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야영지
뒤이어, 백새벽이 여유롭게 덧붙였다.
“여러 대형 세력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물자가 아닌 이상 자기들 사람한테 운송을 맡기려 하지 않아.
실제로 예전에 비교적 큰 편이던 거점의 지도자가 경비대원 여럿한테 화물 운송을 맡겼었거든? 그런데 그 사람들이 거점을 비우니까 내부 병력이 약해진 거야. 그 바람에 크게 약탈을 당했어. 무엇보다 민감한 구역들을 돌아다니려면 중립적인 상인단이어야 훨씬 수월해.”
백새벽은 잠시 말을 끊었다. 용여홍과 성건우가 무슨 질문이라도 할까 봐 잠시 기다려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말이 없자 백새벽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연료, 식량, 고성능 배터리, 온전한 자동차 부품만 있으면 무근자 집단을 고용해서 그들한테 운송을 맡길 수 있어.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연료와 전기를 쫓으면서 산다고 말하거든.
날씨가 추워지고 거래량이 줄어들면, 무근자들은 이와 비슷한 야영지로 찾아와 그간 비축해둔 식량으로 겨울을 나. 동시에 야영지 주변 구역의 운송과 매매를 맡기도 하고.
여긴 무근자 집단 중에 제일 큰 곳이야. 이들은 부근에 아직 사용할 수 있는 정수장이 있어서 수시로 이 야영장에 찾아와.”
* * *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지프는 무근자 야영지 입구에 이르렀다.
여기서 백새벽은 얼른 몇 마디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저 안에선 절대로 다른 사람들 차를 망가뜨리면 안 돼요. 무근자에게 차는 제일 귀중한 재산이거든요. 차가 없고, 다른 무근자 가족이 없으면 쫓겨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또 저들은 거의 세 세대 동안 차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자들이라 차에 대한 감정이 각별해요. 저들에게 차는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족이랑 마찬가지예요. 가족을 다치게 한다면 절대로 유순하게 굴지 않을 거예요.”
장목화는 백새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핸들을 살짝 내리쳤다.
“정말 독특한 풍습이네.”
그때, 입구 양쪽의 대형 차량 앞머리를 각각 지키고 있던 경비대원 두 명이 돌격 소총을 들고 멈추라는 의사를 표했다.
백새벽은 재깍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었다.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수염을 기른 경비대원이 지프차 쪽을 자세히 살피다 눈을 반짝였다.
“생긴 것도 예쁘고, 몸매도 아주 훌륭하네? 이 지프차 진짜 죽이는데! 차 하나 잘 빠졌네! 동력이 뭐지?”
“고성능 배터리요.”
백새벽이 솔직하게 답했다.
경비대원의 눈에 더욱 생기가 감돌았다.
“혹시 여기 아내는 놓고 갈 생각인가?”
“우린 진정한 사랑이야!”
어느새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성건우가 바로 소리쳤다.
경비대원은 곧 엄지를 치켜들었다.
“안목이 있어.”
이내 총구를 내린 그가 턱짓으로 야영지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가 봐요. 지시에 따라 멈추라면 멈추고. 그러지 않으면 아내를 잃게 될지도 모르니까.”
지프가 야영지 입구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이, 용여홍은 의아하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렇게 간단하다고?”
알고 있는 지인도 없고, 무기를 제출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구조팀은 이미 야영지 안에 들어와 있었다.
장목화는 백미러를 힐긋 바라보며 웃었다.
“무근자 상인단에는 화력도 충분하고, 사람도 많잖아. 이곳에 들어와서 겁을 먹어야 할 건 그들이 아니라 외부인이라는 거지.”
잠시 고민하던 용여홍이 말했다.
“하긴⋯⋯. 그럼 우린 더 경계해야겠네요. 저들을 믿으면 안 되겠어요.”
“그래.”
장목화는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한편, 성건우를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건우, 이제 네가 나설 차례다. 잘해라!”
그러자 성건우가 약간 곤란하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전 자동차가 아닌데요.”
“그러게. 우리 새벽이처럼 예쁜 미인을 두고도 노상 지프차만 쳐다보더라.”
