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22화 (122/649)

122화. 거래

한동안 이야기를 더 나눈 후, 플린이 말했다.

“이제 마셔도 좋아요.”

용여홍은 먼저 장목화를 보고, 그녀의 허락을 받고서야 한 모금 마셨다.

야생 과일로 만들었다는 이 술은 상상만큼 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과할 정도로 시고 떫지도 않았다. 풍부한 향이 코끝과 입에 감돌고, 동시에 충만한 맛이 조금씩, 조금씩 퍼져나가며 오랜 여운을 남겼다.

“그렇게 달지는 않네요.”

성건우가 미간을 살짝 구긴 채 솔직한 평가를 남겼다.

플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상인단에 있는 수많은 젊은이도 그렇게 평가했어.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에는 한 명도 빠짐없이 이 술을 몇 잔이나 비웠지. 심지어는 그보다 더 강한 술을 원하기도 했고.”

그러다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의 삶이란 참 고통스러워. 우리처럼 뿌리 없는 자들은 술을 마셔야만 잠깐의 평화를 찾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고향에 가볼 수 있지.”

플린의 얘기가 끝난 후, 장목화가 잔을 들어 보였다.

“아까는 맛만 봤어요. 지금은 단장님을 위해 건배할게요.”

나머지 팀원들도 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 나도 여러분들을 위해 건배하죠.”

플린도 웃으며 구조팀원들과 잔을 부딪쳤다.

각자 술을 한 모금 더 들이키다가, 성건우가 가만히 플린을 바라보았다.

“단장님, 보세요. 저희는 단장님께 술을 사드렸어요. 단장님께 이 야영지에는 규칙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그러니까⋯⋯.”

빙그레 웃으며 성건우를 보던 플린의 표정이 순간 열정적으로 변했다. 즉각 몸을 앞으로 쑥 내민 그가 성건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뿌리 없는 자들에게는 그게 바로 친구지!”

그 움직임 때문에 장목화는 플린의 허리춤에 채워진 검은색 리볼버 한 자루를 발견했다.

“피톤?”

장목화가 떠보듯 물었다. 바로 그 리볼버의 명칭이었다.

플린은 다시 똑바로 서서 허리춤의 리볼버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른 권총보다 훨씬 나아. 뽑아 드는 데 걸리는 시간도, 방아쇠를 당기는 데 걸리는 시간도 짧지. 적들은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이미 총에 맞고 죽어버려.”

성건우가 이미 친구를 사귀는 데 성공했음을 확인한 장목화는 이 얘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대신, 가볍게 한담하듯 물었다.

“단장님, 상인단은 겨울엔 야영지에만 있고 외부랑 거래를 안 하나요?”

플린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럴 리가. 이렇게 큰 규모의 사람들이랑 많은 차를 먹여 살리려면 거래를 안 할 수야 없지. 물론 겨울 나는 데 필요한 물자는 다 비축돼 있지만, 뜻밖의 상황에 대비도 해야 하고, 내년을 준비해야 하기도 하니까.

자네들도 봤겠지만, 상인단 사람들의 불필요한 정력을 다 써버리게 하기 위해서는 춤도 추게 해야 하고, 싸우게도 해야 하고, 술도 마시게 해. 그러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거든. 우리한테는 잉여 식량도 없어.

근데 겨울엔 멀리까지 나가진 않아. 기껏해야 부근에 구역에서만 활동하지. 차량 일부가 며칠 안에 돌아올 수 있는 그런 곳들로만 다녀.”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겨울 거래량은 확실히 적겠네요.”

플린이 동조하며 웃었다.

“눈이 오기까지 하면 도로 사정이 정말 나빠져. 사고 나기도 쉽고. 하지만 동시에 물자 보충을 필요로 하는 세력은 평소보다 더 관대해지고, 우리는 더 높은 가격을 부를 수 있지.”

‘당연한 거 아냐? 긴급 상황이니까.’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보기에 이는 진화타겁(趁火打劫), 그러나ㅣ까 불난 틈에 도둑질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위험하겠어요. 자칫 잘못하면 총싸움으로 번질지도 모르니까요.”

