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15화 (115/649)

115화. 생물학 작용제

남자는 곧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가 장목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정배입니다.”

장목화는 그의 손을 가볍게 맞잡으며 자신과 팀원들을 간단히 소개했다.

“무슨 약을 가지고 계시죠?”

이정배는 한담할 여유 따위 부리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장목화도 솔직하게 답했다.

“폐와 기관지 질환을 치료하는 특효약은 없어요. 하지만 생물학 작용제는 있습니다. 전 촌장님께서도 이 위기를 넘기고 깨어날 수 있을 거예요. 이틀 정도만 더 버틸 수 있다고 해도 치료될 가망은 있어요.”

이정배는 장목화의 말에 담긴 의미를 어렴풋이 파악했는지, 바로 고개를 돌려 짧은 백발을 단정히 빗어넘긴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이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인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도해봐도 되겠다는 뜻을 표했다. 그녀에게도 이 이상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정배는 곧장 결단을 내렸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결단력 있는 인물인 듯 했다.

“네.”

장목화는 대답 후, 구급상자를 가지고 전두하 곁으로 다가갔다.

침대 옆에 앉은 그녀는 상자를 열고 주사 통, 바늘, 엄지손가락만 한 연두색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뒤이어 능숙하게 조립을 마친 그녀가 작은 병 안에 든 약물을 주사기 안으로 빨아들였다.

장목화는 주사기 안에 든 공기를 빼며 백새벽에게 전두하의 소매를 걷어 올려 달라고 말했다. 곧이어 빠른 속도로 혈관을 찾은 장목화가 깔끔하게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주사기 안에 든 약제가 조금씩 혈관으로 주입됐다.

주사를 다 놓은 뒤, 장목화는 바늘 끝을 소독하며 구급상자를 정리했다. 동시에 백새벽에게는 전두하를 부축해 침대 머리맡에 반쯤 기대듯 누울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다.

백새벽은 지시를 이행하며 그의 베개를 허리 뒤쪽에 넣어 받쳐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 걱정스러웠던 숨소리가 점차 편안해졌다. 곧 콜록거리기 시작한 전두하는 백새벽의 도움을 받아 몸을 반쯤 틀더니, 옆쪽에 놓인 타구에 엄청난 양의 가래를 뱉어냈다.

잠시 후, 드디어 그가 눈을 떴다. 노인은 눈의 초점을 느릿하게 잡으며 앞쪽에 자리한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 확인했다.

“새, 새벽아⋯⋯.”

전두하가 연약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백새벽은 얼른 그 부름에 답했다.

“네, 저예요.”

그는 안심했다는 듯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네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백새벽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한 번 터져버린 눈물은 도저히 걷잡을 수도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목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정신을 차린 전두하는 장목화와 성건우, 용여홍, 그리고 이정배까지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그는 일단 손님들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한 뒤 침대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정배야, 이리 와서 여기 앉아라.”

이정배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장목화를 빙 돌아 전두하의 곁으로 갔다.

곧이어 전두하가 환히 웃자, 그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이 하나씩 펴졌다.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넌 네 또래의 아이 중 가장 심각한 개구쟁이였지. 말썽꾸러기 같으니.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내가 우리 해자 마을을, 너한테 넘기려 할 줄은.”

“촌장님⋯⋯.”

곧 중년에 접어들 나이인 이정배의 얼굴도 어느새 눈물에 젖어 있었다.

전두하는 웃으며 그를 질책했다.

“울긴 왜 울어? 난 일흔이 넘었어. 이만하면 충분히 살았지. 우리 아내도, 아이들도 다 저승에서 날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그가 천천히 숨을 고르며, 기대감 어린 눈동자를 굴렸다. 전두하의 시선이 멈춘 곳엔 장목화가 있었다.

“전에 너한테 말해준 그 일에 대한 답이, 온 것 같구나. 어떻게 됐나?”

장목화는 잠시 할 말을 정리한 뒤 일단 자기소개부터 했다.

“저희는 반고 바이오에서 왔습니다.”

“반고 바이오?”

이정배는 화들짝 놀란 듯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주위 사람들도 똑같은 표정 변화를 보였다. 놀라움, 충격, 경외심, 공포, 불안함 등 그들이 내보인 감정은 다양했다.

장목화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웃었다.

“애쉬랜드 내에선 저희 회사의 평판이 그다지 좋지 못하죠. 하지만 믿어주세요, 저희가 실행한 모든 실험의 대상은 전부 자발적인 지원자였습니다. 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 건 유혹적인 이익이지, 강압적인 협박이 아니었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대형 세력 중 저희 회사보다 더 믿을 만한 세력이 과연 몇 곳이나 될까요?”

침묵에 휩싸인 장내에서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들리는 말로는 반고 바이오가 구세계 파괴 진범이라고 하던데⋯⋯.”

약간 굳은 표정을 드러낸 장목화가 얼른 그 말에 대꾸했다.

“그럼 여러분은 더더욱 저희 말에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구세계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에게 투항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또 한 번의 침묵 속에서 전두하가 기침을 하며 말했다.

“목적이 뭔가?”

장목화는 웃으며 답했다.

“저희는 여러분과 우호 협약을 맺으려 합니다.”

전두하는 그 듣기 좋은 명칭에 매혹당하지 않았다. 쇠약해진 지금도 그는 요점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장목화는 일찍이 생각해 뒀던 대로 술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간단히 말해서 여러분들은 회사에 여러분이 획득한 정보와 책을 제공하고, 동시에 회사에서 직접 하기 어려운 거래를 대행하시는 거예요. 만약 회사 직원들이 거처나 어떤 도움이 필요해 요청을 할 때, 여러분은 그 부탁을 거절하실 수 없어요.

