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남이 이모
그렇게 플린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차량 행렬은 이스트 스트리트에 진입해 어느 호텔 앞에 이르렀다.
[메리 호텔]
호텔의 이름이었다. 이 간판 아래, 건물 3, 4, 5층, 1층 점포 세 칸이 메리 호텔인 듯했다.
메리 호텔 옆 골목길 안쪽에는 철제 울타리 대문 너머 텅 빈 정원이 자리해 있었다. 그곳이 바로 호텔에 딸린 주차장이었다.
고향 상인단 차량 행렬은 아주 능숙하게 그 주차장으로 향했다.
“또 왔나?”
주차장 부스에서 한 중년 남자가 나왔다. 양문형 대문을 열고, 웃는 낯으로 반기는 남자는 과피모(*瓜皮帽: 중국 전통 모자)를 쓰고 국방색의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래도 겨울바람이 으슬으슬한 까닭에 양손을 비비며 몸을 살짝 떨고 있었다.
“자네 딸 보고 싶어서 왔지!”
선두에서 차량 행렬을 이끌던 무근자가 농담하며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백새벽은 주차장에 들어가지 않고 거리에 잠시 정차했다. 그러자 플린이 매우 서운하다는 얼굴로 한껏 아쉬움을 드러냈다.
“자네들이 묵을 곳은 따로 알아서 찾으려고?”
“네, 단장님께 계속 신세 질 순 없잖아요. 저희 일에 상인단을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고요.”
장목화가 솔직하게 답했다.
“뭘 그렇게 두려워해. 나랑 우리 건우는 형제인데!”
플린이 성건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형제라서 끌어들일 수 없는 겁니다.”
성건우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진지한 눈으로 플린과 눈을 맞췄다.
끝내 플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조심들 해. 무슨 일이 있거든 언제든 날 찾아오고. 우리는 여기서 며칠 머무를 테니까. 휴, 상황이 점차 또렷해지네. 귀족 영감들과 장원 주인들도 식량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을 거야.”
곧이어 차에서 내린 그가 성건우의 두 손을 꼭 잡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꼭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
“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성건우도 맞잡은 손을 흔들며 호응했다.
* * *
플린과의 작별 후, 백새벽이 다시 앞쪽으로 차를 몰았다.
마침내 용여홍은 한참이나 꾹 참았던 질문을 뱉었다.
“이제 어디로 가죠?”
그에 장목화가 턱짓으로 백새벽을 가리켰다.
“우리 작은 흰둥이가 알아서 하게 두자고.”
순간 백새벽의 미간이 팩 구겨졌다.
“⋯⋯팀장님, 왜 별명을 붙이고 그러세요?”
장목화가 웃었다.
“우리 같은 팀, 같은 동료, 같은 식군데 그냥 이름만 부르는 건 너무 정 없잖아. 그럼 너도 날 그냥 커다란 흰둥이라고 부르든가.”
순간 성건우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정말 유치하시네요.”
장목화는 그대로 왼손만 들어 뒷자리 성건우에게로 휘둘렀다. 그 손에서는 가느다란 전류가 살짝 흐르고 있었다.
백새벽은 아무 말 없이 이스트 스트리트 끝까지 가서, 성벽을 따라 난 길을 타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장목화는 성건우가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곤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묵을 곳을 찾으면 점심부터 먹고 약속된 방식에 따라 회사 정보요원과 연락해보자. 그 사람이랑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거야. 그리고 비밀스럽게 관찰해 그 정보요원에게 아무 문제도 없고, 미행도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그때 건우가 나서서 그 사람이랑 친구가 되는 거야.”
* * *
지프는 사우스 스트리트 골목길로 접어들어 죽, 이어진 집 앞에 섰다.
용여홍은 고개를 들고 밖을 한번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한 간판이었다.
[윤복 총포사]
간판 아래, 흰색 타일이 심각하게 파손된 벽 위에는 누군가 검은색 펜으로 써둔 글씨도 보였다.
「망가진 권총, 소총, 기관단총 삽니다.」
“여기, 총을 수리할 수도 있어?”
용여홍이 백새벽에게 물었다. 그가 말하는 건 간단한 수리가 아니었다.
“그런 일로 먹고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가게를 열지도 않았겠지. 게다가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총기라도, 진짜 망가진 건 아니거나 심각한 수준으로 망가진 건 아닐 때도 있거든.”
