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17화 (117/649)

117화. 접근 (1)

장목화를 비롯해 용여홍, 정채진이 떠나자 백새벽이 전두하에게 말했다.

“이제 좀 안심되시죠? 좀 주무세요. 회사 사람이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걸릴 거예요.”

꼭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전두하는 완강하게 고개를 젓더니 두어 번 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들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 어떻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겠냐? 근데 새벽, 난 예전부터 늘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어째서 그 낡은 스카프를 내내 두르고 다니는 거냐?”

방엔 화로가 있어, 꽤 따뜻한 편이었다.

그 훈훈한 분위기 아래 백새벽은 약간 표정 변화를 보이다 쓰게 웃었다.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전두하는 더 이상의 질문을 이어나가는 대신 눈을 반쯤 감았다. 이젠 그도 더는 버틸 힘이 없어 좀 쉬어야 하는 것 같았다.

이정배는 촌장을 지켜보다 성건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상대와 한담이라도 나누면서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그런 대화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성건우는 손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듯한 동작을 취하며 읍읍, 소리만 낼 뿐이었다.

“응?”

이정배는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이에 백새벽이 성건우의 괴이한 행동을 나름대로 추측해 설명했다.

“말을 하기가 불편하다는 뜻이에요.”

‘의도치 않은 헛소리로 이 무겁고 슬픈 방 분위기를 망칠까 걱정하고 있는 것 같네요⋯⋯.’

그녀가 미처 더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 사이 성건우는 백새벽의 말이 맞다며 고개를 힘껏 끄덕여 보였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한 그녀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팀원이 이렇게나 큰 노력과 희생을 하고 있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 동시에 백새벽은 성건우의 상황이 이전보다 더 심각해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한편, 이정배는 말하기가 불편하다는 성건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성건우의 태도는 더 이상 어떤 정보도 줄 수 없다는 완곡한 거절로만 느껴졌다.

이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백새벽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타구를 정리하고,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방 안을 한 번 정리하느라 바빴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잠에서 깨어난 전두하가 고개를 살짝 틀어 귀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쇠약한 목소리로 물었다.

“밖에 무슨 소리냐? 사람들이 온 거냐?”

복도로 나간 백새벽은 두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창문 너머 해자 마을의 대문을 내다보았다.

외부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구령 소리만 어렴풋이 들려올 뿐이었다.

“밖에선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소리만 들립니다.”

대답은 성건우가 대신했다. 그는 자신이 들은 소리를 그대로 흉내 냈다.

전두하의 표정이 빠르게 누그러졌다. 그는 주름 가득한 얼굴로 느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들이 아침체조를 하고 있구나⋯⋯.”

웃으며 중얼거리는 그는 전보다 상태가 훨씬 나아진 듯 보였다.

* * *

장목화, 용여홍을 따라 늪 밖에 이른 정채진은 반고 바이오에서 파견한 팀을 마주하게 되었다.

번득이는 금속과 유리로 이루어진 자동차들, 녹회색 제복을 갖춰 입은 전사들, 참신한 무기들 하나하나가 정채진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속으로 이번 일을 맡은 사람을 칭찬했다.

‘회사는 역시 이런 일에 경험이 많네⋯⋯. 압도적으로 멋진 모습을 보인다면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 * *

해자 마을, 전두하의 방.

백새벽은 전두하의 성화에 못 이겨 벌써 몇 차례나 복도로 나와 장목화를 비롯한 이들이 돌아왔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도 천천히 마을로 접근하는 차량 행렬과 익숙한 녹회색의 지프차를 발견했다.

“왔어요! 드디어 왔네요!”

백새벽은 황급히 몸을 돌려 방 안을 향해 외쳤다.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은 전두하는 거칠게 숨을 몇 번 헐떡거리다가 이정배를 돌아보았다.

“넌 가서 질서를 유지 시켜라. 저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후에는 모든 주민을 소집해 이 사실을 알리고.”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이정배가 얼른 답했다.

“바로 가겠습니다.”

여전히 복도에 남아 두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있던 백새벽은 끊임없이 고개를 돌려가며 전두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지금 그녀는 꼭 잔뜩 신나있는 어린 소녀 같았다.

“대문을 통과했어요! 차에서 내리네요? 대열을 갖춰 광장을 지나요! 주민들은 약간 혼란스러운 눈치인데, 빠르게 질서를 회복했어요!”

그러던 그때, 백새벽이 돌연 말을 멈췄다.

방에선 무서우리만치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백새벽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문 근처에 서서 무거운 표정으로 침대 쪽을 돌아보는 성건우가 보였다.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있던 전두하는 언제 미끄러진 건지 침대에 세로로 길게 누운 상태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표정이 급변한 백새벽은 황급히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즉각 전두하 옆에 쪼그려 앉아 그의 얼굴을 살펴보는데, 노인의 얼굴은 이미 흑청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얼굴에선 생기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백새벽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전두하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10여 초 후, 손가락을 홱 거둔 그녀가 소리 내 전두하를 불렀다.

“촌장님!”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백새벽의 눈앞이 점점 부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쿵-

다리에 힘이 쭉 빠진 나머지 백새벽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침대 가를 애처롭게 움켜쥔 그녀가 메인 목으로 다시 힘겹게 외쳤다.

“……할아버지!”

* * *

장목화는 행색이 더러운 주민들의 시선을 받으며 반고 바이오에서 파견한 직원들을 데리고 움집과 천막 사이를 지났다.

