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환전
곧이어 백새벽이 스카프를 잡아당기며 경고했다.
“권총 잘 숨겨. 위드 시티에 좀 기이한 금지령이 하나 있어. 순찰대에게 무기를 들키면 안 돼.”
그러나 총포사에 있는 무기는 상관없었다.
용여홍이 되물었다.
“총기 소지가 금지된 건 아니지만, 순찰대에게 들키면 안 된다고?”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처음 들키면 무기를 압수하고, 다시 들키면 한 달간 가둬. 세 번째로 들키면 석 달 동안 가둬놨다가 도시 밖으로 쫓아내고. 거기에다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선포하는데, 그럼 사냥꾼 길드의 신용 점수도 깎여.”
“이상하네. 차라리 그냥 금지해 버리지?”
용여홍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반고 바이오 내부에서는 총기 소지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나도 그 이유는 모르겠네.”
백새벽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후,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이상한 금지령이 있는 곳이 꽤 많아. 그런 금지령에는 보통 역사와 깊이 관련된 이유가 있어.”
“그럼 위드 시티에 이런 금지령이 있는 이유는 뭐죠?”
다시 이어진 용여홍의 물음에, 장목화가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나도 모르지. 나중에라도 그 답을 알아낼 수 있길 바라는 수밖에. 그런 발견도 나름의 즐거움이니까.”
사실 그녀는 어느 정도 추측을 하고 있기는 했다. 그 추측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 이야기하지 못할 뿐이었다.
이내 장목화가 배를 문지르는 성건우를 보고는 픽 웃었다.
“가자, 밥 먹으러.”
성건우는 재깍 몸을 틀어 어둡고 서늘한 복도를 따라 층계참으로 향했다.
* * *
차를 세워놓은 뜰에 내려오자, 백새벽이 지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화폐로 바꿀 물건들을 좀 가져가야 해.”
“어떻게 바꿔?”
용여홍은 언제나처럼 모르는 건 바로 물어봤다. 훌륭한 학생의 자세였다.
“시청 건물에 환전 창구가 한 줄로 나란히 놓여 있어. 거기서 물건들을 이곳 돈으로 바꿔줘.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문제가 두렵지 않고, 여기 잘 아는 지인이 있다면 사냥꾼 길드나 술집, 찻집, 나이트클럽 지하 시장에서 바꿔도 돼. 사실 공식적인 환전 창구보다 그쪽이 더 환율이 좋으니까.
위드 시티는 퍼스트 시티의 세력 범위 안에 속해 있어서 명목상 모든 거래는 그들의 화폐로만 이뤄져.”
백새벽이 간단히 설명했다.
“그렇구나.”
용여홍은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에 기대감이 생겼다. 그로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일들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환전 창구로 가자. 회사 정보요원과 연락이 닿기 전까지는 이곳 지하 세력과는 접촉하지 않는 게 나아.”
백새벽은 별 대꾸 없이 남은 통조림과 에너지 바, 압축 비스킷을 가리켰다.
“얼마나 가져갈까요?”
“얼마나 가져가는 게 좋겠어?”
장목화는 항상 경험자의 판단을 존중했다.
백새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반 정도만 가져가죠. 여기 화폐 가치는 수시로 파동이 일거든요. 물자를 최대한 남겨두는 편이 안전해요.”
“파동이 인다고?”
용여홍이 호기심을 표했다.
백새벽은 또 바로 설명해주었다.
“응, 퍼스트 시티 화폐 중 액면가가 가장 작은 건 카스, 그다음은 드레이스, 가장 큰 건 오레이야. 일반적으로 회사 공헌 점수 1점은 2스, 1세는 10스, 1레이는 10세야. 보통 1레이로는 돼지고기 한 근을 살 수 있는데, 때에 따라 반 근밖에 못 살 때도 있고, 한 근보다 좀 더 살 수 있을 때도 있어.”
카스, 드라세, 오레이는 모두 레드리버 단어로, 퍼스트 시티가 건립됐을 당시 그곳의 몇몇 지도자 이름에서 따온 단위였다. 거기에 1스, 1세, 1레이는 애쉬랜드어로 간략화해서 부르는 방법이었다.
위드 시티의 공식적인 표준어는 레드리버어였지만, 일반 주민들은 주로 애쉬랜드어를 쓰고 있었다.
“그럼 때에 따라 그런 차이를 통해 이득을 볼 수도 있다는 거잖아?”
