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타지에서 만난 고향 친구
백새벽은 장목화, 성건우 그리고 정보요원이 완전히 시야를 벗어난 후에야 오렌지 소총을 거두고 옥상 가장자리를 벗어났다.
다음 순간, 그녀와 용여홍은 동시에 반대편 사우스 스트리트 노예 시장 쪽을 돌아보았다. 서쪽에선 여전히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오고 있었다.
백새벽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나직하게 말했다.
“가자.”
용여홍은 곧 백새벽과 함께 왔던 길을 따라 거리로 돌아갔다.
가로등이 망가진 구역에서 막 벗어나려던 그때, 두 사람은 어두운 길가의 한 가게 앞에서 허리를 웅크린 한 인영을 발견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의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역시 둘의 인기척을 느낀 듯 이들 쪽으로 몸을 홱, 틀었다.
이후 그는 냅다 몸을 날리다시피 해 옆쪽 골목길로 달아났다.
“좀도둑?”
용여홍이 의혹 가득한 눈길로 추측했다.
백새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조금 전까지 저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곧 허리를 숙여 종이 한 뭉치를 집어 들었다.
* * *
이스트 스트리트, 한 창고 안.
유리창으로 바깥의 빛이 스며들어 어렴풋하게나마 시야를 밝혔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성건우가 웃음을 머금고 질문했다.
그의 시선 끝에,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서 있는 정보요원이 있었다.
“진병욱.”
정보요원이 솔직하게 답했다. 이 이름은 위드 시티에서 사용하는 가명이 아니라서 폭로될 염려가 없었다.
성건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딘가 익숙한 이름인데……. 혹시 진현오라는 분을 아세요?”
“엇? 우리 아버지인데요!”
진병욱이 놀란 얼굴로 대꾸했다.
정말이지 우연한 만남이었다. 성건우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495층?”
“예, 예! 저는 우리 집 막내입니다. 당신도 495층에 사나요?”
진병욱이 웃으며 되물었다.
성건우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네, 제가 아마 당신 딸의 얼굴도 꼬집은 적 있을 겁니다.”
“예?”
“아주 통통하던데요. 한 2년 전쯤에 진현오 어르신께서 활동 센터에 그 아이를 종종 데려오셨거든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곤 도통 못 봤지만요.”
성건우가 자신의 감상을 밝혔다.
“2년 전……. 아, 제가 막 이곳에 파견됐을 때네요. 우리 아내도 평소 출근을 해야 하니 부모님께 돌아가면서 아이를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회사 유치원의 하원 시간이 좀 이른 편이라서요. 근데 어떻게 우리 아이 얼굴을 꼬집어요? 그때 우리 애는 겨우 다섯 살이었는데.”
대략적으로나마 상황을 파악한 진병욱이 장난스레 불만을 표했다.
“어르신이 바쁘면 제가 가끔 그 아이랑 놀아줬었거든요. 이긴 사람이 진 사람 얼굴을 꼬집거나 손바닥 때리는 것 같은 게임을 했었죠.”
성건우가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진병욱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우린 한 열 살 정도 차이가 나려나요? 어쩌면 저도 어렸을 때 당신을 괴롭힌 적이 있을지 모르니 서로 퉁칩시다.”
두 사람은 계속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나갔다.
그때, 장목화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진병욱은 집을 떠난 지 2년이 됐지만, 부모님 건강 상태나 아내의 상황, 딸의 성장에 대해서는 도통 묻지 않았다. 이는 자연스레 현재 이곳 문제가 급하기 때문이란 짐작으로 흘렀다.
“진병욱 님, 이곳에 파견된 구조팀 실종 원인은 알아내셨나요?”
진병욱은 장목화의 과분한 대우에 기뻐하면서도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님이라니요. 당신은 구조팀 팀장이니 적어도 D6급은 될 것 아닙니까. 저하고 상당한 차이가 있을 텐데요.”
장목화도 상대의 반응에 답해줬다.
“몇 급이신데요?”