그렇게 게양대 근처에 막 이르렀을 무렵, 해자 마을 가장 안쪽 건물에서 정연하고 앳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대도가 행해지던 시대에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라,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믿음을 가르치고 화목하게 만들었다.

하여 그때는 자기의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은 삶을 편히 마칠 수 있고, 장정은 다 직업이 있었으며, 어린이는 잘 자랐다. 과부, 홀아비, 고아, 병자를 가엾이 여겨 다 봉양했다⋯⋯.” (*주:『예기(禮記)』 인용)

* * *

“대도가 행해지던 시대에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라,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믿음을 가르치고 화목하게 만들었다⋯⋯.”

좌측 뒷좌석에 앉은 용여홍이 낮은 목소리로 손에 쥔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이 단락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팀장님, 왜 회사에서는 이 고문을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이걸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걸까요?”

그가 들고 있는 책은 해자 마을에서 식량과 바꾼 것이었다.

노을이 한창 눈부신 이때, 장목화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난 어릴 때 과외 수업받으면서 그 글을 읽어봤었어. 그건 곧 많은 사람이 아직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회사 고위층 지원들은 모든 이들에게 이 고문을 가르치고 싶진 않았을 거야. 모두가 대동 사회를 추구한다면 관리하기 어려우니까.”

“글쎄요? 회사에서는 천하를 공공의 것으로 만들고,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믿음을 가르치고 화목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노인은 편안히 삶을 마칠 수 있고, 장정은 다 직업이 있고, 어린이는 잘 자랄 수 있잖아요. 음, 과부, 홀아비, 고아, 병자도 다 보살피고 있고요.”

용여홍은 단어를 잊어버렸는지 중간중간 책을 다시 보며 이야기했다.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치료보다는 예방이 더 낫다는 말이 있지. 봐, 너처럼 정식으로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직원도 고위층 사람들은 언제나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취하려 하고, 능력과 관계없이 친한 사람을 임용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잖아.

즉, 모두의 마음속에는 저울이 하나씩 있다는 거야. 겉으로는 감히 반대하지 못해도, 개인적으로는 그런 현실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지.

만약 직원들이 대를 거듭해서 대동 사회를 알게 되고, 그런 사회를 추구하려 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수작을 부릴 수 있을까? 빅보스가 어떻게 권력을 안정적으로 넘겨줄 수 있겠어?”

용여홍은 그녀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다.

“직접적으로 고위층에 맞서 들고일어날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다들 지금의 상황에 꽤 만족하고 있잖아요.”

애쉬랜드의 여러 황야유랑자 거점에 비하면 반고 바이오 내부는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다.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한다면 일정 정도의 보상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굶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장목화는 설명을 이어나가며 핸들을 꺾었다. 지프차는 방향을 틀어 작은 강 한 줄기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용여홍이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모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렇게나 큰 희생을 기꺼이 하려 할 사람이 있으려고요?”

뒤이어 그는 무의식적으로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그곳엔 수시로 인류의 구원을 주장하는 용여홍의 절친한 친구가 앉아 있었다.

“있어.”

역시 성건우는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여홍은 성건우와 논쟁을 할 순 없어서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너 자고 있는 거 아니었냐?”

최근 성건우는 간헐적인 동면기에 진입하기라도 한 듯 매일 낮에 수시로 잠들곤 했다.

용여홍은 이를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지난 보름 동안 내내 이동만 했던 이 구조팀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잠, 대화, 그리고 체력 회복을 위한 단련뿐이었다.

“좀 피곤해서 잠깐 쉬려고 깼어.”

성건우의 말은 살짝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해도 사실이었다. 최근 그는 수시로 기원의 바다에 진입해 두 번째 섬을 찾는 중이었다.

“잠을 자는 건 쉬는 게 아니라는 뜻이냐?”

웃으며 면박을 주던 용여홍이 갑자기 또 장목화를 돌아보았다.

“팀장님, 그럼 해자 마을에서는 왜 이 고문을 가르치는 걸까요? 팀장님도 보셨겠지만, 그 마을 고위층 주민들에게도 각자의 생각이 있던데요. 그들 역시 공평하고 평등한 대동 사회를 원하지는 않을걸요.”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음, 그런 상황의 발생을 막기 위해 이 고문을 교육 과정에 포함했는지도 모르지. 다른 동기는 다른 선택을 낳곤 하니까.”

그때, 보조석의 백새벽이 팀장을 보며 적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렇게 복잡한 이유는 아니에요. 해자 마을이 막 세워졌을 당시에는 있는 교과서면 뭐든지 다 갖다 썼거든요. 그게 훗날 일종의 전통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던 거죠.”

선글라스 안에서 장목화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녀는 백새벽을 한번 째려보려고 했지만, 선글라스에 가로막혀 원하는 효과를 낼 수 없었다.

결국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한창 아는 척하고 있는데 끼어들면 안 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장목화의 기분은 퍽 좋아졌다. 백새벽의 상태가 전에 비해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장목화는 백새벽이 전두하의 죽음에서 오랫동안 헤어 나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계인수를 마치고 해자 마을을 떠난 다음 날부터 백새벽은 별다른 이상 증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기분만 약간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백새벽도 이미 완전히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장목화도 그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황야유랑자는 없었다. 직접적인 정신 붕괴를 경험하거나 심리적 문제를 안게 되지 않은 이상, 그들은 누군가의 죽음에 큰 영향을 받진 않았다.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나 그때를 떠올릴 때 마음 깊은 곳의 먹먹함이야 은은하게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대화를 끝으로 지프차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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