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18화 (118/649)

118화. 접근 (2)

여정은 벌써 보름이나 이어졌다. 아무리 쥐어짜도 더 이상의 이야깃거리가 남아있을 턱이 없었다.

용여홍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낮게 드리워진 납빛 구름, 누른 황야, 갈색 진흙, 저 멀리 자리한 산봉우리와 나무까지. 이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은 물론 동물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애쉬랜드의 겨울이었다.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으면 우울하고 조급한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짧은 시간에 위드 시티에 도착하기 위해, 동시에 될 수 있으면 위험을 피하려, 구조팀은 전부 이와 비슷한 길을 택했다. 이들이 이런 길을 따라 이동한 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어 있었다.

또한 흔히 다니는 길이 아니라 아주 긴 우회로를 따르고 있어, 특정 지역에서의 환경 변화와 험악한 날씨 영향을 받아 며칠 더 시간을 지체했다.

“언제쯤 사람 구경을 할 수 있으려나?”

용여홍이 느릿하게 숨을 뱉어냈다. 계속해서 이런 시간이 이어진다면 정말 언젠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사람을 만나면? 대화라도 나누게?”

성건우가 옆자리에서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음⋯⋯.”

용여홍은 곰곰이 고민하다 그렇게 경솔하게 굴면 안 되겠단 생각을 했다.

“그냥 다른 사람을 보고 싶을 뿐이야. 온 애쉬랜드에 우리 넷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

“그럼 넌 누굴 고를래? 인류의 번성을 위해서는 희생을 해야지.”

성건우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용여홍이 먼저 이곳에 4명만 있다는 상상을 던졌으니, 바로 비슷한 장단을 맞춰야 했다.

이내 장목화가 대화를 끊으려는데, 백새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지금 같은 계절의 황야에서는 아무도 안 만나는 게 제일 나아.”

나름 경험자라고 할 수 있는 용여홍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받았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황야에 들어온 건 그만큼 먹을 게 없단 뜻이니까?”

장목화는 한숨과 함께 답을 이었다.

“그래, 그들의 식량은 매우 부족한 상태일 테니까. 차라리 우리 음식을 뺏어가는 게 낫지, 아이를 안은 채 길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애원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그걸 무시하고 그냥 갈 수 있겠어?

설령 먹을 걸 나눠준다고 쳐도, 그들이 그걸로 며칠이나 더 연명할 수 있을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우린 그런 사람들을 몇이나 구해줄 수 있을까?

좋은 의도로 먹을 것을 나눠줬는데 그걸로는 겨울나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기회를 노려 우리를 기습한다면? 심지어는 우리를 죽이고 예비용 식량까지 다 털어가 버린다면?

혹은 황야유랑자들이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 그런 짓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대신 우리가 먹을 걸 나눠줬던 또 다른 사람들을 죽여서 그들의 몫을 빼앗는다면, 그때는 우리가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질문들 하나하나가 용여홍의 가슴에 날카로운 화살처럼 박혔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를 대신해서 백새벽이 입을 열었다.

“한 사람도 못 구해. 우리가 가진 식량은 위드 시티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가 먹을 양 정도밖에 안 돼.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고.”

장목화도 자조하듯 웃으며 덧붙였다.

“여홍이 네가 굶어 죽고 싶은 게 아니면 아무도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좋아. 개인의 힘만으로는 애쉬랜드를 구원할 수 없어.

당시 구세군 건립자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들을 수차례하고 연합을 통해 상하가 평등한, 전 인류의 구원을 목표로 한 조직을 설립하기로 했었어.

그들은 하나의 강력한 집단을 통해 최대한 짧은 시간에 사회 질서와 생산 체계를 세우려 했었지. 그 후 더 많은 유랑자를 수용하면서 더 많은 식량과 기타 물자를 생산하려 한 거야. 눈덩이 굴리듯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한숨으로 말을 맺은 건, 이상주의자들이 설립한 구세군은 끝내 타락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후임자는 자연스레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성건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장목화는 이야기를 잇는 대신 아랫입술을 꼭 물고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저녁으로 뭘 먹을지나 고민해보자.”