“D5입니다. 이곳 정보망을 담당하는 사람은 몇 명 안 되죠. 기한을 다 채우고 돌아가면 그때는 한 등급 더 높아질 겁니다.”
진병욱은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고 바이오는 대외 업무 담당 직원들에게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D6과 크게 차이나는 것도 아니네요. 일단 일 얘기부터 하시죠.”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진병욱도 고개를 끄덕인 후, 자료 한 뭉치를 꺼내며 기억을 더듬었다.
“예, 전 회사에서 통지하기 전까지 전 그 구조팀이 위드 시티에 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여러분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는 서로 평행하는 두 개의 선과 같아서 서로에게 전혀 관여하지 않잖아요.”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죠. 만약 특정한 임무로 온 게 아니면 저희도 당신의 도움을 받기 위해 일단 회사에 전보를 보내 상부 명령을 기다려야 하니까요. 제가 기억하기로 그 구조팀이 회사에 마지막으로 보낸 전보에 이미 위드 시티에 도착했고, 구세계 파괴를 경험한 노인들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던데요.”
그녀는 그 구조팀이 어떤 노인과 접촉한 후에 일을 당한 건지 의심했다.
진병욱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들이 실종되고 2주 뒤에 회사에서 보낸 전보를 받았어요. 단서가 거의 다 사라져버려서 조사 자체가 불가능했죠. 그래도 수확은 있었어요. 그들은 남자 셋, 여자 둘, 총 다섯 명으로 이뤄진 팀이었어요.
전 시도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이 도시 내 여관과 호텔을 돌아다니며, 그 시간대에 그런 일행이 묵은 적이 있냐고 물었어요. 마침내 답을 들었죠.”
“남자 셋, 여자 둘로 이뤄진 유적 사냥꾼일 수도 있잖아요.”
성건우가 물었다.
그러자 진병욱이 웃으며 말했다.
“비슷한 무리는 있었을 거예요. 저희가 얻은 답도 하나만은 아니었으니까. 근데 자세한 비교를 통해 배제하다 보니 그 팀이 메리다 호텔에 묵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위드 시티에서 상당히 좋은 호텔이죠.
그들이 체크인한 시간과 회사에서 마지막 전보를 받았던 시간이 완전히 일치했어요. 메리다 호텔 직원의 증언도 있었죠. 보통 유적 사냥꾼과는 다르게 여자들은 아주 예쁘고, 남자들은 아주 멋졌다고요. 우리 회사 젊은이들이 유전자 개량을 받아 전부 미모가 뛰어난 편이잖아요.”
“당신도 유전자 개량을 받았겠죠?”
성건우가 불쑥 물었다.
약간 놀란 표정을 드러낸 진병욱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우리 부모님께서 당시에 좀 나이가 드신 편이라 그랬을 수도 있고, 개인적인 체질 문제 때문일 수도 있겠죠. 어쨌든 제가 받은 유전자 개량 효과는 별로 좋지 않았어요.
뭐,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평범해서 다른 사람들 뇌리에 그다지 또렷하게 각인되지 않는다는 거? 음, 그리고 위장이나 미행 방면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요.”
“적어도 키는 175센티미터 이상이잖아요.”
성건우가 위로하듯 말했다.
진병욱의 키는 장목화와 거의 비슷했다.
‘여홍이의 절친답네⋯⋯.’
장목화는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 몰래 눈을 흘겼다. 그리곤 다시 한번 성건우와 진병욱의 한담을 끊고 나섰다.
“그 팀이 메리다 호텔 같은 곳을 선택했다는 건 위드 시티에 도착했을 당시 어떠한 위험도, 잠재된 적의 존재도 감지하지 못했다는 뜻일 거예요.”
그러지 않고서야 마음 놓고 당당히 호텔에 체크인하진 못했을 터였다.
진병욱은 장목화의 말에 힘입어 꺼내든 자료들을 손에 쥔 채 말을 이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그 이후에도 그들은 비교적 편안하게 움직였을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추적하고 미행하기는 어렵지 않았겠죠. 전 사냥꾼 길드의 내부인을 만나 그 당시 이와 같은 팀이 어떤 임무를 받아 갔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었어요.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더군요.”