용여홍이 물었다.
이번엔 장목화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맞아. 구세계에선 그것도 전문적인 업종이었어. 근데 지금은 그렇게 이득을 얻어도 소용이 없지. 그것만으로 벌어먹다간 총으로 즉결 처분될 테니까.”
“총이 아니라 대포일걸요.”
백새벽이 호응했다.
이는 퍼스트 시티가 그런 짓을 하는 이들에게 내리는 처벌이었다. 그들은 죄인 여러 명을 대포 한 방으로 처형하곤 했다.
“……헉.”
놀란 용여홍이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순간 싸늘한 공기가 기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꼬르륵…….
고요한 분위기를 뚫고, 누군가가 자신의 허기를 알렸다. 장목화도 피식 웃음이 났다. 성건우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누구 배 속에서 보낸 신호인지 짐작이 갔다.
곧이어 장목화가 웃으며 바깥을 가리켰다.
“물건 챙기자!”
백새벽은 우선 화폐로 바꿀 통조림, 에너지 바, 압축 비스킷을 아무 표지도 없는 종이 상자에 담아 성건우에게 건넸다.
그런 뒤, 백새벽은 다시 텐트 천을 펼쳐 오렌지 소총,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 폭군 유탄발사기, 사신 바주카포, 각종 탄약, 구급함과 남은 물자를 가렸다. 누군가가 차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더라도 가치 있는 물건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대비한 것이었다.
그녀의 행동에 장목화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도 분명한 칭찬의 빛이 어려 있었다.
이윽고 트렁크 정리를 마친 백새벽은 다시 또 의아한 표정을 한 용여홍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재차 군말 없이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큰 도둑을 피하기는 쉽지만, 작은 도둑에 대비하긴 어렵다고 했어. 남이 이모가 있는 여기는 그다지 질서가 있는 곳은 아니거든.”
질서가 지나치게 잘 잡힌 곳이면 외부인도 눈에 확 띄기 마련이었다.
장목화가 웃으며 덧붙였다.
“이따 돌아오면 물건 일부는 가지고 올라가서 각자가 지키자. 그편이 가장 안전할 거야.”
그녀는 2층에서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지프를 지켜보자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일에 휘말릴지 모르는 상황이니만큼 기력을 보충해두는 것도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며칠 연달아 잠을 설치면 스스로 정신이 멀쩡하다고 여겨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봉착하면 반 박자, 심지어는 한 박자 늦게 반응하게 될 때가 있었다. 인간은 착각의 동물이 아니던가. 자신을 인지하는 것에 있어선 더욱 그랬다.
용여홍은 이해를 한 건지 아닌지,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종이 상자를 안고 윤복 총포사에 딸린 뜰의 출구로 향하는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 * *
위드 시티의 골목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다. 주위 건물들 높이도 족히 수십 미터에 달했다. 그래서 이런 겨울이면 한낮에야 겨우 햇살이 몰려와 음침함을 몰아내곤 했다.
골목길을 나와 큰 거리에 이르니, 햇빛이 더 강렬해졌다. 따뜻한 빛이 있어 겨울바람도 그렇게 날카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때, 장목화가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둘이 한 조를 이뤄서 약간 거리를 두고 걷자. 네 명이 함께 움직이는 건 지나치게 눈에 띄는 것 같아.”
긴 설명 없이도 단박에 그 뜻을 알아차린 백새벽이 용여홍을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갔다. 곧 그들과 거리는 5~6미터 정도로 벌어졌다.
용여홍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공용 식당이 없어? 국숫집이랑 레스토랑에 사람들이 많네.”
이는 그가 생각하는 황야유랑자 거점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그보단 해자 마을이나 하비스트 타운이 그의 상상과 훨씬 더 가까웠다.
“대부분은 유적 사냥꾼들이야.”
백새벽은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설명했다.
용여홍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위드 시티가 3대 대형 세력 경계에 자리한 물자 교환의 중심이라, 매일 꽤 많은 사람이 오가며 겨울에만 조금 조용할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이 지금 질문한 것과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를 힐끔 보던 백새벽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말을 이었다.
“외부인 대부분은 위드 시티에 오래 머무르지 않아. 기껏해야 2주 정도? 그동안 다들 여관이나 단기 셋방에 살아서 밥을 해 먹을 공간이 없어.”
“그렇구나⋯⋯.”
