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26화 (126/649)

126화. 위드 시티 (2)

플린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차량 행렬은 위드 시티 성문에 도착했다.

이곳은 약간 밀려 있어서 지프가 나아가는 속도도 매우 느릿해졌다.

용여홍은 차창을 내리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성문 앞에는 한 무리가 모여 있었다. 다들 남루하거나 오래된 옷차림에, 겨울 찬 바람을 맞아서인지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으며 입술은 새파랬다.

대부분은 젊은 사람들이고, 그다음으로 많은 건 아이들이었다. 그 속에 노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다들 하나같이 멍하고 뻣뻣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저 정처 없이 기계적으로 줄을 따라 앞으로 이동하고만 있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죠?”

용여홍이 다시 똑바로 앉으며 물었다.

플린은 몸을 반쯤 일으켜 성문 쪽을 살피다, 다시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겨울을 날 식량이 없는 황야유랑자들이야. 위드 시티에라도 찾아와 운을 시험해보려는 거지.”

“이곳에서 직업을 찾을 수 있나요?”

용여홍은 참 지극히도 회사 직원다운 질문을 했다.

그 말에 플린이 자조하듯 웃었다.

“운이 가장 좋은 자라면 사냥꾼 길드에 직계 자손으로 수용되거나 팔리고, 다음으로 운이 좋다면 귀족 영감들 눈에 들어 노예가 돼. 운이 좀 나쁘면 주위에 있는 각 장원에 끌려가 농노로 살게 될 거고. 그리고 운이 심하게 나쁘면 몸을 파는 곳에 팔려 가. 운이 정말 지지리도 없는 자는 광부가 되고⋯⋯.”

지프차 안은 극도로 고요해졌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용여홍도 지프차가 조금씩 그들을 추월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용여홍은 멀어지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친구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해 보였다.

마침내 장목화가 이 적막을 먼저 깼다.

“귀족⋯⋯.”

그녀는 비웃음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퍼스트 시티에서 배운 거 아니겠어? 어쨌든 여기도 퍼스트 시티 일부니.”

플린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저 사람들은 왜 문 앞에 줄을 서 있는 거죠?”

용여홍이 애써 마음을 정리한 뒤 물었다. 그는 위드 시티는 비교적 개방적이라 입장료를 받지도 않는다고 했던 백새벽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유랑자 중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섞여 있을지 누가 알겠어? 그러니 필수적으로 기본적인 검사는 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자칫 잘못했다가는 도시 안의 모두가 끝장난다고.”

플린은 이러한 절차에 매우 익숙한 듯 보였다.

용여홍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음, 근데 왜 노인은 보이지 않는 거⋯⋯.”

말을 채 끝맺기도 전, 용여홍은 순간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알겠다.”

이렇게 추운 겨울,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선 나이가 조금만 많아도 위드 시티까지 오긴 힘들었다. 차라리 삶을 포기하고 자신이 가진 자원을 후대에게 넘기는 편이 나았다. 심지어는 그 시체까지도…….

상황을 깨닫자, 용여홍은 더 깊은 슬픔에 잠겼다.

플린은 곁에서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이야기했다.

“얼른 익숙해지라고. 이게 바로 애쉬랜드야. 첫눈이 오면 상황은 더 나빠져. 들리는 말에 검은 늪 황야 저쪽에는 이미 눈이 왔다던데⋯⋯.”

플린의 시선은 북쪽 어딘가에 닿아있었다.

“폭설⋯⋯.”

운전 중이던 백새벽도 뭔가 기억이 떠오른 듯 중얼거렸다.

이번엔 장목화가 그녀에게 위로를 건네왔다.

“그래도 해자 마을은 더 이상 눈 때문에 걱정 안 해도 되니 다행이야.”

* * *

느릿하게 앞으로 나아가던 끝에, 차량 행렬도 마침내 검사를 통과했다.

드디어 위드 시티로 입성할 수 있었다.

용여홍은 다시 무의식적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푸른색과 회백색의 벽돌이 깔린 길은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차 두 대만 간신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길가에 있는 건물들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기껏해야 5층 정도였으며, 지붕 양식도 고전적이었다. 그리고 1층엔 점포들이 자리해 있기도 했다. 그때 그 검은 늪 안쪽에 있던, 새롭게 발견된 도시와 꽤 닮은 모습이었다.

