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도서관
도서관 옆쪽 벽엔 애쉬랜드, 레드리버 문자로 적힌 하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위드 시티 시민과 중급 이상 사냥꾼만 대출 가능.」
‘여기선 사냥꾼 배지가 정말 유용하네.’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반고 바이오에 있는 도서관과 거의 비슷했다. 서가 구역과 열람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장목화는 서가 구역으로 향했다.
여유롭게 서가 사이를 거닐던 그녀는 수많은 서가로 가려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구석에서 아주 오래돼 보이는 두꺼운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국내 소득 법전》
레드리버 문자로만 쓰인 책이었다.
현재 애쉬랜드에선 아무 쓸모도 없는 책이었다. 여기 꽂혀 있는 것도 그저 책장을 채우기 위한 용도일 뿐이었다. 이 책을 빌려 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목화는 빠르게 650쪽을 펼쳐 그 장을 접곤,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와 만년필을 꺼내 짧은 글을 작성했다.
「저녁 8시, 사우스 스트리트 노예 시장 맞은편 골목.」
이것이 바로 정보요원과의 연락 방식이었다. 만약 오후 2시 전에 발견된다면 저녁 8시란 오늘 저녁 8시를 가리키는 말이 될 테고, 오후 2시 이후에 발견한다면 다음 날 저녁 8시를 가리키는 말이 될 터였다.
장목화는 다시 쪽지를 접은 다음, 접힌 책장 안쪽에 넣고사 그 두꺼운 법전을 원래 자리에 꽂아 넣었다.
* * *
환전 창구 앞.
“이건 종이잖아?”
용여홍이 지폐를 보고 잔뜩 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들의 물자는 총 10오레이로 바뀌었다. 이 정도 돈이면 돼지고기 열두 근을 살 수 있었다.
오레이는 그저 얇고 약간 질감이 느껴지는 종이에 불과했다. 그 위에 알록달록한 도안과 한 남자의 옆얼굴, 1이란 숫자가 인쇄돼 있을 뿐이었다.
“퍼스트 시티의 세력 범위 밖에서는 분명 한낱 종이지. 선택지가 있다면 퍼스트 시티에서 만든 금화나 은화를 고르는 편이 훨씬 나아.”
백새벽은 덤덤하게 동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들은 구하고 싶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얼른 점심 먹으러 가자.”
용여홍은 이 종이를 빨리 쓰지 않으면 진짜 종이로 변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장목화도 다시 돌아와 합류했다. 다만 아직도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 * *
사우스 스트리트, 노포 국숫집.
구조팀은 백새벽의 제안에 따라 사우스 스트리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노포 국숫집으로 들어가 다 같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여기는 고추기름 국수가 진짜 맛있어.”
백새벽의 표정도 퍽 부드러워졌다.
“고추기름?”
용여홍이 놀란 듯 되물었다. 고추기름이라니, 너무나 사치스럽지 않은가.
‘여긴 애쉬랜드 내의 비교적 큰 거점이라 생활 수준도 상당한 걸까?’
이내 백새벽은 사장을 향해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인 뒤, 다시 설명했다.
“위드 시티는 유채와 고추를 기르기 적합한 곳이야. 부근에 있는 많은 장원에서 유채랑 고추를 길러서 가격도 저렴해. 근데 이런 작은 가게에서 파는 국수는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야. 귀족들이 먹는 음식만큼 그렇게 고급스럽진 않지⋯⋯.”
백새벽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목화는 그런 그녀를 힐긋 살피며 웃었다.
“음식이 최대한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건우 좀 봐봐,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잖아.”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국수를 만들던 사장이 가게 앞을 지나치는 누군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났습니까?”
행인은 광장 쪽을 가리켰다.
“도서관에 불이 난 것 같던데요.”
순간 장목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목화는 국숫집 안의 다른 이들처럼 거리 쪽을 내다보기만 할 뿐,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온몸에 기름 냄새를 한가득 풍기고 있었다.
고추기름 국수 네 그릇이 가지런히 놓이자, 정말 군침이 돌 정도로 강렬한 냄새가 났다. 그래도 장목화는 애써 식욕을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도서관에 불이 났다고요?”
사장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러게요. 근데 연기가 안 나는 걸 보니 큰불은 아닌 모양이에요.”
지금 성건우는 거의 그릇에 들어가려는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국수를 먹고 있었다. 장목화는 그를 잠깐 노려보곤, 다시 궁금하다는 듯 질문했다.
“최근에 불이 자주 나는 편인가요?”
그녀는 이 질문으로 외부인이라는 사실을 들킬까 염려하지는 않았다. 본래 위드 시티에는 시민보다 외부인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더운 때도 아니잖아요, 아마도 그 미친놈들 소행이겠죠.”
“미친놈?”
장목화가 더욱 호기심을 보였다.
사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이 되고 갑자기 당나귀 패거리들이 많아졌어요. 녀석들은 매일 각 집 문틈으로 종이를 밀어 넣어요.
구세계는 지식 때문에 멸망했다, 본능 이외의 것들을 배우면 안 된다, 책을 멀리하고 생각을 하지 마라. 이딴 구호가 적힌 종이들을요.
이게 당최 말이 되나요? 돈도 안 받고 그런 종이들을 나눠준다니까요! 그 미친놈들이 급기야 도서관에 불까지 지른 겁니다!”
후루룩- 후루룩…….
성건우는 옆에서 국수를 먹느라 거의 혼이 나간 상태였다. 이 상황에 식욕을 참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장목화는 최대한 자제력을 발휘했다.
“귀족 영감들은 신경 쓰지 않나요?”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신경을 써요.”
사장도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걸 꽤 재미있어하는 듯 보였다. 사장과 가까이 있으니, 짧게 다듬은 하얀 귀밑머리도,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가도 선명히 보였다.