자신의 행적을 숨기지 않았던 구조팀이라면 사냥꾼 길드에 찾아와 임무를 접수할 때도 일부러 둘, 셋으로 찢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목화의 질문이 이어지기 전, 진병욱이 다시 알아서 말을 이어갔다.
“근데 그들이 사냥꾼 등록을 했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어요. 전부 이미 정식 사냥꾼이 돼 있었어요. 하하, 제가 이걸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본명을 사용했군요.”
성건우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진병욱의 얼굴에 약간 놀란 표정이 드러났다.
“⋯⋯맞아요. 그들은 규칙을 상당히 잘 지켰어요.”
“그렇다는 건 그들이 그때까지도 어떠한 화를 불러일으킬 일을 하지 않았거나, 이미 위험을 전부 제거해 상당히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단 뜻이겠죠.”
장목화가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는 즉, 그 구조팀이 위드 시티 안에서 뜻밖의 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의미였다.
진병욱은 어떤 평가도 하지 않고 있었던 일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돈을 좀 들여서 그들이 사냥꾼 등록을 했을 당시 찍었던 사진과 그들이 완수한 임무를 손에 넣었어요. 돌아가서 한 번 살펴보세요.”
그가 들고 있던 자료를 장목화에게 건네주었다.
“알겠습니다.”
장목화가 자료를 받아들자, 진병욱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현재까지 조사를 통해 파악한 단서가 몇 가지 더 있어요. 첫째로 그들은 플라잉 버드 술집에 갔다가 그 안에 몇몇 손님들과 충돌했었어요. 뭐, 그렇게 과격한 충돌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위드 시티에 도착한 그다음 날 밤에 있었던 일이에요.
다음으로 그들은 위드 시티 사냥꾼 길드의 어느 고위층 인물을 찾아갔어요. 이건 어제 막 파악한 소식이라 그 고위층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데까진 심층적인 조사가 더 필요해요.
셋째로 그들은 노스 거리에 진입했던 것 같아요. 성주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이 종종 식재료를 사러 나오다가 그런 일행을 봤었다고 진술했거든요. 넷째⋯⋯.”
이 대목에서 진병욱의 표정이 상당히 무거워졌다.
“메리다 호텔 직원 말에 따르면, 그들은 스스로 체크아웃을 했답니다. 회사에서 제게 이 일에 대한 조사를 맡기기 이틀 전에요.”
장목화가 바로 물었다.
“그럼 그 전의 2주 동안 그들은 위드 시트를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회사에는 아무런 전보도 발송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실제로 실종된 기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길지 않다는 거예요?”
그들과 달리 무선 통신기를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던 그 구조팀은 원래대로라면 일주일에 한 번은 회사와 연락해야 했다. 게다가 둘째 주 마지막 며칠 동안에는 회사에서 먼저 그들에게 전보를 보내 상황을 묻기도 했었다.
진병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이상하단 거죠. 최근에 도시 안에서 배윤수, 임보경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봤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아, 맨 위 사진 두 장이 그 사람들이에요.”
지금과 같은 주위 환경에서는 사진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장목화는 사진을 살피는 대신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닮기는 했지만, 전혀 상관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그들인 척 위장한 채 돌아다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들이 지금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
“어느 쪽도 확신할 수는 없죠.”
진병욱은 판단을 내리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
장목화는 느릿하게 한숨을 토해냈다.
“다른 단서는 없나요?”
“아직은 그렇습니다.”
진병욱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목화는 아예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근데 도서관 화재 사건은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그러자 진병욱이 비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최근 두 달 동안 이 도시에 머저리 같은 녀석들이 많아졌어요. 구세계가 지식을 추구하다가 금기를 저지르는 바람에 파괴됐다고 떠들고 다니는 미친 자들이요. 그들은 누구도 구세계가 남긴 책을 읽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후 주요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앞으로의 연락 방식을 약속한 뒤, 성건우는 진병욱에게 회사에 있는 그의 가족들에 관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아쉬움을 안은 채 서로에게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