[원조 국숫집]

[수희 분식]

[장기영 식용유]

[퍼스트 시티 사무소]

[슈팅 PC방]

이곳도 그 도시처럼 간판이 달려 있었다. 길가 전신주에는 ‘난치병 치료 전문’ 등이 적힌 흰 종이들이 붙어 있기도 했고, 레스토랑, 클럽, 빵 등 레드리버 문자가 적힌 간판들도 적잖게 보였다.

용여홍은 이제야 위드 시티가 퍼스트 시티의 일부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길을 걷는 사람 중에 검은 머리, 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다들 머리나 눈동자 색이 금색, 갈색, 파랑, 초록 등으로 다양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겨울이라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상당히 활기가 넘쳐 보이네요.”

용여홍이 중얼거렸다.

플린은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지. 두 달 전에 왔으면 차가 다니지도 못했을걸. 이 길도 원래는 차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야. 좁아서 막히기가 쉽거든.”

“그렇구나⋯⋯.”

용여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건우처럼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전신주 하나하나에 각종 전선이 불규칙적으로 뻗어있어 매우 난잡해 보였다. 선 한 가닥, 한 가닥이 꼭 하늘을 가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차가 계속 앞으로 이동하자 풍경은 꾸준히 달라졌고, 용여홍은 간판을 또 하나 발견했다.

[사우스 스트리트 노예 시장]

용여홍은 순간 침묵에 빠졌다.

플린은 용여홍의 침묵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해서 소개했다.

“위드 시티는 별로 크지 않아서 배치가 아주 간단해. 거리가 동서남북 네 개로 나뉘어 있고 각각 거리에는 골목 몇 개가 붙어 있는데, 그런 골목엔 차 한 대만 겨우 다닐 수 있지.

사우스 스트리트는 주로 시장이야. 맞는 사람을 찾기만 한다면 각양각색의 물건을 구할 수 있지. 파라다이스 아일랜드산 대마는 물론이고⋯⋯.”

플린은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화제를 돌렸다.

“이스트 스트리트엔 주로 여관, 호텔, 창고, 주차장, 웨스트 스트리트는 사냥꾼 길드, 술집, 찻집, 찜질방, 나이트클럽 등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어.

노스 스트리트로 가려면 일단 중앙 광장과 시청 건물을 지나쳐야 해. 그곳을 지나치면 다리 하나를 마주치게 돼. 다리가 별로 크진 않은데, 완전히 무장한 경비대원 스무 명이 지키고 있어. 노스 스트리트는 귀족 영감들, 장원들 주인들, 부유한 상인들이 사는 곳이거든. 성주도 그곳에 살고.”

구조팀은 이러한 것들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앞서 백새벽에게 모두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래도 다들 플린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세세한 정보 한 가지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 * *

차량 행렬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말없이 차창 밖을 보던 플린이 잠시 뭔가 생각하다가 다시금 운을 뗐다.

“자네들 근데 사냥꾼 배지는 있나?”

“아뇨.”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장목화, 용여홍도 연이어 고개를 저었지만, 백새벽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플린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기회가 있거든 유적 사냥꾼으로 등록해둬. 다른 곳이라면 괜찮겠지만, 위드 시티 안에서는 사냥꾼 배지가 없다면 좀 불편할 거야.”

“이곳이 이미 사냥꾼 길드가 관장하는 곳으로 바뀌었나요?”

장목화도 이 제안의 의미를 알았다. 그녀는 위드 시티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었고, 백새벽 역시 이곳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플린은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그런 셈이지. 위드 시티가 건립되던 그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그가 웃으며 묻자, 운전하던 백새벽이 먼저 반응했다.

“몰라요.”

백새벽은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황야유랑자였다. 그녀가 파악한 위드 시티에 관한 정보는 대부분 지금 당장 쓸모가 있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곳의 역사에까지 관심을 둘 여유는 없었다.

장목화는 몸을 반쯤 틀어 플린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플린이 입가의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시 운 좋게 살아남아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연스레 무장 단체를 설립했어. 한 열 개 정도 됐지. 격렬한 내부 갈등을 거친 끝에 마지막까지 남은 단체는 일곱 개였는데, 그들끼리는 서로를 어쩌지 못했어. 거기다 야수, 괴물, 무심자의 위협 때문에 계속 내부 갈등을 이어나가다가는 모두가 죽게 될 상황이었지.