“그건 그러네요.”
장목화는 위드 시티의 치안 상황에 대한 기대를 조금 더 낮췄다. 이곳의 치안은 반고 바이오 내부와는 애초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녀는 약간 화가 난 듯 보이는 국숫집 사장을 보며 화제를 전환했다.
“저 도서관을 꽤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사장이 흰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당연하지요. 애들이 책을 읽고 글을 익힐 수 있는 곳은 저곳뿐인데요.”
“위드 시티에는 학교가 없나요? 그럴 리가요.”
백새벽에게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서, 장목화는 이곳에 당연히 학교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사장은 다시 문 쪽을 내다보며 답했다.
“있기야 있죠. 근데 노스 스트리트에선 일반인은 발을 들일 수도 없어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그냥 집에서 애들 가르쳐야죠.
그나마 저희 할아버지 세대는 아는 것도 많고, 아버지는 정식 교육을 받아서 저도 겨우 애쉬랜드랑 레드리버 문자는 대부분 익혔어요.
그러니까 애들 가르치는데 책이 없어서 되겠어요? 책 없이 혼자 애들 가르쳐봤자 그 결과는 휴……, 말도 마세요.
전 제 손자가 앞으로 더 많은 글자를 익히고, 더 많은 책을 읽으면서 시청 건물에서 일하길 바랄 뿐이에요. 녀석의 아비처럼 책과 글을 멀리하다가 유적 사냥꾼인가 뭔가 돼서 결국 죽어버리지 않길 바랍니다! 그 빌어먹을 녀석들!”
사장은 다시 도서관에 불이 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는지 감정이 격해졌다.
용여홍은 곁에서 얘기를 들으며, 해자 마을처럼 오랜 시간 동안 공교육을 이어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새삼 깨달았다. 애쉬랜드에서 교육은 모두가 누리는 권리가 아니었다. 사실은 글을 읽지도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장목화는 방화범으로 추정되는 용의자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에 비로소 안도했다. 아무래도 이 사건은 우연일 가능성이 컸다.
“사장님, 근데 사장님 말투에 이곳저곳 사투리가 섞여 있네요.”
“우리 할아버지 대, 위드 시티가 막 세워졌을 무렵에 사방팔방의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각양각색의 사투리를 썼죠. 레드리버어를 쓰는 이들도 많았고요. 그런 말들을 들으며 살다 보니 자연스레 배우고 또 섞이게 됐어요.”
그때, 다시 또 손님들이 들어와서 사장은 곧바로 그들에게 향했다.
“아, 뭘 드릴까?”
장목화는 곧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다 그릇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고 있는 성건우를 보았다. 그녀도 이제야 젓가락을 잡고는 웃으며 용여홍을 쳐다봤다.
“어때, 맛있어?”
“네, 맛있어요⋯⋯. 좀⋯⋯, 맵긴 하지만.”
용여홍이 더듬더듬 답했다.
장목화도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국수를 다 비벼둬서,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붉은 기름을 흠뻑 머금은 국수는 매콤하면서도 맛있었다. 면을 씹으면 씹을수록 올라오는 밀가루 특유의 단맛과 신맛도 매콤한 소스와 잘 어우러졌으며 코끝엔 계속 파와 기름, 고추 냄새가 얼큰하게 감돌았다.
“양이 너무 적네요.”
성건우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용여홍의 호평에 동조했다.
인심이 넉넉한 팀장은 바로 반쯤 돌아서 큰소리로 외쳤다.
“사장님, 한 그릇 더 아니, 두 그릇 더요.”
사실 장목화도 한 그릇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두 그릇을 다 먹기에는 많겠지만 용여홍과 백새벽에게 나눠준다면 문제없었다.
이렇게 구조팀은 이마가 땀에 젖어 번들거릴 때까지 열심히 국수를 먹었다. 추운 겨울날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이들은 총 18드라세를 지불했다. 고추기름 국수 소자는 한 그릇에 1.5드라세, 대자는 3드라세였다. 구조팀은 대자로 총 여섯 그릇을 먹어서 값은 거의 2오레이에 달했다.
장목화는 1드라세 두 장을 거슬러 받으며 남은 지폐를 헤아렸다. 배는 든든해졌어도, 속이 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돈 쓰기는 정말 쉽구나!”
이들은 총 10오레이를 환전해놓고 한 끼 식사에 5분의 1을 탕진했다. 남은 돈으론 기껏해야 이틀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가자. 사냥꾼 길드에 들러서 배지를 받아야 해.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한다면 돈을 벌 방법을 마련해야지.”
장목화가 가장 많이 먹은 성건우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 * *
다시 거리로 나온 구조팀은 여태 그랬던 것처럼 두 조로 나뉘어 걸었다.
“두 번째는 다른 메뉴를 시켜볼 걸 그랬어요. 고기가 든 걸로요.”
성건우가 배를 문지르며 영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일단 돈부터 벌고 다음을 기약하자고.”
장목화는 먹을 생각만 하는 팀원을 타박하진 않았다. 성건우가 이토록 먹을 것에 목을 매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구조팀은 위드 시티까지 아주 먼 길을 돌아왔고 남은 음식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선 무엇보다 생존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물론 정보요원과 연락이 닿는다면 다른 물자 공급로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오후가 되니, 위드 시티 거리에 내리쬐던 태양은 한결 힘이 꺾여 있었다.
휘이이-
이젠 바람도 사람들의 옷깃을 파고들어서, 대부분은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외출을 삼가는 분위기였다.
기관단총을 든 위드 시티 순찰대와 먹을 것을 찾느라 바쁜 유적 사냥꾼들 외엔 거의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한산한 고요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