순간 용여홍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성건우도 평소처럼 손을 들어 입가를 훔치지 않았다.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에너지 바, 압축 비스킷, 군용 통조림뿐이었다.

전부 맛도 다르고 종류도 달랐지만 그래도 결국은 에너지 바고, 압축 비스킷이고, 군용 통조림이었다.

구조팀은 지난 보름 내내 그것만 먹어왔었다. 이미 넌덜머리가 날대로 난 상황이라 이젠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이번에 돌아가고 나면 다시는 통조림을 먹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용여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군용 통조림은 분명 맛있었지만 매일 먹다 보면 당연히 물릴 수밖에 없었다.

장목화는 자신의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않자 지평선에 걸린 석양을 한번 바라보다가 백새벽을 쳐다보았다.

“이 부근에 좀 괜찮은 황야유랑자 거점이 있어?”

회사에서 제공한 지도에 이 부근의 유명한 거점 몇 개가 표시돼 있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백새벽의 조언을 듣는 게 더 직접적이고 더 편하며, 더 온당하다고 생각했다.

“식량 거래 말고 또 다른 목적이 있으신가요?”

백새벽이 물었다. 그녀는 팀장이 겨우 식사 메뉴를 바꾸기 위해 정해진 길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목화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하루 이틀 안에 위드 시티에 도착해. 미리 준비해 둬야지. 이렇게 마음 놓고 도시에 들어갈 수는 없잖아?

생명 제례 교단이 그렇게까지 극단적이거나 강력하지 않고, 우리가 위드 시티에 가려고 한다는 정보를 미리 손에 넣지 못했다 한들 우리는 또 다른 구조팀이 실종된 이유를 찾아내야만 해.

그러니까 적당한 황야유랑자 거점을 찾아서 위장이 좀 필요할 것 같아. 예를 들면 위드 시티에 거래하러 들어가는 상인들에 섞여들 수도 있고.”

짝짝짝!

성건우는 진심 어린 손뼉을 쳤다.

용여홍도 팀장의 치밀함에 깊은 감탄이 나왔다.

이윽고 백새벽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그럼 부근에 있는 무근자(無根者) 야영지로 가시죠. 겨울이니 그들은 분명 그곳에 있을 거예요.”

“무근자?”

용여홍이 수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전부 고자인가?”

성건우도 빠지지 않았다.

장목화 역시도 흥미롭다는 듯 질문했다.

“나도 무근자란 칭호는 들어봤는데 잘은 몰라. 어떤 사람들이야?”

백새벽은 살짝 웃었다.

“딱 보면 아류인도, 고자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그저 독특한 풍습을 가진 정상인들이죠.”

“오, 이제 적당한 타이밍에 궁금증 유발도 잘하네? 어디로 가면 돼?”

장목화가 대꾸했다.

이미 몸을 꼿꼿하게 세운 백새벽은 진지하게 길을 안내했다.

* * *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구조팀은 무근자 야영지에 도착했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차들이었다. 크기는 지프의 몇 배에 달하는 데다, 길이가 길고 차체도 높으며 색깔도 다 제각각이었다. 더러는 갈색과 흰색이 어우러져 있고, 몇 대는 흰색 바탕에 검은 무늬가 섞여 있었으며, 또 몇몇은 은회색 바탕에 줄무늬가 그려져 있기도 했다.

“저거, 전부 캠핑카야?”

일찍이 선글라스를 벗은 장목화는 차 속도를 천천히 낮추며 앞쪽 상황을 면밀하게 판별했다.

곁에서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캠핑카가 곧 무근자들의 집이죠. 저 차들이 다 각자의 집이에요.”

“그렇구나⋯⋯.”

장목화는 다시금 야영지를 바라보며 세세한 부분을 확인했다. 캠핑카는 최소 수십 대에 달했다. 넉넉하게 잡으면 세 자릿수가 넘을 것 같기도 했다.

그중 가장 큰 캠핑카들은 야영지 가장자리에 강철 외벽을 형성하듯 세워져 있었는데, 딱 차 한 대쯤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의 공간만 남겨둔 상태였다.