백새벽이 문을 열면서 대답했다.
바깥으로 나가니 곧장 싸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백새벽은 저도 모르게 목에 두른 회색 스카프에 손이 갔다.
그녀가 스카프를 잡아당기던 사이, 장목화도 추측을 덧붙였다.
“그저 그 총을 팔려는 사람이 잘 모를 뿐인 거지.”
“그게 바로 가장 돈 되는 부분이죠.”
간단히 호응한 백새벽은 차 문을 닫고, 윤복 총포사로 다가갔다.
“돈?”
용여홍은 돈이라는 게 뭔지 배우기만 했을 뿐, 현실에서 돈을 본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성건우가 오수혁의 주머니에서 찾았던 구세계 동전, 그게 전부였다.
이내 장목화가 유리창 너머 바깥을 내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긴 대형 세력의 일부이니 돈의 흐름이 생길 수밖에 없어. 내부로 국한되기는 하겠지만. 사실 회사 공헌 점수도 본질적으론 돈이랑 같아. 일반 등가물 개념은 잊어버린 거야?”
용여홍은 몇 초간 생각하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안 배웠는데⋯⋯.”
말문이 막힌 장목화는 잠시 후에야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돌아가면 너희들한테 책 몇 권 줄게. 한 번 봐. 회사 내부에서 생활할 땐 아무 필요도 없지만, 우린 수시로 애쉬랜드로 나오니까 많은 걸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많은 것에 통달하면 구조팀에서 다른 곳으로 전출되기도 쉬워질 거야. 심지어 대외 무역을 담당하는 부서로 옮겨질지도 몰라.”
“네.”
용여홍의 눈빛이 밝아졌다.
물론 앞으로 반년간은 꼼짝없이 구조팀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중에 있을 전출을 위해서라도 장래는 잘 대비해두는 게 좋았다. 안 그럼 이렇게 수입이 짭짤한 직위에 있다가 수입이 적은 곳으로 옮겨지면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앞으로 자신은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장목화는 순간 의심스러운 얼굴로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그가 조용할수록 또 무슨 모략을 세우고 있진 않을지 겁이 났다.
“넌 왜 아무 말도 안 해?”
성건우는 침착하게 배를 문지르며 답했다.
“힘을 아끼려고요.”
“그래⋯⋯.”
장목화도 배가 고팠다. 벌써 점심시간은 한참 지난 때였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 백새벽이 윤복 총포사를 나와 지프로 돌아왔다. 그녀의 뒤론 낡은 바람막이를 입은 젊은 남자 한 명이 따르고 있었다.
그가 곧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우뚝 서있는 철책 대문을 열어주었다. 총포사가 자리한 건물 뒤쪽으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그곳엔 여러 건물로 둘러싸인 네모난 마당이 자리해 있었다. 바닥은 회백색 벽돌로 깔려 있었으나, 곳곳이 망가지고 깨져 빗물이 고인 상태였다.
백새벽은 지프를 댈만한 곳을 찾고선, 차 문을 열었다.
“여기예요.”
장목화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면서 마당에 난 출구 네 개를 머릿속에 꼼꼼하게 새겨두었다.
* * *
구조팀은 백새벽을 따라 윤복 총포사 뒷문으로 들어갔다.
축축하고 서늘한 회백색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니, 30대 정도로 보이는 한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암적색 솜옷을 입고서 짙은 색 스카프를 두른 여자는 검은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린 모습이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의 그녀는 이목구비가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니었지만, 말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깊은 매력이 느껴졌다.
“남이 이모.”
백새벽은 그녀를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남이 이모라 불린 여자는 구조팀원들을 한번 훑어보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으며 2층 복도 끝을 가리켰다.
“가장 안쪽 방 두 개에 묵으면 돼.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마당이나 거리로 뛰어내릴 수 있거든. 키는 문에 꽂혀 있어.”
“감사합니다.”
장목화는 남이 이모의 목에 걸린 스카프를 눈여겨보며 웃었다.
이내 남이 이모가 씩 웃었다.
“공짜는 아니고. 방 두 개당 매일 500그램짜리 군용 통조림 하나씩. 정산은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정 안 되면 이 녀석들한테 일이라도 시켜 값을 치를게요.”
