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아침 (1)
전두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드러냈다. 짧은 시간에 그의 몸은 조금 더 오그라든 것만 같았다.
“잘됐군, 잘됐어⋯⋯. 할 말이 더 남아있나?”
“이 정도면 된 것 같네요. 만약 여러분들이 원하신다면 회사 직원들을 통해 새로운 관리 체계를 설계해서 노동 효율을 높이고, 근무 태만을 방지할 수 있게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장목화는 해자 마을 주민들 신경을 자극하는 대신 적당히 말을 끊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다른 주민들을 관리하는 방법에 집중하고 있었다.
누구도 이의를 표하지 않자, 전두하가 사력을 다해 입을 열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정배, 넌 어떻게 생각하냐?”
이정배는 몇 초간 고민하다가 답했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의 답까지 확인한 후, 장목화는 일을 길게 끌어 괜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곧장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너랑 건우는 가서 무선 통신기를 가져와.”
성건우에게 직접 지시하지 않은 건, 당연히 지금 같은 상황에 또 그가 헛소리를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용여홍은 어렵사리 맡은 역할에 매우 적극적으로 임했다.
* * *
용여홍은 성건우와 함께 건물 밖으로 나간 뒤,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팀장님이 아까 그랬잖아, 이 마을 위치를 이미 회사에 알렸다고. 저 사람들한테 거짓말한 거지?”
그 덕분에 장목화는 협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 설마 널 속인 거겠냐?”
성건우가 되물었다.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확인한 용여홍은 퍽 즐거운 듯 반박했다.
“그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잖아.”
성건우는 조용히 친구를 힐긋 바라보았다.
“팀장님이 널 속이려고 했다면, 넌 그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했을걸?”
“⋯⋯그건 그렇지.”
용여홍도 그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 * *
전두하의 방에선, 이정배가 밖으로 나가는 성건우와 용여홍을 눈으로 좇다가 다시 떠보듯 물었다.
“지금 모두를 소집해 이 사실을 공포해야 할까요?”
전두하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또 콜록거리다 답했다.
“그럴 필요 없다. 너희들이 동의했으니 그걸로 된 거야. 반고 바이오 직원들이 오면 그때 알려도 늦지 않아.”
“맞습니다.”
장목화가 동조했다. 혹여나 미리 이 사실을 알렸다가 뜻밖의 사고가 발생할까 염려가 되었다.
반고 바이오에서 제안한 조건은 분명 해자 마을 중하층 주민들에게는 실질적인 피해도 입히지 않고 오히려 훨씬 이득을 주었다. 하지만 보통 이런 협약을 달성할 때는 조건이 실현되기 전까지 내내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너무 거대한 변화로 사람들 마음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면 사람들은 굉장히 예민해져서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쉬웠다.
혹여 야망이 있거나 좀 극단적인 사람이 들고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질지도 몰랐다.
마을에 주둔한 반고 바이오 직원들이 강력한 무력을 선보이면, 주민들은 감히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약속한 조건들이 하나씩 실현되기만 기다려야 할 터였다. 그렇게 삶이 천천히 나아지는 것을 본 후에야 이 협상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걸 과연 계약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이 방 안 주민들은 이제 전두하와 장목화의 이야기를 듣고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자신들의 지위가 동요되지 않을 것임을, 광장 사람들과 같은 급에 놓이지 않을 것임을 비로소 확신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건우와 용여홍이 무선 통신기를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장목화는 수기로 작성한 전보 내용을 모든 이들 앞에 보여주었다.
해자 마을이 우호 협약에 동의했으니, 회사에서 직원들을 보내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전보 말미엔 장목화는 전두하의 상태를 덧붙이며 회사에서 이 병에 관한 약과 기계, 의사를 함께 보내주기를 바란다고도 썼다.
이 전보 내용에 이의를 표하는 이 역시 없었다.
해당 내용을 전문으로 바꾸는 동안, 장목화는 해자 마을 입구 위치와 사전에 약속한 암호를 몰래 끼워 넣었다.
전보를 친 후, 회신은 빠르게 도착했다. 회신 내용은 단 두 글자였다.