대신 여러분들도 얻는 게 많죠. 더 좋은 무기, 더 많은 총알, 광범위한 지식, 보다 높은 생산량을 자랑하는 종자, 더 저렴한 솜, 옷감, 약, 소금⋯⋯.”

순간 이정배를 비롯해 방 안의 모든 주민이 놀랐다.

가까스로 자급자족하는 거점의 입장에선 무기와 총알은 물론 솜, 옷감, 약, 소금 모두 부족한 물자였다. 매일 어디로 가서 이것들을 얻어야 할지, 어디서 거래해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예전엔 발굴된 폐허 도시에서 얻을 수 있었다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유적 사냥꾼과 황야유랑자들이 오가며 비교적 안전한 유적 내의 생활필수품은 이미 다 바닥 난 상태였다.

이로 인해 해자 마을 주민들은 더 위험한 지역을 뒤지거나 다른 거점을 찾아가 거래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해자 마을은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고, 오직 그들의 신뢰를 얻은 극소수 사람들에게만 구체적인 위치를 알려줬기 때문에 거래량에도 제한이 따랐다.

침대 머리맡에 기대듯 누운 전두하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합리적인 것 같은데⋯⋯. 그리고?”

장목화는 정색하며 말했다.

“회사에서는 20여 명 정도의 무장 직원들을 이곳에 주둔시켜 마을의 경비 대원 훈련을 돕고, 그들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 겁니다.”

다시 주민들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경계심을 드높이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정보 제공과 거래 보조, 보호 제공은 모두 자신들의 핵심 이익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장 직원들이 해자 마을에 주둔한다는 것은 실질적인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곳의 주민들이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는 문제였다.

이정배가 입을 열기 전, 장목화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전 이미 해자 마을의 위치를 회사에 보고했습니다.”

그녀는 이 폭탄 발언을 던지고 주민들의 얼굴을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감히 장목화와 눈을 마주치려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분분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중 누군가는 원망의 눈길로 백새벽을 노려보기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백새벽이 반고 바이오 사람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왔다는 건, 촌장의 믿음을 원수로 갚은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협상의 여지는 없었다. 그 거대한 세력이 작은 거점 하나 파괴하지 못할 리 있겠는가. 주민들은 반고 바이오 우호 협약 제의를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단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한편, 옆에서 용여홍은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기억으론 장목화는 백새벽에게 해자 마을의 구체적인 위치를 회사에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장목화가 상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도 마을의 위치는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다.

이내 용여홍이 성건우를 힐긋 바라봤다. 성건우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면서 입 모양으로만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용여홍은 독순술에 밝지 못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저 짐작만 할 수밖에 없었다.

용여홍이 보기엔 성건우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거짓말쟁이.’

그때, 잠시 고민하던 전두하가 격렬하게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그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조건은 아니군.”

“그렇죠⋯⋯.”

이정배는 느릿하게 숨을 토해내며 맞장구를 쳤다.

다른 주민들도 속속들이 원래의 표정을 되찾으면서 수군거렸다.

“그럼 그 사람은 어디에서 살아? 이 건물에는 방이 많지 않다고. 다른 주민들한테 방을 비우라고 할 수는 없잖아?”

“식량은 알아서 조달하려나, 아니면 우리가 제공해줘야 하나? 그것에 대한 보상은 받을 수 있을까?”

용여홍은 순간 더 의아해졌다. 도저히 현재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마을의 생존이 걸린 문제에 왜 저렇게 하찮고 지엽적인 부분에만 집중하는 거지?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확정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데……!’

시끌벅적한 소란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던 전두하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난 얼마 못 버텨. 이 방과 회의실을 비워서 반고 바이오 사람들에게 제공하면 될 거다⋯⋯.”

백새벽은 황급히 전두하를 위로하고 나섰다.

“촌장님! 촌장님은 무사하실 거예요. 반고 바이오에는 좋은 의사들이 아주 많거든요.”

전두하가 피식 웃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기계 승려라면⋯⋯.”

옆쪽에 있던 성건우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홱 돌려 자신을 째려보는 장목화의 눈빛에 곧바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전두하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주민들을 바라보았다.

“혹시 다른 생각 있나?”

촌장이 이미 승낙한 데다, 이건 자신들의 이익에 피해를 끼칠 일도 아니었다. 이에 다들 고민은 접고 분분히 고개를 내저으며 이의가 없음을 표했다.

전두하는 다시 장목화를 돌아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너희 회사에선 광장에 있는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광장에 있는 그들이란 해자 마을의 중하층에 속한 많은 주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장목화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

“회사 입장에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 귀중한 자원입니다.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주민들 가운데 상당한 이들이 불신과 불만이 어린 표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웃음을 띄웠다.

“회사에서는 매해 어마어마한 공헌을 했거나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이들을 몇 명 골라 대량의 공헌 점수로 포상합니다. 또한 회사의 정식 직원으로 채용해 그에 따른 대우를 누릴 수 있게 해주죠. 저희처럼요.”

청결하고 단정한 외부인들을 보고, 주민들도 점차 흥분하기 시작했다. 회사의 포상은 자신들을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일반적인 주민에게 대량의 공헌 점수를 얻을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이들은 반고 바이오의 정식 직원이 되었을 경우의 이점에 대해선 아직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그저 지금 이 구조팀원의 모습을 통해 그들과 자신 사이의 차이를 절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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