장목화는 성건우, 용여홍을 가리키며 경쾌하게 답했다.
곧 남이 이모가 미소를 지었다.
“위드 시티는 유적 사냥꾼들 경쟁이 아주 치열한 편이에요. 심지어 가끔 다른 사람들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배달해주는 임무까지 맡기도 하죠.”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덧붙였다.
“화장실이랑 욕실은 반대편에 있어요. 저쪽으로 가면 바로 보여. 냉수로 씻고 싶지 않다면 낮 12시에서 12시 반, 저녁 6시 반에서 7시 사이를 노리는 게 좋아요. 그 시간은 밥하는 때라 뜨거운 물이 충분하거든. 욕실에서 직접 끌어쓸 수 있어. 하하, 뭐든 최대한 아껴야 하잖아요.
근데 그 시간을 놓치면 알아서 물을 온수기에 넣고 전기로 끓인 후에 냉수랑 섞어 써야 해. 지금은 겨울이라 물이 넉넉하지도 않아요. 생활 구역에 전기가 공급되는 것도 하루에 5시간, 낮 11시 반부터 1시 반까지, 저녁 5시 반에서 8시 반까지로 제한돼 있으니까 알아서들 잘 챙겨요.”
구조팀 누구도 이 말에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본래 반고 바이오 내부의 에너지 공급은 이곳보다 더 엄격한 배급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만약 저희가 알아서 물을 데워 쓰려고 하면 따로 비용이 필요한가요?”
장목화가 물었다. 백새벽은 먼저 입을 여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흥정은 그녀의 몫이었다.
남이 이모는 백새벽을 힐긋 바라보았다.
“네 번에 통조림 하나. 식사를 원한다면 미리 말해주고.”
세부 사항까지 확인을 마친 뒤, 구조팀은 남이 이모와 인사를 하고는 방으로 다가갔다.
* * *
그들은 양 끝에만 조명이 달린 서늘한 복도를 따라 묵을 방에 도착했다. 방 두 개는 서로 마주 보고 있었고, 암적색 문은 약간 망가진 흔적이 있어 상당히 오래되어 보였다.
방 구조는 똑같았다. 벙커 침대 하나, 창문 앞에 놓인 책상 하나, 좀먹은 나무 옷장 하나, 사각형 스툴 두 개. 단출했다.
또한 이곳 기후와 환경 문제로 인해 공기는 약간 축축했으며, 한기는 옷을 뚫고 들어와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로 매서웠다.
곧이어 장목화가 방에 꽂힌 황동색 열쇠를 뽑아 들며 말했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랑 건우가 한 방, 너희 둘이 같은 방을 쓰자.”
장목화는 성건우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며 말썽부리지 않게 직접 감시해야 했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그는 깊은 밤 중에 스피커를 켜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거리의 동정을 듣고서 곧장 창밖으로 뛰어들 게 분명했다. 백새벽에게는 그런 성건우를 다룰 재간이 없었다.
이내 장목화는 성건우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자 손목시계를 살폈다. 그녀는 평소 기계식 손목시계보다 전자 손목시계를 훨씬 더 좋아했다. 전자 손목시계에 더 많은 기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12시 반까지 아직 10분 남았네. 다들 최대한 시간을 아껴서 샤워하고 환복하자. 그다음에 다 같이 나가서 밥 먹고 정보요원과 연락하는 거야.”
구조팀원은 모두 훈련이 잘돼 있었다. 각자 2분 만에 샤워를 마친 이들은 평범한 유적 사냥꾼, 혹은 위드 시티 사람처럼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성건우는 짙은 파란색 짧은 다운재킷을 입었다. 약간 오래됐으나 천이 그렇게까지 쪼글쪼글하지는 않았다. 하의는 파란색 리넨으로 만든 약간 두꺼운 바지로, 움직이기 아주 편한 옷이었다.
용여홍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검은 솜옷을 입었고, 장목화도 그와 같았다. 백새벽은 허리띠를 딱 가리는 회색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바지도 성건우가 입은 것과 거의 비슷했다. 남자들은 거기에다 갈색 앵클부츠를, 여자들은 검은색 단화를 신었다.
이는 회사에서 겨울 동안 지상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직원들에게 복지정책으로 제공해준 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