이 함께 하고 있었다.
차차 민망한 신음이 잦아들자, 용여홍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몇 분 후,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동시에 어디선가 날카로운 욕설도 터져 나왔다.
“제기랄! 겨우 빵 두 개를 줘놓고 한 번 더 하자고? 쪽팔리지도 않나!”
갑작스러운 욕설에 충격을 받은 용여홍이 한참 후에야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저게 무슨 말이야?”
“창녀야.”
백새벽이 간결하게 답했다.
반고 바이오 내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직업이었다. 용여홍이 그 직업이 무엇인지나마 알고 있는 건 교과서와 사전 덕분이었다.
흠칫 놀란 용여홍이 자기변명을 하듯 말을 이었다.
“아⋯⋯. 난 지상 사람들이 오로지 생존에만 몰두하는 줄 알았는데⋯⋯.”
“저 일 자체도 일종의 생존 방식이야. 생존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느낄수록, 저런 방식을 통해 그 압박감을 해소하려는 거지.”
백새벽의 말투에는 어떠한 혐오감도 어려 있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덧붙였다.
“위드 시티에는 외부인도, 유적 사냥꾼들도 아주 많아. 평소 애쉬랜드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몇 주, 심지어 몇 달간은 여자를 구경도 못 하거든? 그런 의미로 보면 여자 유적 사냥꾼은 원하는 대로 누구든 고를 수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 김에 물자도 좀 얻을 수도 있겠고.
근데 그걸 마냥 좋은 거라고 할 순 없지. 성병과 임신을 걱정해야 하잖아. 자칫 잘못했다가는 인생을 망치게 될 수도 있는 건데.”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용여홍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결국 한숨만 쉬었다.
이후로도 밤은 소요와 적막을 빠르게 오갔다. 그러다 용여홍이 한밤중 문득 깼을 때, 어느새 주변은 잠잠해져 있었다.
* * *
검은 장막을 드리운 하늘 끝이 조금씩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현재 시각은 7시 30분, 아직은 어둠이 세상을 서성이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벌써 거리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바쁘게 문을 열고 아침 식사를 판매하는 가게도 적지 않았다.
그중 가장 붐비는 가게는 옥수수빵을 파는 가게였다. 저렴한 가격이 많은 손님의 발목을 잡아끌고 있었다.
한 잔에 1카스를 받고 데운 물만 파는 가게도 있었다. 옥수수빵을 그냥 먹으려면 목 막히기 십상이었다. 그 옥수수빵을 먹는 유적 사냥꾼들을 겨냥한 가게였는데, 역시 단순한 물도 돈을 내야만 마실 수 있었다.
“퍽퍽하네요⋯⋯.”
성건우가 말했다.
옥수수빵은 하나에 5카스, 두 개에 1드라세였지만, 그는 벌써 노르스름한 옥수수빵 두 개를 연달아 먹는 중이었다.
수통을 들고 있던 장목화가 성건우를 팩 노려보았다.
“그러게 누가 재촉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허겁지겁 먹으래?”
“꼭 아귀도에 다시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에요.”
성건우가 물을 꿀꺽꿀꺽 마신 뒤,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의 말뜻을 파악한 장목화가 반문했다.
“이런 식사 방식에 적응이 되면, 정법을 만나더라도 아귀도에서 벗어날 시간을 몇 초라도 벌 수 있을 거란 뜻이야?”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일단 뭐라도 준비하는 게 낫죠.”
장목화는 묘한 기시감 끝에 자신이 했던 말임을 깨달았다.
“⋯⋯또 내 말을 그대로 가져다 쓰네!”
이내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는 삼키기 쉬운 음식을 준비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성건우가 수통을 허리띠에 매달며 대꾸했다.
“언제 정법을 만날지 예측할 수가 없잖아요.”
“먹지 않고 가지고 있기만 하면 되지. 하지만 위드 시티에서 정법 선사를 만날 리는 없어. 여기엔 여자들이 수도 없이 많잖아. 그런 자가 여기오면 자기 감정을 제어하기가 힘들 거야.”
그렇게 말을 나누며 장목화는 성건우와 함께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이들의 목적지는 사냥꾼 길드였다.
백새벽과 용여홍도 느릿하게 아침을 먹고 그들을 천천히 뒤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