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10화 (110/649)

110화. 우호 협약

장목화는 계속 그를 보며 물었다.

“그들이 너한테 곧장 무심병을 감염시키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건 어쩔 도리가 없을 때 쓰는 최후의 방법인가? 너를 습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두칠 성사. 그러니까 박주천에게는 스스로 희생할 생각이 없었나? 오명훈과의 대화 중에 잊어버린 부분은 없어? 생명 제례 교단과 관련된 일 중 잊어버린 건?”

그녀는 성건우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질문을 이어나갔다.

“아뇨, 그런 기억들은 모두 완전합니다. 전후좌우 기억들 다 완벽해요.”

성건우도 진지하게 답했다. 그 역시 어젯밤 이미 이 부분에 대한 확인을 다 마친 듯했다.

“보아하니 기억을 지우는 능력에는 상당한 제약이 따르는 것 같은데. 어쩌면 2~3분 정도만, 그리고 한 번에 한 부분만 지울 수 있는지도 몰라. 두칠 성사가 수많은 감시 자료를 다 파괴해버리지만 않았어도 널 습격한 그 사람 흔적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음, 이따 이 내용도 상부에 보고해야겠어.”

장목화는 이내 어젯밤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상세하게 전한 뒤 다시금 말을 덧붙였다.

“사실 아주 이상한 부분이 하나 있어. 오명훈이 너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안 했대. 너랑 대화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없어.

원래는 그가 같은 각성자이자 신인류인 너를 일부러 숨겨주려고 하는 거라 생각했거든? 어쩌면 오명훈은 꽤 인간적인 사람이겠구나, 생각도 들었고. 뭐, 그 사람한테는 같은 인간으로 인정되는 존재가 많지도 않겠지만.

그런데 이제 보니까 너를 습격했던 그 사람한테 너랑 관련된 기억을 삭제당한 게 아닌가 싶어.”

성건우는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그랬을까요? 알고 있는 대로 둬도 상관없었을 텐데.”

“나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생명 제례 교단의 고위층에서는 오명훈이 신 인류파를 일으킬까 봐 걱정했는지도 모르지. 당시 그들은 아마 꽤 자신 있었을 거야. 일 처리도 아주 세심하게 하려 했겠지.

하지만 뜻밖에도 네 전투력은 그들 상상 이상이었고, 계획은 중단할 수밖에 없었겠지. 네가 후속 습격을 받지 않았던 것도 아마 그 이유였을 거야.

이제부터는 회사에서 무엇을 밝혀내느냐에 달려있어. 하하! 적어도 여태까지는 네가 각성자라는 비밀이 유지되고 있는 거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성건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는 감시카메라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어요.”

장목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생명 제례 교단에서 교단의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으리라 확신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어. 성사가 줄곧 교도들을 주시하고 있다고 떠들어 댔던 것도. 감시부 책임자가 교단의 성사일 줄은 누가 알았겠어? 이건 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밀리에 전도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겠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성건우의 얼굴에 약간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팀장님, 그 감시 자료들, 복구할 수 있을까요?”

“현재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아주 아주 어렵다고 하더라. 설마 감시카메라 앞에서 바지라도 벗으면서 그것들 조롱할 생각은 아니지?”

장목화는 웃으며 물었다.

순간 성건우가 장목화를 위아래로 몇 번 훑어보았다.

“……팀장님. 변태십니까?”

장목화가 이를 악물었다.

그 사이 성건우는 다시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그 앞에서 우스운 표정이나 짓고, 손전등으로 비춰보기도 하고 손가락 욕이나 좀 해줄 생각이었죠.”

입을 꾹 다물고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내젓던 장목화가 몇 초 후에야 짧은 숨을 토해냈다.

“네 생활은 정말이지 참 다채롭구나⋯⋯.”

그 순간, 갑자기 구조팀 방에 있는 유일한 유선 전화가 울렸다.

장목화는 성건우에게 조용히 있으라는 손짓을 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 부장님⋯⋯. 와달라고요?”

금세 수화기를 내려놓은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말했다.

“제니 부장님이 날 찾네. 생명 제례 교단, 아니면 해자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려는 모양이야.”

