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소란스러운 밤 (2)
지하 빌딩 5층 관리구역, 어느 방 안.
오명훈은 천천히 눈을 떠 책상을 마주했다. 둘러보니, 자신은 현재 책상 앞에 앉아있고 양손은 의자 팔걸이에 단단히 고정돼 있었다.
책상 맞은편엔 아주 침착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깔끔한 차림에 각양각색의 휴대용 의료 기기를 가지고 있는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전자 개조를 받은 인간 같았다. 옆쪽에는 전문 구급 설비들도 놓여 있었다.
“내가 그렇게나 무섭나?”
당황스럽고 분노에 차 있던 오명훈의 감정이 순간 누그러졌다. 그는 자신 같은 신령의 총아가 이렇게 쉽게 붙잡힐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붙잡혀 올 당시, 그는 어떤 반항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중년 남자는 오명훈의 나무 조각 같은 눈을 바라보다 침착하게 답했다.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말이 있지.”
오명훈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불쑥 웃음을 터뜨렸다.
“뭘 알고 싶은 거지?”
“음?”
중년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명훈은 뒤로 좀 기대고 싶었으나 양손이 단단히 고정된 까닭에 자세를 고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계속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신인류의 투항을 거절할 조직은 없을 것 같은데. 내 능력과 그 능력을 얻은 과정은 당신들한테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중년 남자가 대꾸했다.
“아주 똑똑하네. 그래도 교단 교도인데, 그다지 열성적이지는 않나 보군.”
오명훈이 웃었다.
“난 사명을 믿을 뿐이야. 다른 교도들은 나랑 아무 관계도 없어.”
중년 남자는 느릿하게 숨을 토해냈다.
“그럼 말해봐, 두칠 성사는 누구지? 넌 또 어떤 성사들의 실제 정체를 알고 있나? 거짓말은 하지 마라. 회사 같은 거대한 조직에 다른 각성자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오명훈의 안색이 살짝 진지해졌다.
“이미 결정 내렸으니 어떤 것도 숨기지 않겠다.”
* * *
349층, C 구역 12호. 장목화의 집.
순간 산뜻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진시온이 장목화보다 먼저 일어났다.
“나한테 온 전화일 거야.”
“좋은 소식인 것 같네.”
장목화도 미소를 지었다.
진시온은 옆쪽 작은 탁자에 놓인 유선 전화 수화기를 들고, 간단히 신분을 밝혔다. 한참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뒤를 돌았다.
“두칠 성사의 신분이 밝혀졌어. 전략위원회의 감독 책임자 박주천, D9급 직원이래.”
“감독 책임자? 역시⋯⋯.”
장목화는 그의 정체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일찍이 감독부에 생명 제례 교단의 교도가 잠복해 있을 것이며, 그 직원의 등급 역시 낮지 않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면 오명훈도 감시 상황을 그렇게 또렷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테고, 완벽해 보이는 작전을 짜지도 못했을 터였다. 또한 심도환의 신고가 그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발각된 것도 교단에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컸다.
여태 성건우와 장목화의 대화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건, 매번 감시받지 않는 공간인 구조팀 방에서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재 남은 유일한 문제는 생명 제례 교단이 심도환에게 무심병을 일으킨 그 방법이었다.
진시온은 장목화의 표정을 보고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다 예상 하고 있었나 봐?”
“어느 정도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어.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거든. 그래서 팀원한테도 조사를 중단하라고 한 거야. 들킬 가능성이 크니까. 어쩐지……. 인도자가 성사는 늘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었던 거야.”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가 순간 뭔가를 떠올렸다.
“건우가 오명훈을 찾아가서 얘기했을 때도 그 주위에 분명 카메라가 있었을 거야.”
진시온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근데 걱정하지 마. 내가 너를 보호하러 이곳에 왔을 때 다른 동료는 그 사람을 보호하러 갔으니까.”