이 사실을 깨닫고 그들은 의사회 하나를 세웠어. 각 단체에서 한 표씩 행사해 성주가 될 이를 투표로 뽑은 다음, 그를 선두로 외부에 대항하기로 한 거지.”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원시적인 군사 민주제였네요. 인류 문명의 순환⋯⋯.”

그녀의 한숨과 함께 용여홍도 장목화가 얘기한 단어를 속으로 되뇌었다.

‘원시적인 군사 민주제⋯⋯.’

각자 단어는 다 알고 있지만, 합쳐진 뜻을 이해하긴 힘들었다. 다 같은 반고 바이오 직원으로 똑같은 교육을 받고 자라왔는데, 팀장님은 어떻게 저런 것들까지 알고 있을까. 교과서 외 다른 책들도 많이 본 덕일까?

플린도 흠칫 놀란 눈치였다. 이렇게 학술적인 단어를 듣게 될 줄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는 각지 제도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기에, 단어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원시적이든, 원시적이지 않든, 쓸모만 있다면 상관없지. 덕분에 위드 시티는 가장 위험한 때를 무사히 넘겨 여태까지 존속해왔어. 물론 모든 내분이 완전히 제거된 건 아니고, 매번 권력 다툼이 일어날 때마다 많든 적든 피가 흘렀지만, 적어도 적정 범위 안으로 통제가 됐어.”

플린의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후에 위드 시티는 퍼스트 시티에 종속됐고, 일곱 개 무장 단체의 수령은 서서히 이 지역 대귀족이 됐어. 그들 수하는 소 귀족이 돼서 위드 시티를 에워싼 크고 작은 장원을 관장하고 있고. 의사회에도 두 글자가 더 붙어 귀족 의사회가 됐지, 하하.

그로부터 시간이 더 흐르고, 한 사생아가 자신의 노력과 가문의 자원을 바탕으로 사냥꾼 길드 현지 회장이 됐어. 사실 이 사건 자체는 별일도 아닌데, 내부 정변이 일어난 게 문제였지.

그 가문의 적장자 후손이 끊기게 되자, 가문에선 명맥을 잇기 위해 이 사생아를 가주로 삼고 귀족으로 만들었어. 가주가 된 사생아는 사냥꾼 길드에서 지위와 가문의 재산을 이용해 대대적으로 강력한 유적 사냥꾼들을 끌어들였지. 그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고.

그래, 다른 지역에선 이런 걸 용병 고용이라고도 하더군. 난 이렇게 끌어들여진 유적 사냥꾼 중에 각성자가 일부 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생각해.

아무튼 몇 차례 내부 갈등 끝에 그 사생아는 결국 성주로 선출됐고, 이후로 귀족 의사회 권리는 유명무실해졌어. 투표제도 가족 계승제로 변했고.”

“역사는 계속 반복되네요⋯⋯. 그래서 이곳에서는 사냥꾼 길드의 영향력이 강력해진 거고요.”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플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금은 성주가 대대로 사냥꾼 길드 현지 회장까지 겸하고 있어.”

“각지 사냥꾼 길드도 저마다 약간씩 변하는 모양이네요. 전혀 몰랐어요.”

장목화는 이런 정보를 알게 된 것에 퍽 만족한 것 같았다.

이때, 백새벽이 불쑥 물었다.

“그 사생아가 시청 건물 앞에 있는 석상의 모델인가요?”

플린이 웃었다.

“맞아, 허영덕. 위드 시티의 가장 위대한 성주이지. 살아있을 당시 수많은 제한을 풀어 위드 시티를 승려 황원의 무역 중심이자 가장 활력있는 도시, 더불어 농업 기반이 가장 탄탄한 도시로 만들었어. 그가 아니었다면 기후가 이상했던 올해에는 위드 시티도 식량난에서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허영덕은 성주로 선출된 후 후대를 위한 길을 닦기 위해, 퍼스트 시티의 지지를 받기 위해, 위드 시티의 중요한 산업을 적잖게 없애버리고 퍼스트 시티로부터 수입을 해오기 시작했어. 위드 시티가 퍼스트 시티에 완전히 종속돼 버린 것도 바로 그때부터야.

그래도 매해 위드 시티와 퍼스트 시티 사이를 몇 번씩 오가며 운송해주는 우리한테는 잘된 일이지.”

곳곳을 돌아다니는 상인단 단장은 이런 비밀스러운 소식에 아주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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