* * *

646층, 안전부 부부장 사무실.

장목화는 노크한 뒤 안으로 들어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있는 그녀의 직속상관 제니는 밤색 긴 머리에 같은 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겉보기엔 30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늘 제니는 흰색 셔츠에 잘 재단된 짙은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외투 길이는 겨우 배를 가릴 정도였고, 달려있는 단추도 두 개뿐이었다.

안전부 부부장은 차림새로만 보면 살짝 날카로운 사람인 듯했지만, 구불구불한 밤색 머리와 얼굴에 어린 엷은 웃음기는 따뜻하고 친밀하며,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곧이어 제니가 하늘색 찻잔을 들고 차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 뒤, 장목화를 보며 여유롭게 웃다가 책상에 있던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몇 가지 중요한 일 때문에 불렀어. 이건 네가 전에 보고한 상황에 대한 심사 결과야. 이제 너희는 보안 등급에 더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해.

정보마다 보안 등급이 다 달라야 해. 일반 직원들과 얘기할 때 언급해도 되는 정보, 특정 등급 직원들하고만 공유해야 하는 정보, 허가받지 않는 이상 오직 내부에서만 토론해야 하거나 상응하는 권한을 가진 고위층 직원들에게만 알려야 하는 정보가 뭔지 결정해야 해.”

장목화는 그 서류를 건네받으려 오른손을 내밀었지만, 제니는 그저 흘러내린 머리만 귀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분간 이 서류를 사용할 필요는 없겠어.”

“예?”

장목화는 바로 되물으면서도 제니의 의중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제니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하는 대신, 장목화에게 해당 서류를 넘기곤 책상에 양쪽 팔꿈치를 괴었다.

“생명 제례 교단 사건은 아주 잘했어. 이에 대한 포상은 기초적인 상황 파악이 끝난 후 지급될 거야. 정확한 지급 시점은 조사의 진도에 따라 결정되겠지. 그렇게 빨리 마무리되진 않을지도 모르니 너무 조급히 굴진 말고.”

그리고 제니가 잠시 고민하다 덧붙였다.

“성건우란 팀원에게는 앞으로 이삼 일간 진행될 각종 심문에 잘 협조하라고 전해. 이 사건은 관리층 직속 작전반 담당이라 난 끼어들 수가 없어.”

작전반 감독과 부부장 제니는 모두 M1급 관리층이었다.

“예, 잘 전달하겠습니다.”

장목화는 대답하면서도 약간 죄책감이 들었다. 성건우가 아무 말썽도 피우지 않고 심문을 잘 받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성건우 스스로도 자신하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제니는 장목화의 속내를 하나도 읽지 못한 채 화제를 돌렸다.

“이사회에서 어젯밤 긴급 임시 회의를 열었어. 그 회의에서 해자 마을 건도 결정됐어.”

“어떻게 됐습니까?”

장목화는 그 해자 마을에 관한 걱정과 관심을 숨기지 않았다.

제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우호 협약을 맺기로 했어.”

장목화는 곧장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호 협약은 공식적인 표현이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종속 관계를 형성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해자 마을을 통째로 수용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소극적인 방안이었지만, 장목화는 이 정도라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제니는 말하는데 그리 급급해하지 않았다. 그냥 후후 불어가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다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해자 마을과 일련의 거래를 진행할 거야. 작전팀 하나를 보내 무장 인원 훈련에 도움을 주고, 더 효과적인 지휘 체계도 건립할 예정이야. 만약 그들이 신청한다면 민간인 직원을 파견해 내부 관리 메커니즘 수립에 협조하고, 여러 갈등 요소가 폭발하기 전에 제거할 용의도 있어.

그 후에는 사람들을 보내 천천히 좋은 종자를 선별하고 그들에게 정식으로 회사에 채용될 기회를 주기도 할 거야. 그렇게 10년이 지난 후에도 해자 마을이 우리와 우호 관계를 이어나가길 원하면, 그리고 그간 그들이 보인 모습이 인정된다면 마을 전체를 수용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겠지.”

