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애쉬랜드의 생태 (1)
며칠 후, 오전 9시. 반고 바이오 지면 구역 주차장.
“이번에도 우리 오랜 동료랑 함께하게 됐네. 이미 수리가 끝났나 봐.”
장목화가 공간이 충분한 녹회색 지프를 가리켰다.
이내 그녀는 팀원들을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상당히 흥분해 있는 성건우와 달리 백새벽은 조용했고, 용여홍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임무 계획서는 다 봤지? 계획된 노선에 대해 의문 사항 있어?”
“없습니다!”
성건우와 백새벽은 곧장 큰 소리로 답했다. 백새벽도 이젠 구조팀에 막 들어왔을 때의 어색함을 상당히 떨쳐버린 듯했다.
“없습니다.”
용여홍은 여전히 힘이 죽 빠져있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그에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트렁크를 열었다. 그녀가 안쪽에 실린 물건들을 가리키며 차례대로 설명을 이었다.
“무기도 전이랑 같아. 아이스모스 권총, 연합 202, 오렌지 컴퍼니 소총,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 폭군 수류탄.
음, 부족한 화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내가 이번에 견착식 반장갑 개인 바주카포도 신청했어. 이거 이름은 사신. 각각 총기에 들어가는 탄약도 충분해. 거기에 흔히 볼 수 있는 규격 총알들도 있고.
식량은 전보다 더 많이 챙겼어. 해자 마을에 들른 후 곧장 빨리 위드 시티로 가야 하니까.
도중에 시간은 낭비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쪽 정보요원이 계속해서 조사하고 있을 테니 우리가 없더라도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잖아.
원래 사람 구하는 일은 불 끄는 거랑 같아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거기다 겨울이라 야외에서 식량 구하기도 쉽지 않고 말이야. 그럼, 질문?”
백새벽, 용여홍은 고개를 저었지만, 성건우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언제 출발합니까?”
“⋯⋯지금.”
장목화가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 * *
구조팀은 예전처럼 다들 지프차에 올랐다. 첫 운전자는 장목화였다.
몇 차례 검사를 거친 끝에, 지프차는 묵직한 금속 대문 밖으로 나가 애쉬랜드에 이르렀다.
그때와 달리 미리 선글라스를 낀 구조팀은 아침 햇빛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장목화도 팀원들이 주위 경관을 감상할 수 있게 조용히 차를 몰았다.
그러다 회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순간, 그녀가 갑자기 핸들을 틀었다.
“팀장님, 길 잘못 든 거 아닙니까?”
용여홍은 태양을 보고 방향을 재차 확인했다.
“아니야.”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용여홍은 아무래도 의아하다는 듯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길은 임무 계획서에 표시된 길과 다른데요?”
장목화는 입꼬리를 씩 말아올렸다.
“그건 부부장님을 비롯한 상관들을 속이기 위한 거였어.”
“왜요?”
용여홍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장목화는 백미러를 통해 성건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생명 제례 교단에는 애쉬랜드 위에 사는 교도도 있을 거야. 그 종교는 분명 밖에서 안으로 스며들어 온 것일 테니까.
혹시 회사 내부에 잠복해 있을 교도가 우리 임무 계획서를 몰래 입수해 지상에 있는 동료에게 발설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처음부터 임무 계획서에 적어놓은 노선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어.
하하, 너희들에게 굳이 임무 계획서를 읽어봤냐고 물은 건 더욱 그럴듯한 연기를 하기 위해서였지.”
보조석에 앉은 백새벽은 잠시 생각하다 장목화에게 물었다.
“팀장님, 그럼 팀장님은 회사 고위층 관료 중에 아직 생명 제례 교도가 남아있고, 우리에게 떨어진 이번 임무는 함정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장목화가 웃었다.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잖아. 무슨 준비라도 해두는 편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존경심 어린 눈빛으로 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면, 성건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찬란한 햇빛 아래, 또 한 번 방향을 튼 지프는 거침없이 황야로 나아갔다.
* * *
반고 바이오, 아무도 없는 방 안.