장목화의 짓궂은 장난에, 백새벽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엄연히 나이가 더 많은 건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장목화의 큰 키를 보고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 * *
안내원의 도움 아래, 구조팀은 빠르게 차를 세운 뒤 지프에서 내렸다.
장목화는 곧장 주위를 한번 둘러보다가, 특이점을 발견했다. 야영지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차들은 전부 큼지막한 은회색 금속관을 싣고 있었다.
“유조차네⋯⋯. 어쩐지 삼엄하게 보호받고 있더라니.”
부르릉!
장목화가 잠시 한숨을 내쉬던 사이, 파란색, 흰색으로 칠해진 옆쪽 캠핑카에서 엔진 소리가 났다.
그 차 앞에는 야구모자를 쓴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차 앞에 서서 보닛을 만지작거리는 한편, 엔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내 엔진 소리가 멈추자 그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건우는 어느새 그쪽으로 다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말을 건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중년 남자는 중간 정도의 키에, 체격이 다부진 편이었다. 피부는 약간 검고, 입은 옷은 기름때에 절어 있었다. 거기에 조금 험상궂은 표정까지 짓고 있던 그는 곧바로 성건우를 돌아보며 구겨진 미간을 풀었다.
“모두에게는 성질이 있기 마련이니까. 이놈한테 무슨 불만이 있는지 들으려는 겁니다.”
구조팀 모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남자는 색이 칠해진 지 오래된 듯한 파랗고 하얀 차체를 어루만지며 낮게 웃었다.
“이놈은 우리 할아버지가 몰던 시절부터 우리 가족이었습니다. 지금은 나이도 꽤 들고, 성격도 퍽 괴팍해졌지. 시끄럽기는 또 어찌나 시끄러운지, 원. 하하, 그쪽 가족 중에도 노인이 계시겠죠? 노인은 원래 좀 시끄럽잖아.”
성건우는 한발 뒤로 물러나 캠핑카를 자세히 보다가 라이트를 가리켰다.
“눈이 정말 예쁘네요.”
“그것도 벌써 두 번이나 고쳤어요. 젊은 시절에는 더 예뻤는데⋯⋯.”
중년 남자도 약간 자신감을 되찾은 듯 중얼거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장목화가 백새벽과 용여홍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건우는 진짜 누구 사귀는데 천부적 재능이 있는 것 같아.”
그렇게 한동안 얘기를 나누던 그때, 운전석에 있던 20대 청년이 공구 상자를 갖고 내려와선 중년 남자와 함께 차의 보닛을 열고 능숙하게 수리를 하기 시작했다. 성건우도 곧장 물러나 팀원들과 발길을 옮겼다.
* * *
캠핑카 한 대, 한 대를 지나치며 야영지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곳으로 향하던 도중, 백새벽이 조금 전까지 있던 곳을 돌아보며 엷은 웃음을 띠었다.
“만약 너희들 중에 자동차 수리에 능한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결혼은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뭐? 결혼을 원하는 만큼 해?’
지하 빌딩에서 태어나 지하 빌딩 안에서만 살아온 용여홍에겐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성건우가 곁에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홍이 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네.”
연이어 장목화가 전에 보고 들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그런 풍습이 있는 곳들이 더러 있지. 어떤 곳에서는 여자 한 명이 남편 여럿을 둘 수도 있대.”
성건우는 순간 호기심이 동했다.
“만약 그 두 지역 사람들이 모여서 풍습이 혼합되면 어떻게 변할까요?”
장목화는 잠시 고민해보다가 답했다.
“그럼 아마 내 두 번째 부인 남편의 세 번째 부인의 네 번째 남편이 내 아들이려나?”
“…….”
용여홍은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내 주위를 한번 둘러보던 그가 뭔가를 발견했다.
몇 미터 밖에 있는 어느 캠핑카 앞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다들 면오(*棉袄: 중국 방한복)와 낡은 다운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붉은 촛불 두 개를 향해서 몇 번이고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촛불 앞에는 말린 고기 한 조각과 깨끗하게 털을 제거한 닭 한 마리, 빵 등의 음식이 놓여 있었다.
