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21화 (121/649)

121화. 도발

그렇게 10초가 지났을 무렵, 우락부락한 남자는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뭘 쳐다봐?”

성건우는 즉각 실실 웃었다.

“네가 졌어.”

“이 미친놈! 유치한 새끼! 너 거기에 털은 났냐? 어?”

욕설을 뱉는 남자를 보고, 술을 따르던 플린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철! 시끄러워. 술 몇 잔 마셨다고 네 이름도 못 알아듣는 건 아니지?”

조철도 감히 단장을 거스르진 못하고 욕설을 뇌까리며 자리에 앉았다.

바로 그때였다. 스툴에서 내려온 성건우가 조철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그 자리에서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야!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조철과 그의 동료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성건우는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너보다 더 클걸.”

순간 조철뿐만 아니라 구조팀을 비롯한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조철은 폭풍 같은 분노에 휩싸였다. 성건우가 자신을 모욕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장 바지를 내리고 비교라도 해야 하는 건가?’

성건우는 두려울 게 없을지 모르겠으나, 조철에게는 차릴 체면이 있었다. 무엇보다 실제로 비교해 이긴다면 다행이지만, 지기라도 하면 더는 이 상인단에 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안돼, 그렇다고 저 녀석에게 끌려갈 수는⋯⋯.’

조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바깥을 가리켰다.

“좋아, 한 판 붙어?”

“그래!”

성건우가 곧장 허리띠를 다시 채우며 답했다.

장목화는 좀처럼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 미간을 살짝 구겼다. 성건우가 질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격투 실력에 자신이 있었으며, 성건우는 구조팀에서 그녀에 버금가는 실력자였다.

지금 장목화는 성건우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한판 시원하게 싸우고 앞으로 대화를 편하게 하려는 생각이라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 판단을 내린 장목화는 용여홍에게도 가만히 있으라고 일러뒀다.

구조팀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무근자 상인단 단장 플린 역시 구경이나 하자는 듯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음악 꺼! 누가 공연을 한다네!”

그의 외침에 양쪽 차에서 울려 퍼지던 음악이 바로 뚝 끊겼다. 여러 테이블로 에워싸인 안쪽 공간에서 한창 춤을 추던 사람들도 바깥으로 물러났다.

조철은 가장 먼저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단장의 캠핑카에서 내렸다.

그는 알록달록한 빛에 휩싸인 공터에 섰지만, 성건우는 조급하게 따라나서는 대신 배낭을 벗어 내려놓더니 애지중지하는 작은 스피커를 꺼냈다.

이 스피커는 콘센트에 연결해서 쓸 수도, 구세대의 산물인 오래가는 배터리를 끼워서 쓸 수도 있었다. 지금도 특정 세력에서는 그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장목화는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이윽고 성건우가 작은 스피커를 캠핑카 문 앞에 내려놓고 버튼을 눌렀다. 그런 다음 ㄷ자로 세워진 캠핑카 사이 공터에 진입했다.

지직-

전류 소리와 함께 스피커에서 높고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난 바라보고 있어. 달 위를⋯⋯. (*주: 봉황전기(鳳凰傳奇)의《월량지상(月亮之上)》)

성건우가 노래에 따라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두 다리를 끊임없이, 리드미컬하게 앞뒤로 교차하며 조철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덤벼!”

- 어제는 잊어버리자. 슬픔은 바람에 날려버리자…….

계속 이어지는 노래 속에서 조철은 순간 패배를 강하게 직감했다. 저 사람에게 덤비면 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여기서 지면 모든 사람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과 다름없이 수치를 느끼게 될 터였다.

그래도 지금 와서 싸움을 포기할 순 없었다. 조철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심호흡을 한 뒤,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조철의 시선은 성건우의 다리와 어깨에 고정돼 있었다. 그가 아는 격투 기술 몇 가지는 스텝이 가장 중요했으며, 어깨를 통해 상대가 어느 쪽 손으로 주먹을 뻗을지 예측할 수 있었다.

무근자 조철은 어릴 때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아왔다. 또한 퍼스트 시티에 있었을 때는 유명한 권투 선수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었다. 그는 결코 단순히 덩치만으로 남에게 무시 받지 않고 살아온 남자가 아니었다.