플린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 뒤 화제를 전환했다.

“뭔가 거래를 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 같은데? 친구가 된 기념으로 값을 좀 깎아주도록 하지.”

장목화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위드 시티로 보내고 싶은 물건이 좀 있거든요.”

“어떤 물건?”

플린이 물었다.

장목화는 자신과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을 가리켰다.

“저희 넷이요.”

플린은 이들을 몇 초간 자세히 응시하더니 술잔을 꺾으며 말했다.

“문제없지. 친구의 일은 곧 우리의 일이니까.”

플린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성건우를 꼭 의형제 대하듯 했다.

이때,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요. 저희 차를 새롭게 칠하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까요?”

플린은 바로 눈을 반짝이며 짙은 관심을 드러냈다.

“그런 일이야 우리가 전문이지! 야영지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염색을 좋아하는지 아나? 수시로 차 옷을 갈아 입혀주기 때문이야. 그게 꽤 트렌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어떤 차야? 지금은 무슨 색인데?”

“녹회색 4인승 지프예요.”

장목화의 간단한 소개에, 플린이 잠시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날이 밝거든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한번 보고 계획을 잡도록 하지. 자네들을 어떻게 위드 시티로 보낼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할지, 그런 얘기도 그때 나누자고. 계산은 그때 한꺼번에 하는 게 좋겠네. 자네들에게 충분한 양의 통조림이 있길 바라.”

플린은 아무래도 지금 당장 일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이를 눈치챈 장목화가 웃으며 성건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통조림으로 부족하다면 이 녀석을 드릴게요!”

그러자 플린이 피식 웃었다.

“안될 것도 없지. 안 그래도 우리 형제랑 다름없는 녀석을 어떻게 하면 여기 남길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었어.”

용여홍은 잠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플린의 진도는 너무 빨랐다. 낯선 사람에서 친구가 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형제에 등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몇 분밖에 되지 않았다.

이내 장목화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단장님 딸을 이 녀석과 맺어주면 되잖아요.”

플린과 성건우는 서로 동시에 마주 보더니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되지, 안 돼. 항렬이 안 맞잖아. 삼촌이랑 조카가 어떻게 결혼해?”

성건우도 신중한 얼굴로 동조했다.

“맞아요. 형님이 어떻게 제 장인어른이 되겠어요?”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의 우정은 그새 더욱 끈끈해진 것 같았다.

웃음을 머금은 장목화는 눈동자를 살짝 굴리며 계속 잔꾀를 냈다.

“그럼 이미 세상을 떠난 형제가 남긴 부인은 없나요?”

“남은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이런 시대, 이런 환경에 어느 누가 다른 짝을 안 찾고 혼자 남아 있겠어. 게다가 우리 상인단에는 될 수 있으면 많은 아이가 필요해. 아이들은 몸이 약해서 쉽게 죽거든. 몇 년간 홀로 계신 우리 어머니가 계시긴 한데, 우리 형제에게 어머니를 맺어주면 족보가 이상해지지.”

이야기가 점차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자, 장목화는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단장님, 이곳에서는 보통 뭘 먹나요? 좀 독특한 거요.”

구조팀은 아직 저녁을 먹지 못한 상태였다.

플린은 잔에 남은 야생 과일주를 모조리 마셔버린 뒤 자조하듯 웃었다.

“우리처럼 뿌리 없는 자들에게 독특한 음식이 뭐가 있을까? 우린 각지를 돌아다니며 먹을 수 있는 거면 뭐든 가리지 않고 먹어. 하하, 상인단에 있는 요리 솜씨 좋은 사람은 어떤 음식이라도 다 척척 해내거든. 근데 최근에는 우리도 우리만의 음식을 하나 만들어냈어.”

“뭐죠?”

성건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장목화가 미처 묻기도 전에 그는 벌써 기대가 잔뜩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플린이 곧 창밖에서 번쩍이는 알록달록한 불빛을 바라보며 답했다.