“정말 잘됐네요.”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는 아주 노련하고도 신중한 방안이자 해자 마을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법한 방안이었다.

그때, 뭔가를 알아차린 장목화가 곧바로 물었다.

“부장님, 혹시 저희를 해자 마을 교섭 담당으로 보내실 생각이신가요?”

당분간 정보 심사 서류를 쓸 필요가 없을 거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터였다. 제니도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역시 너랑 얘기하는 건 참 편하다니까? 해자 마을 건을 중개한 건 너희들이니 당연히 너희가 가야지. 사나흘 뒤에 너희는 무선 통신기 한 대와 그 배터리를 가지고 거기로 가면 돼.

만약 협상이 달성된다면 그 기기를 두고 주파수를 남겨, 해자 마을 주민들에게 회사로 전보를 보내게 해. 너희들에게 미리 알려준 암호가 해자 마을 전보로 도착한다면 협상이 성공적으로 완료됐다는 뜻이겠지. 만약 협상이 달성되지 않았다면 그 무선 통신기를 가지고 위드 시티로 가면 돼.”

“위드 시티요?”

장목화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위드 시티는 승려 황원 가장자리에 붙은 퍼스트 시티의 변방 도시로, 상대적으로 개방돼 있어 수많은 유적 사냥꾼이 활동하는 곳이었다.

구조팀이 전에 만난 오수혁과 안여향 일행이 바로 그곳 출신이었다.

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너희들 두 번째 임무야. 너도 알겠지만, 너희를 제외한 다른 구조팀들도 있어. 그중 한 팀이 위드 시티에 진입해 돌아오겠다는 전보를 보낸 후에 연락이 끊겼어. 연락이 끊긴 지 오늘로 벌써 3주네.

우린 위드 시티에 있는 회사 정보요원을 통해 조사도 해봤는데 여태까지 수확이 없어. 너희 임무는 그 정보요원과 함께 구조팀 실종의 진상을 찾고 그에 대한 적절한 보복을 하거나, 해당 구조팀이 찾아낸 새로운 정보를 토대로 본래 역할을 수행하는 거야.”

본래의 역할이란 구세계 파괴 원인 조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장목화는 당장이라도 나서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저희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아닌가요? 저희 팀이 결성된 지 겨우 석 달 조금 넘었습니다. 게다가 지난 임무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제니는 장목화를 응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난 널 믿어. 또한 회사에도 일정한 힘이 있지. 그 힘을 잘 이용해봐.”

“어째서 저희 같은 신생 구조팀에게 이 일을 맡기시는 거죠? 다른 구조팀이나 다른 정보요원을 보낼 수도 있을 텐데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질문하던 장목화가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부장님, 혹시 저희가 잠시 회사를 떠나있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제니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러곤 책상에 걸쳐둔 팔꿈치를 내리고 간단히 이유를 설명했다.

“역시 장목화야. 생명 제례 교단에 대한 조사, 그다지 순조롭지 않아. 수많은 단서가 중간에 끊겨버렸잖아. 하루 이틀 만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우리는 숨어있는 교도들이 상황이 어느 정도 잠잠해진 뒤 보복을 할까 걱정하고 있어. 목화, 네가 보기엔 가장 먼저 보복당할 대상이 누구 같아?”

“저랑 건우요.”

장목화의 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래, 맞아. 그래서 너희를 미끼로 쓸 수도 있지만 난 너희가 그런 위험을 부담하길 바라지 않아. 넌 그나마 낫지. 출입이 엄격하게 관리되는 관리층 구역에 살고, 네 아버님께서도 암암리에 늘 널 보호하고 계시니까. 하지만 성건우는 위험해. 게다가 다른 팀원들이 화풀이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고.”

여기까지 말을 잇던 제니가 뒤로 몸을 기대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우린 가장 간단한 선택을 하기로 했어. 너희를 지상으로 보내서 이 소용돌이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는 거지. 날 믿어, 생명 제례 교단 사건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골치가 아파.

그럼 이만 가봐. 가서 지상에서 몇 달간 있다가 봄이 되면 돌아와. 그때쯤에는 문제가 다 해결되어 있을 테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