스텝을 잘 조절하던 조철은 곧 한발 앞으로 나갔다. 동시에 성건우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조철은 한 발 더 나갔고, 성건우는 또 물러났다.

두 사람은 시종일관 충분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던 그때, 성건우가 갑자기 앞쪽으로 한발 달려들었다. 순간 조철은 조건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다시 한 명이 물러나면 한 명이 나가고, 한 명이 나가면 한 명이 물러나고. 두 사람은 정말 무슨 춤이라도 추는 듯했다.

그 순간, 계속 이들을 지켜보던 관중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잘 춘다!”

마침내 관중도 단장이 말한 공연이 무슨 공연인지 알게 된 것이다.

이 찬사에 얼굴이 확 붉어진 조철은 더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성건우는 그를 가볍게 피하는 한편 다리를 뻗어 상대의 발을 걸었다. 이에 조철은 바닥에 참 볼썽사납게도 엎어졌다.

성건우는 바로 몸을 숙여 상대를 완벽히 제압했다. 조철도 눈치가 빨라 이미 승부가 끝났음을 알았기에 더 이상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내가 졌다.”

그 말에 성건우는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 스피커를 챙기고 전원을 껐다.

장목화는 성건우를 보며 미간을 살짝 구긴 채 물었다.

“설마 밖에서 춤추고 싶어서 이렇게 큰 판을 벌인 건 아니지?”

“맞아요, 사실대로 말했다면 팀장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성건우는 늘 솔직한 편이었다.

그 대답에 장목화도 결국 실소했다.

“진짜 고집이 장난 아니네. 어휴,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기술을 쓰다니. 똑똑하다고 칭찬해줘야 하는 건지.”

성건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뭐, 제 정신질환이 더 심해진 건지도 모르죠.”

공인된 정신질환자의 말에 장목화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솔직한 심정으론 성건우가 방금 그토록 큰일을 벌인 이유가 그저 춤을 추기 위한 거였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짧은 몇 분 동안 성건우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기 싸움을 하며 조철의 화를 돋웠으며, 허리띠를 풀어가면서까지 도발해 상대를 싸움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고작 음악 틀고 춤 한번 추자고 벌인 일이라니?

장목화는 차라리 이 모든 게 성건우의 발작 때문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도 부정할 수 없었다. 성건우의 성격과 순간순간의 모든 세세한 것들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계획을 세우고, 방비하고, 이 모든 일을 한 건 정말로 춤을 추기 위해서였다.

이게 긴 시간 동안 계획을 하고, 긴밀하게 연결된 단계를 따라서 강도 짓을 마친 뒤 피해자와 함께 있던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거랑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정신질환자의 집착이라는 걸까? 별것도 아닌 목표를 위해 이렇게나 긴 우회로를 선택한 후, 복잡한 방안까지 설계하다니. 거기다 행동력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했다.

장목화는 속으론 탄식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옆쪽 스툴을 가리켰다.

“다 췄으면 이제 앉아.”

그런데 성건우가 채 걸음을 옮기기도 전, 젊은이 한 무리가 캠핑카 안으로 냅다 몰려들었다.

순간 각기 다른 기름 냄새들이 구조팀원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무리 중 남자는 모두 옆통수를 박박 밀었으며, 여자들은 단발머리 혹은 바깥에 번득이는 불빛처럼 녹색, 보라색, 붉은색, 금색으로 염색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청년 무리가 성건우를 빙 에워싼 채 질문을 쏟아냈다.

“방금 그 노래 제목이 뭐야?”

“진짜 느낌 있던데?”

“아직도 그 노래가 머릿속에서 맴돌아!”

“혹시 우리한테 노래 복사 좀 해 줄 수 있어?”

“비트도 진짜 대박이었어!”

성건우는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좋아, 그럼 너희들이 전에 틀었던 노래 몇 곡도 복사해줘.”

청년들은 분분히 엄지를 치켜들었다.

“듣는 귀가 있네!”