그 벽 틈 사이론 안쪽에 가지런히 세워진 차들이 보였다. 그리고 야영지 중앙에는 거대하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의 차들이 여러 대 있었다.

“캠핑카가 뭔가요?”

용여홍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상당히 놀란 듯했다.

이내 성건우가 설명을 자처하며 나섰다.

“방 하나를 실어둔 차야.”

“넌 본 적 있어?”

용여홍이 의외라는 얼굴로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경험을 했는데 성건우는 알고 자신은 모른다는 게 참 의문이었다.

성건우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찍었어.”

순간 장목화가 헛웃음을 지었다.

“건우가 한 말도 틀린 건 아니야. 캠핑카는 그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차야. 차 안에는 침실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주방도 있어. 심지어는 거실과 식당까지 있는 차도 있지.”

“사치스럽네요.”

성건우와 용여홍이 동시에 같은 평가를 내렸다.

그런 집은 반고 바이오 안에서도 D7급 이상의 직원이 되거나 부부가 모두 D4 이상일 경우에만 분배받을 수 있었다.

곧이어 백새벽이 설명했다.

“소문에 따르면 최초의 무근자들이 구세계 캠핑장에서 왔다고 해. 캠핑장이란 게, 캠핑카를 타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야영지였다나 봐.”

그녀는 구세계 사람들이 왜 굳이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들었던 얘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다행히 성건우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표하지 않았다.

백새벽은 다시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도 알겠지만, 당시 주요한 대도시에 무심병이 창궐했잖아. 근데 캠핑카 야영지는 그래도 괜찮았대. 기습도 없었고. 그래서 운 좋게 구세계가 파괴됐어도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거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됐지만.

뭐,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까진 모르겠어. 어쨌든 결과를 봤을 때 그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지.

그렇게 구세계 파괴되고 혼란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무근자들은 다들 한데 모여 지내며 큰 규모를 이루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어. 이후에 그들은 머물면서 경작을 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지.

하지만 계속되는 전란들, 괴물과 무심자들의 기습, 기상이랑 환경도 변하고, 여러 가지로 악재가 겹치니 그들도 매번 어렵사리 마련했던 거점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

그때부터는 차에서 지내는 생활에, 그러니까 거대한 차량 행렬에 속한 채 유랑하는 삶에 완전히 익숙해진 거야. 정해진 거처가 없으니 자기들을 뿌리 없는 자라고 칭했지. 음, 우리는 그들을 무근자라고 부르는 걸 더 선호하고.”

이 대목에서 성건우가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다.

“그럼 저 사람들은 뭐 먹고 살아?”

“그러게, 뭘 먹고 사려나?”

용여홍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정해진 거처가 없다는 건 경작을 할 수 없다는 뜻이고, 경작을 할 수 없다는 건 고정된 수확물이 없다는 뜻이었다.

백새벽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야영지 입구를 바라보며 빠르게 답했다.

“최초의 무근자는 유적 사냥꾼에 가까웠어. 그들은 무심자의 대량 사망 이후 폐허 도시에서 연료, 식량, 무기, 고성능 배터리, 각종 물자를 얻었지. 당시 모든 폐허 도시가 다 보물창고나 다름없었으니까.

혼란의 시대가 끝나고는 대형 세력들이 속속들이 생겨나고, 그들과 같은 거대 차량 행렬은 금세 이용 대상이 됐어. 그 기회를 틈타 정체성을 바꾼 무근자들은 각 대형 세력 사이에서 화물을 운송해주고 매매를 중개하는 무장 상인단으로 변했지.”

“대형 세력은 왜 그 일을 직접 하지 않은 거지?”

용여홍은 회사 주차장에 세워진 수많은 대형 차량을 떠올렸다. 그곳에 있는 차들은 무근자들의 야영지에 세워져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이 질문에 운전 중이던 장목화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야, 회사에 그럴 인력이 어디 있냐? 너 같은 신입도 구조팀에 파견될 정도로 회사 일손이 아주 부족하단 거 잘 알잖아. 머신헤븐이 아닌 우리한테는 자원도, 그렇게 많은 지능 로봇을 만들어낼 기술력도 없고 말이야.”

용여홍도 그제야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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