야구모자를 쓴 엄기범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의 불은 꺼져있었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주위 벽에 붙은 액정 화면들 덕분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액정 화면 하나하나가 한데 모여, 각 층과 다른 구역들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번득이며 변하고 있는 화면의 빛 속, 엄기범은 이 방의 면적 중 최소 3분의 1을 차지하는 기계를 마주한 채 고개를 숙였다.
“성사.”
곧이어 확성기로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전자 합성음이 흘러나왔다.
- 발각되지 않은 교도들에게 앞으로 석 달간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고 알려.
“예, 성사.”
엄기범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 뒤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는 벽에 걸린 수많은 화면에 떠오른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다.
야구모자를 쓴 채 오명훈과 접촉한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495층에 도착한 그, 성건우와 대치하고 있는 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 황급히 도망치는 그, 어딘가에 숨어 전화를 거는 그⋯⋯.
눈이 휘둥그레진 엄기범은 엄청난 긴장감에 반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몇 초 후, 액정 화면에 수많은 성건우가 떠올랐다.
능력을 시험해보는 모습, 카메라에 대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모습, 손전등으로 카메라 렌즈를 비추거나 오명훈과 구석에서 대화를 나누던 모습, 교양 없는 손짓, 또 물구나무를 선 채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
엄기범은 순간 머리가 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낮게 읊조렸다.
“성사⋯⋯.”
이윽고 다시 무감정하게 식은 서늘한 전자 합성음이 방 안을 채웠다.
- 내가 말했던 것처럼, 난 언제나 너희들을 주시하고 있다.
* * *
구조팀이 하비스트 타운에서 막 돌아왔을 때에 비해, 그새 황야의 풍경은 더욱 황량해졌다. 하룻밤 새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진입한 것 같았다.
“곧 눈이 오려나?”
용여홍이 창밖으로 펼쳐진 납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엔 기대감이 가득했다. 여태까진 교과서나 슬라이드에서만 설경을 본 탓이었다.
“작년 이맘때쯤에도 눈이 내렸었지.”
장목화가 차를 몰며 대꾸했다.
보조석에 앉은 백새벽이 백미러를 힐끗 바라보았다.
“늪 북쪽에는 벌써 눈이 몇 차례 왔을지도 몰라.”
빙원과 맞닿은 검은 늪 황야 최북단은 꽁꽁 얼어붙은 세계였다. 하지만 검은 늪 황야의 면적은 굉장히 넓었기 때문에, 늪 남쪽 구역의 날씨는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았다. 늘 사계절이 또렷이 구분되어 있었다.
“온 세상이 흰 눈에 뒤덮인 광경을 꼭 좀 보고 싶은데.”
용여홍이 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며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똑바로 앉아 있던 성건우가 곧장 토를 달았다.
“아무래도 불길한 이야기인데.”
“왜!”
용여홍은 이 나쁜 자식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단 걸 잘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반문했다. 불길, 재수, 운명. 이것들은 그가 굉장히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단어였다.
성건우는 피식 웃었다.
“생각해봐, 온 대지가 폭설로 뒤덮여 버린 상황에 어떤 행운이 찾아와주길 바라는 거야?”
“하긴⋯⋯.”
용여홍도 성건우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장목화가 끼어들었다.
“매해 겨울마다 얼어 죽는 황야유랑자의 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야. 눈은 그들에게 재난과 다르지 않지. 안 그래, 새벽아?”
“맞아요. 수많은 거점의 집들은 장기적으로 방치된 까닭에 눈이 내리면 폭삭폭삭 무너져내리죠.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사람도 얼마 안 되는 마당에, 난방을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백새벽은 습관처럼 목에 두른 회색 스카프를 꼭 쥐었다.
잠시 침묵에 빠진 용여홍이 한참 뒤에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회사가 낫네.”
어찌 됐든 직원들에게는 겨울을 날 옷이, 따뜻한 물이 든 부대가 있었다. 등급이 높아지면 에너지 배급량도 늘어나서 한두 시간 정도는 어디에선가 구해오거나 구입한 히터를 틀 수도 있었다.
그러다 용여홍은 반고 바이오를 언급하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건에 돌연 잔뜩 겁을 먹었다.