“저 사람들은 뭘 하는 거지?”
용여홍은 까치발까지 살짝 들어가며 그쪽을 더욱 제대로 보려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백새벽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닛의 신에게 인사를 드리는 거야.”
“보닛의 신?”
장목화가 흥미를 보였다.
그러자 백새벽이 할 말을 잠시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무근자 집단에게 차는 가장 중요한 재산이자 가정의 중요 일원이에요. 저들의 수많은 풍습은 그런 생각에서 비롯됐죠.
저 사람들은 운전하는 도중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충돌하거나, 늪에 빠질까 봐, 또 무슨 장애물을 만나 차가 전복될까 늘 걱정해요. 그래서 보닛의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순조로운 여정을, 아무 고장도 일어나지 않길 빌죠.”
성건우는 바로 혀를 찼다.
“쯧, 그런 바람은 어느 달지기의 관할 범위에도 포함되지 않는 건가?”
“그러게, 달지기를 숭배하지는 않는가 보네.”
용여홍도 동조했다.
백새벽은 곧 살짝 웃음을 보였다.
“달지기들의 장악 범위는 그렇게까지 넓지 않아. 사실 달지기라는 말만 들어본 사람이 대부분인 곳도 많고.
음⋯⋯. 달지기를 신봉하는 여러 교파에서도 보닛의 신을 자신들 종교로 영입하고, 무근자 집단을 같은 신도로 만들려고 시도했었어.
여태 가장 좋은 성과를 낸 건 수정의식교야. 이들도 1월을 관장하는 불타, 보리를 믿는 교파야. 또 다른 무근자 집단 사이에서 보닛의 신은 이미 보닛 보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더라고.”
“신령 사이의 경쟁도 아주 치열하네.”
성건우가 정색한 얼굴로 평가했다.
이윽고 용여홍이 보닛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는 곳을 다시 돌아보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무 낭비하는 거 아닌가?”
용여홍의 시선은 말린 고기, 잘 구워진 닭, 빵 등의 음식에 가 있었다. 그건 반고 바이오 직원이 봐도 상당히 귀한 음식들로,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쉽게 맛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곧이어 백새벽이 설명했다.
“아니야, 제사 마치면 저 음식들 그대로 거둬서 다 함께 나눠 먹어. 애쉬랜드에서 음식을 낭비하는 곳은 잘 없잖아.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그러다 그녀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황야유랑자 거점 아이들이 가장 기대하는 날이 제삿날이야. 그날만큼은 한 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으니까. 근데 그 기회도 일 년에 한두 번뿐이지.”
“그렇구나⋯⋯.”
용여홍은 자연스레 반고 바이오의 새해 명절을 떠올리며 동질감을 느꼈다.
* * *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일행은 야영지에서 가장 시끌벅적하지만, 유조차와는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비교적 훤히 트인 이곳엔 길고 큰 캠핑카 세 대만 있었다. 캠핑카들은 약간 성긴 ㄷ자 모양으로 세워져 있었으며, 옆문이 다 활짝 열려 있어 안쪽이 손쉽게 들여다보였다. 그 안에는 탁자, 의자, 싱크대, 장식장 등이 있었다.
이 캠핑카가 자리한 공간 바깥쪽에는 각양각색의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안은 완전히 비어있었다.
이때, 세 대 중 정 가운데에 있는 캠핑카 지붕 위에서 여러 개의 원형 구가 끊임없이 번쩍이며 초록, 붉은, 보랏빛 등의 빛을 발했다. 덕분에 이 구역은 매혹적이고 환상적인 빛으로 채워졌다.
그런가 하면 나머지 두 캠핑카 지붕에는 스피커가 하나씩 얹혀 있었다. 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리드미컬한 음악은 텅 빈 안쪽 공간에 자리한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이 광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장목화가 돌연 손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저곳으로 달려들 듯 움찔거리는 성건우를 막아선 것이다.
“끼어들지 마. 일단 들어가자.”
못내 아쉽다는 듯 시선을 거둔 성건우는 막 내려놓으려 했던 배낭을 다시 메고, 장목화를 따라 맨 안쪽의 캠핑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