용여홍도 그제야 백새벽의 답을 이해했다. 이는 반고 바이오 내부에서는 절대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다른 층에 있는 친척이나 친구를 만나러 가더라도 금방 집으로 돌아오거나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서, 지하 빌딩에 여관이나 단기 셋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이, 장목화가 속도를 높여 백새벽, 용여홍과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녀는 꼭 길을 묻는 여행자처럼 낯선 태도를 보였다.
“저녁이 되면 이쪽 골목길에 사람이 더 많아지나요?”
그녀는 사우스 스트리트 노예 시장의 맞은편 골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백새벽은 잠시 기억을 되새겨보다가 답했다.
“겨울철 저녁이면, 웨스트 스트리트를 제외한 나머지 구역의 거리에서는 사람들을 보긴 힘들죠.”
“고맙습니다.”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한 장목화는 곧 성건우의 곁으로 돌아갔다.
“팀장님 연기력 대단하네⋯⋯.”
용여홍이 감탄했다.
반면, 백새벽은 아무 대꾸도 없이 계속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위드 시티의 다른 곳에 비해 이 중앙 광장은 굉장히 넓었다. 바닥도 손을 본 듯 매우 평탄했다.
그리고 광장 중앙에는 돌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한 손에는 총을,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든 노인의 조각상이었다.
갸름한 얼굴의 노인은 거동이 좀 불편해 보이는 후드 달린 가운을 걸친 채, 눈언저리가 움푹 팬 눈으로 전방을 오가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자가 바로 그 사생아 허영덕이야?”
용여홍이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맞아. 사실 가장 정확한 칭호는 위드 시티 총독이지만, 다들 저 사람을 성주라고 불러. 음, 퍼스트 시티를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세리라는 칭호도 있고. 환전 창구도 그 아래에 속해 있어.”
백새벽은 석상을 빙 돌아 북쪽 시청 건물로 나아갔다.
용여홍은 세리는 또 무엇인지 묻고 싶었으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미 너무 많은 질문을 한 것 같아, 이 질문은 다음으로 미뤄두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백새벽과 용여홍은 시청 앞에 이르렀다.
4층짜리 황갈색 건물 앞엔 화단이 꾸며져 있었고, 1층엔 창구가 열 개 정도 열려 있었다. 창구 모두에 이미 상당한 사람들이 줄을 선 상태였다.
백새벽은 용여홍을 데리고 가장 짧은 줄에 섰다.
“왼쪽에 있는 일곱 개의 창구가 바로 환전 창구야. 앞쪽 칠판에 각각 물건에 대한 오늘 환전가가 적혀 있어. 저기 적히지 않은 물자는 교환할 수 없고.”
용여홍은 불쑥 걱정이 앞섰다.
“우리 것은 문제없겠지?”
“식량을 거절하는 세력은 없어.”
백새벽은 매우 단호했다.
사실 이들처럼 식량을 가지고 환전을 하려는 이는 소수 중에서도 소수였다. 위드 시티에 온 사람들은 다른 물건을 가지고 이곳에 비축된 식량을 구매하려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거래를 진행하려면 일단 퍼스트 시티 화폐로 교환하는 게 우선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용여홍이 질문을 이어나갔다.
“만약 교환해 줄 수 없다는 물건이 있으면 어떡해? 지하 시장으로 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면서 판로를 찾거나, 약간의 물자를 들여 공식 시장에 좌판을 펼쳐야겠지. 이러나저러나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야 하는 방법이야. 여기 몇 차례 방문하면서 비교적 익숙해지면 각 물자의 주요 구매자와 안면을 트기 마련이니, 그들과 직접 거래를 할 수도 있고.”
백새벽은 대답을 하면서도 장목화, 성건우와의 거리를 확인하려는 듯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장목화가 손을 오므리면서 턱짓으로 백새벽, 용여홍 쪽을 가리켰다.
“건우 넌 저쪽으로 가서 줄 서 있어. 난 저쪽 공공 도서관 좀 둘러볼게.”
광장 우측에 입구가 여러 개인 흰색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중 한 입구에 바로 위드 시티 공공 도서관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이것도 석상이 세워질 정도로 위대한 성주, 허영덕의 업적 중 하나였다. 석상의 한 손에 총이, 다른 한 손에 책이 들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성건우는 장목화를 힐긋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용여홍 쪽으로 다가갔다. 장목화는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숨결은 곧 허공 속 하얀 연기로 흩어져 사라졌다. 장목화는 만족스럽다는 듯 도서관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