「접수」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전두하가 방 안 주민들에게 지시했다.
“이만 다들 돌아가 쉬어. 정배가 내 곁에 있을 테니.”
다른 이들이 모두 방을 떠나자 백새벽은 그제야 전두하에게 말을 걸었다.
“촌장님, 뭘 좀 드실래요? 아니면 좀 주무시겠어요? 회사 사람들은 내일 오후, 아니면 저녁 무렵에 도착할 거에요.”
전두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아직은 됐다. 너희가 놔준 주사약의 효과가 상당한 것 같구나. 조금도 피곤하지 않아. 그리고 새벽아, 벌써 우리가 안지도 몇 년인데 아직도 촌장님 타령이냐. 이젠 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어떻겠느냐?”
백새벽이 무슨 답을 하기도 전, 그는 짐짓 불쌍한 척을 하며 기침을 했다.
“봐라, 손자 한 명도 없이 쓸쓸하게 죽어가는 나의 모습을⋯⋯.”
백새벽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전두하는 웃음을 터뜨리며 백새벽을 비롯한 구조팀원들에게 말했다.
“하하. 나와 정배에게 반고 바이오 이야기를 좀 해 다오.”
이미 텅 비다시피 한 방을 확인한 장목화는 한쪽에 놓인 나무 등받이 의자 쪽으로 다가갔다. 곧 그녀가 웃으며 운을 뗐다.
“저희 회사는 이름만 들어도 아시겠지만 바이오테크, 생물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곳입니다. 생물과 의학의 관계는 언제나 매우 긴밀해서 그와 관련된 영역에도 꽤 강합니다.”
말을 하는 사이 그녀는 그 의자를 들고 전두하의 침대 옆으로 갔다. 동시에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 이정배와 무선 통신기, 또 침대 말고 다른 쪽에 붙은 창문을 살피기도 했다.
원래 장목화는 성건우와 용여홍에게 지프로 돌아가 구조팀의 가장 값진 재산과 그 안에 실린 예비용 배터리, 대량의 식량 등을 지키도록 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생각을 빠르게 접었다. 오늘 밤엔 암류가 솟구치듯 흐를 가능성이 매우 컸다. 팀원들은 최대한 서로 찢어지지 않는 편이 나았다.
‘차를 잃어버리고 물건을 빼앗기더라도 그건 회사에서 보충해 줄 수 있어. 지금 가장 중요한 사람은 전 촌장과 이정배고, 가장 중요한 물건은 회사와 연락할 수 있는 이 무선 통신기야. 그게 다 여기 있으니 굳이 팀원을 갈라 지프로 보낼 필요는 없어.
정말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에도 거긴 도망치기가 어려워 포위되기 쉬워. 담을 넘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니까.
이 방 뒤쪽에 담이 있고, 멀지 않은 곳에 논밭이 보여. 만약 더 이상 이곳을 지킬 수 없을 때가 오면, 곧장 창문 밖으로 뛰어서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쪽에서 공격을 이어가기만 해도 회사 사람들이 올 때까지 버틸 순 있겠지. 그래, 권총과 그 총알은 모두 몸에 지니고 있으니까.’
장목화는 빠르게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세웠다.
이내 그녀는 의자를 침대 옆으로 끌어와 앉아선, 전두하와 이정배, 그리고 방에 마을 경비대원 두 명에게 반고 바이오의 상황을 소개했다.
중점은 정식 직원의 대우와 다른 종속 세력의 형편이었다.
물론 해자 마을이 정식적으로 반고 바이오에 수용되기 전까지는 지하 빌딩의 존재나 회사 입구의 위치 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장목화는 유전자 개량 등에 대해서도 의도적인 언급을 피했다. 애쉬랜드의 상당수가 자연을 거스르고 재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되는 기술을 매우 적대시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두하와 이정배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반고 바이오란 이름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먼저 그런 의견을 표하지는 않아서 장목화는 영리하게 민감한 화제를 이리저리 피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전두하의 심신 상태는 그의 말처럼 좋지는 않아 보였다. 한동안 장목화의 이야기를 듣던 그는 잠시 명상을 하려는지, 잠을 자려는지 눈을 감았다.