“팀장님, 우리 임무 계획서가 정말로 생명 제례 교도의 손에 들어갔다면, 지상의 사교도들은 해자 마을에 매복해있지 않을까요?”
노선은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목적지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면 일단 미끼를 이용해 시험해봐야겠지. 그 영광스러운 임무는 너한테 맡길게.”
답을 가로챈 건 성건우였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용여홍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기까지 했다.
“……왜 나야?”
일단 용여홍은 굉장히 위험할 그 일이 무서웠다. 또한 그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팀의 최약체가 자신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약체가 어떻게 미끼 역할을 감당하겠는가.
용여홍이 봐도, 자신은 팀장과 백새벽과 비교한다는 게 미안할 정도로 나약하고 열등했다.
정신력과 담력 등 여러 능력을 네 개로 나눈다면 최하 4등급이 용여홍, 3등급은 공백, 장목화와 백새벽이 공동 2등급, 성건우는 단독 1등급이었다.
용여홍은 이렇듯 약하기 그지없는 자신이 미끼 역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거란 걱정을 안고 있었다.
이내 성건우가 엄숙하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넌 딱 봐도 미끼잖아.”
“⋯⋯.”
용여홍은 한동안 그게 대체 무슨 논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여홍이 겁주지 마!”
결국 운전하던 장목화가 웃으며 성건우를 말렸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용여홍에게 이야기했다.
“여홍아, 하나만 묻자. 회사 사람들은 해자 마을이 어딨는지 알고 있을까?”
“모르죠.”
무의식적으로 대답부터 한 용여홍이 깨달음을 얻은 듯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용여홍도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해자 마을은 구세계가 파괴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상당히 안정적으로 세력을 유지해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비밀스러운 곳이라 외부인이 쉽게 찾을 수 없었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또한 장목화는 해자 마을에 대해 보고할 때 의도적으로 그곳의 구체적인 상황은 숨긴 채, 그저 황야에서 그들의 사냥 조와 우연히 만났다고만 보고했다. 상황 파악이 된 용여홍은 곧 민망하다는 듯 슬며시 웃음을 보였다.
“깜빡 잊고 있었네요.”
“여홍아, 넌 아무래도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패닉에 빠진다는 게 문제야. 앞으로는 일단 침착하고 생각을 좀 하는 게 좋겠다. 그래도 생명 제례 교단의 외부 교도가 목적지에서 매복해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다니, 겨우 두 번째 작전에 나선 사람치곤 아주 훌륭한데?”
장목화가 조언과 동시에 위로를 건넸다.
그녀의 칭찬에 순간 용여홍의 자신감도 배가되었다. 잠시 생각을 더 하던 그가 갑자기 흥분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럼 위험 요소는 해자 마을이 아니라 위드 시티에 잠복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네요?”
구조팀의 예정된 목적지는 해자 마을과 위드 시티, 이 두 곳이었다.
위드 시티는 반고 바이오, 퍼스트 시티, 화이트 기사단 이 세 개의 세력 사이에서 해자 마을보다 잘 알려진 비교적 유명한 도시였다. 여러 유적 사냥꾼과 황야유랑자들도 잘 알고 있어, 별 무리 없이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아주 예리한데? 계속 이렇게만 해!”
성건우는 이번에도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답을 가로챘다.
“그렇지? 진짜 예리하지? 응⋯⋯? 잠깐만. 근데 내가 왜 흥분한 거지? 그것도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잖아!”
용여홍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성건우, 넌 왜 그렇게 흥분한 건데?”
장목화는 또 한 번 성건우를 질책한 뒤, 용여홍에게 답을 주었다.
“잘했어, 그렇게 빠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주 훌륭한 모습이야. 앞으로 우린 어떻게 해야 우리 정체를 들키지 않고 위드 시티에 들어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회사 정보요원에게 아무 문제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해.
하하! 근데 급할 필요 없어. 아직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는 이르니까. 일단은 해자 마을 일부터 처리하자고.”
“예, 팀장님!”
용여홍이 큰 소리로 답했다. 그도 자신이 점차 믿을만한 팀원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