그렇게 그들과 한데 섞인 성건우는 누군가가 가져온 노트북과 연결선을 이용해 음악을 교환했다.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복사해 준 후에도 그는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뭉그적거리며 겨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장목화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앞으로 다른 사람이랑 싸울 때마다 음악 틀 생각은 아니지?”

성건우는 진지하게 답했다.

“기회가 있고, 시간도 허락한다면요. 적에 맞춰서 음악을 따로 설정하려고요. 예를 들면 정법 선사 같은 기계 승려한테는 극락정토와 같은 음악이 어울리죠. 가사를 알아들을 순 없지만, 제목은 꽤 어울리잖아요?”

장목화는 모두가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스텝을 밟는 성건우를 떠올리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가는 적들의 영혼을 파괴하게 될 것 같은데. 그래, 어쩌면 그들의 마음을 자극할 수도 있고⋯⋯.”

이때, 플린이 다 채워진 잔 네 개를 구조팀원들 앞으로 밀어주었다. 자홍빛 술에서는 맑고도 새큼한 향기가 났다.

“냅다 마시지 말고, 일단 좀 기다려요.”

짧게 당부한 플린이ㅐ 곧 웃으며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훌륭하던데? 우리 사위 삼고 싶을 정도로.”

장목화는 시급히 성건우가 헛소리할 기회를 차단하고 즉각 끼어들었다.

“단장님, 단장님의 사람을 때린 녀석인데 탓도 안 하세요?”

‘맞아, 맞아!’

용여홍은 속으로 맞장구치며 매우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근자들은 강력한 전사를 환영하거든요.”

장목화의 질문에 답한 사람은 뜻밖에도 백새벽이었다.

플린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 상인단이 가장 환영하는 사람은 다섯으로 나뉘어요. 훌륭한 수리공, 훌륭한 기사, 훌륭한 길잡이, 훌륭한 사수, 훌륭한 전사. 우리가 말하는 전사는 맨손 격투에 능하고 냉병기를 사용하는 사람이죠.

하하, 다들 봤겠지만, 이 야영지에는 유조차랑 캠핑카가 많아요. 그런 차들이 총에 맞거나 긁히면 안 되지. 그래서 그 쪽한테도 총 소지는 허락했지만, 사실 야영지 안에서는 총기 사용이 불가능하죠. 갈등이 일어나면 무조건 맨몸으로 싸워서 해결해야 해요.

뭐, 혈기 왕성한 청년들을 완전히 통제하는 건 사실 비현실적인 일이죠. 솟구치는 힘은 춤과 몸싸움으로 푸는 수밖에 없어. 이런 일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격투에 능한 사람이 자연히 인기가 많아지더군.

게다가 우린 상인단이야. 어지간해선 최대한 총기를 안 쓰는 게 좋지. 상대랑 피로 얼룩진 관계가 되어버리면 앞으로 어떻게 그곳이랑 거래하겠어. 하지만 몸으로 치고받기만 하면 싸운 후에 관계가 더 깊어지는 경우도 더러 있거든.”

플린의 이야기를 듣던 장목화가 웃으며 백새벽을 가리켰다.

“저희한테도 훌륭한 길잡이가 있어요. 일찍이 저희한테 야영지 안에서는 총을 꺼내지 않는 게 좋다고 알려줬죠.”

플린은 약간 부드러워진 얼굴로 백새벽을 돌아보면서 농담을 던졌다.

“우리 며느리 삼을까? 우리 상인단은 길잡이에 대한 대우가 꽤 괜찮은데.”

“단장님 상인단을 전부 우리 팀과 결혼시키신다면요.”

장목화도 웃으며 농을 받아쳤다.

대화가 이어지던 그때, 장목화가 성건우를 힐긋 보다가 플린에게 말했다.

“통조림 하나 더 드릴게요. 야생 과일주 네 잔 더 주세요.”

“일단 맛부터 보고, 괜찮다 싶으면 그때 주문해요.”

플린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권했다.

그러자 장목화가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웃었다.

“단장님께 대접하려는 거예요.”

“그럼 거절할 수 없지.”

플린이 새 잔 네 개를 꺼내 채운 뒤, 한 잔을 자신의 앞쪽으로 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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