이정배와 백새벽은 모두를 방에서 내보내 촌장이 푹 쉴 수 있게 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전두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막았다.
그렇게 이야기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창밖의 하늘에 점점 희끄무레한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침이 온 것이다.
* * *
가장 위험한 시간이 지났음을 확인하고, 장목화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밤새 조금도 쉬지 못했다. 가끔 의자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기지개를 켰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은 돌아가며 잠깐씩이라도 잠을 청해 에너지를 보충했다.
이내 장목화가 팀원들에게 아침을 가져오라고 시키려는데, 갑자기 무전 통신기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직-
“전보가 왔네요.”
장목화는 전두하와 이정배에게 빠르게 설명한 뒤 그쪽으로 다가갔다.
모든 이들의 기대 어린 눈빛 속에 장목화는 얼른 전문의 내용을 해석하다가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회사에서 보낸 직원들이 늪 입구에 도착했답니다.”
“이렇게나 빨리요?”
용여홍이 모든 이들을 대신해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회사에서는 이제야 직원을 선발하고, 약을 준비하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그런 준비를 하는 데에는 거의 1시간이 필요했다.
도중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아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파견된 팀은 저녁 무렵, 혹은 그보다 더 일찍 이곳에 도착할 터였다.
이는 구조팀이 예상했던 것보다 무려 한나절이나 일렀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야간 강행군도 그렇게 드문 일만은 아냐. 게다가 회사에서 이 마을까지 길이 비교적 좋은 편이잖아.”
그녀는 그 길 중 절반 이상은 회사의 통제 구역이며, 안전부의 여러 작전팀이 일찍이 그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해서, 눈을 감고 있어도 함정에 빠질 일은 없다는 건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론 밤 운전도 마냥 쉬운 건 아니었다. 시야에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어진 선택권 따위 없이 환경이 허락하는 대로 움직여야 할 때도 있는 법, 반고 바이오 안전부 고위층이 의도적으로 각 작전팀과 행동대대 훈련 프로그램에 야간 행군을 포함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는 정규군과 황야 강도의 차이점이기도 했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팀이 있었던 걸까요?”
백새벽이 물었다. 여전히 의아해하고 있는 전두하와 이정배를 보고 한번 추측에 나선 것이었다.
장목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의사, 약, 기계를 보내달라 강조했어. 밖에 있던 팀한테는 그런 게 없을 거잖아.”
이내 그녀는 전두하와 이정배를 향해 웃어 보였다.
“회사에서 이곳까지 거리를 대충 짐작하실 수 있게 됐네요.”
거의 한 팀이 야간 강행군을 통해 다다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잘된 일이야. 빨리 도착하면 할수록 안심이 되니까.”
전두하는 조금 전의 염려를 접고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뒤이어 그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몇 번 더 했다.
백새벽은 걱정이 되어 얼른 전두하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장목화 역시 그의 모습을 살피다 직접적으로 고했다.
“제가 가서 그 사람들을 안내해올게요. 마을 진입로는 워낙 구불구불해서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면 분명 길을 잃을 거예요.”
“그래.”
전두하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정배는 잠시 고민하다 방에 있던 정채진에게 말했다.
“채진아, 네가 이분과 함께 다녀와.”
이정배는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정채진은 대장의 고갯짓을 단박에 파악했다. 만약 도중에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예, 대장님!”
정채진은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가슴을 쫙 폈다. 약간 두렵기는 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장목화도 이정배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용여홍에게 말했다.
“너도 나랑 같이 가.”
회사 사람을 맞이하러 가는 것보다 이곳에 남아있는 게 훨씬 위험한 일이었다. 마을에 갑작스러운 변고라도 생긴다면 친구를 사귀는 데 능한 성건우와 이곳에 익숙한 백새벽은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만, 용여홍이 걱정이었다. 이게 장목화가 용여홍을 자신의 곁에 붙여두려는 이유였다.
“예, 팀장님!”
용여홍은 정채진보다 더 큰 목소리로 답했다.
이는 장목화의 귀 상태로 인한 습관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