“여러 황야유랑자 거점에 비하면 우리는 뿌리 없이 어디로든 돌아다니는 존재지만, 사업 수완은 꽤 훌륭한 편이야. 보통은 식량이 어느 정도 보장돼있고 그 종류 역시 매우 다양해.

황야나 산간 도로를 돌아다니다 보면 여정 끝에 이르러서는 각양각색의 음식이 조금씩 남기 마련이지. 정말 난감한 상황이야. 메인 요리로 내놓기에는 고작 한두 입 정도밖에 안 남아서 그럴 수도 없으니까.

일을 줄이기 위해 우리 아버지 세대에서는 그것들을 전부 모아 한꺼번에 끓여 먹기 시작했어. 맛은 그렇게 좋다고 할 순 없는데, 그렇게 끔찍하지도 않았지. 그 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하다 보니 그 조리법도 발전됐어. 지금은 맛도 아주 훌륭해. 우린 그걸 잡탕이라고 불러.”

장목화도 다양한 지역의 풍습을 유난히 좋아해서 흥미를 보였다.

“그거 4인분 주세요! 대자로!”

그녀는 덥석 주문을 마친 후에야 용여홍과 백새벽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도 먹어보고 싶지?”

“네, 네.”

용여홍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지금 에너지 바, 압축 비스킷, 군용 통조림만 아니면 뭐든 괜찮았다.

“저는 대자는 다 못 먹을 것 같은데요.”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나도 다 못 먹으면 건우도 있잖아!”

장목화는 마치 애완돼지라도 키우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 팀원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었다.

최근 성건우는 잠든 시간 동안 기원의 바다를 돌아다니며 두 번째 섬을 찾고 있었기에 소모하는 에너지가 많았다. 그녀도 이를 알고 있어서 성건우에게 기력을 보충할 음식을 많이 주려는 것이었다.

“대자 4인분이면 통조림 두 개야. 많이 깎아줬다?”

플린은 가격을 말하며 진심 어린 눈으로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맛있기만 하면 돼요.”

성건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거야 네 입맛에 달린 거지.”

플린은 곧 유백색 카운터를 빙 돌아 주방으로 갔다.

인덕션 위에 알루미늄 냄비가 한창 끓고 있었다. 플린은 그 걸쭉한 뭔가를 큼지막한 그릇 네 개에 덜어낸 다음, 주황색 플라스틱 쟁반에 받쳐 내왔다.

구조팀도 이제야 잡탕을 마주했다. 색은 전체적으로 짙은 호박색이었으며, 좀 되직해 보였다. 장목화는 수저로 잡탕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작은 고기 조각과 밀가루 반죽, 햄 부스러기, 당근, 알 수 없는 채소 등등이 들어간, 그야말로 잡탕이었다.

플린은 다시 유백색 카운터 뒤쪽으로 돌아가며 웃었다.

“온갖 게 다 들어있지? 잡탕의 가장 큰 특징은 먹을 때마다 재료랑 양이 달라진다는 거야.”

“그때그때 있는 것들을 넣는 모양이네요?”

장목화가 질문하는 사이, 성건우는 허겁지겁 잡탕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도 마음 놓고 짙은 호박색 탕을 한 숟갈 떴다. 후후 불어 입가로 가져가니 처음에는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다음엔 약간 신맛, 그리고 적당히 짠맛이 그 뒤를 이었다.

세 가지 맛은 한데 어우러지고, 각기 다른 재료의 맛을 억누르며 부드러운 풍미를 만들어냈다. 천천히 내용물을 씹을 때마다 맛은 더 풍부해졌다.

“맛있네요, 아주 훌륭해요.”

성건우가 우물거리며 칭찬했다. 손이 자유로웠다면 손뼉도 칠 기세였다.

“진짜, 진짜!”

용여홍도 감동한 듯 호응했다. 오랜 여정을 이어오며 내내 같은 음식만 먹던 고통이 단박에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장목화는 조용히 웃다가 고개를 살짝 돌려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낡은 스카프를 두른 백새벽도 음식에 열중하며 옅은 만족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목화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굳이 도와줄 필요는 없겠네.’

구조팀의 반응에 플린도 뿌듯해했다. 이들을 정말 친구로 여기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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