* * *
창가로 바깥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었다. 그 불빛이 내려앉은 책상 앞엔 성건우가 앉아 있었다. 그는 지금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옷을 보는 중이었다.
“언제 뚫렸지?”
성건우가 왼쪽 어깨와 가슴팍 사이에 난 작은 구멍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던 그때, 뭔가를 느낀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에 안으로 훌쩍 뛰어든 인영 하나가 비쳤다.
상대는 중년 여성이었다. 테릴렌 셔츠를 입은 그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데다 등은 심하게 굽어있었다. 혼탁한 눈은 잔뜩 충혈돼 있기까지 했다.
흡사 미친 야수처럼 보이는 그녀는 성건우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생명 제례 교단 지도자, 임결이었다.
* * *
전략위원회 산하 감독부, 책임자 사무실.
쾅!
관리층 직속 작전반 팀원들이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달려들었다.
방 안 등불 아래, 길게 늘어진 한 인영이 이들을 맞았다.
검은색 상의에 검은색 긴 바지, 검은색 가죽 구두를 신은 남자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남자는 작전반 팀원들이 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그 여파로 인해 몸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349층 C 구역 12호.
다시 전화가 울리고, 진시온은 한참 상대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그의 표정이 무겁게 변한 걸 보고, 장목화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진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495층 인도자 임결이 무심병에 감염됐고 이미 통제됐대. 두칠 성사 박주천은 모든 감독 파일을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사무실에서 자살했고.”
장목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굉장히 빠르네.”
진시온이 말을 이었다.
“박주천이 남긴 유서에 따르면 자신에게는 남을 미치게 하는, 그래서 무심병에 감염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각성자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으로 직접 심도환과 임결을 처리했다고 했대. 모든 게 발각된 것이니만큼 책임을 피할 수 없을 테니 교단과 함께 묻히기로 결정했다는 거야.”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장목화가 물었다.
“사명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언급한 게 없고?”
“유서에는 안전부에서 근무하던 10년 동안 수시로 지상에서 활동했다고 적혀있대. 이 점은 그 사람 이력과도 맞아떨어지는 모양이야.”
진시온은 어느새 원래 그 침착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그가 물었다.
“넌 박주천의 죽음과 유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무심결에 볼을 부풀리려던 장목화는 순간 재빨리 체면을 생각하며 살짝 미소만 지었다.
“유서가 그렇게 상세하게 쓰인 것을 보면. 모든 사실을 밝히고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지려 했던 것 같네.”
“역시 똑똑한 사람끼리 생각은 통하네.”
진시온은 엄지를 세워 보인 후, 잠시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하지만 오명훈이 밝힌, 상대적으로 중요한 교도들이 전부 다 붙잡히고 나면 오늘 작전은 거의 그대로 끝나버릴 거야. 박주천의 죽음과 훼손된 감시 자료 때문에 더는 조사를 진행할 수가 없으니까.
앞으로는 오명훈의 자백과 그가 평소 어울렸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더 상세한 조사를 진행하는 수밖에 없어. 기술부에서 유용한 감시 영상을 얼마나 복구할 수 있을지도 주목해야 할 테고.”
장목화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날 찾아. 또 무슨 소식이 더 있으면 제일 먼저 나한테 알려줘야 해.”
씩 웃는 그녀를 보고 진시온도 웃었다.
“그럼.”
* * *
495층, B 구역 196호.
성건우는 책상 앞에 앉아 손만 뻗으면 닿을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초점은 없었다.
주변엔 라디오 소리가 한창이었다. 라디오 프로그램 출연자들의 한가로운 잡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반고 바이오 직원들에게 매우 익숙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 직원 여러분, 뉴스캐스터 허정민입니다. 뉴스 속보를 알려드립니다. 회사는 엄밀한 조사를 거쳐 오늘 저녁 파괴 분자 한 무리를 체포했습니다.
성건우는 눈동자를 살짝 굴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 속보가 전달된 이후, 반고 바이오 내부도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성건우는 15분 일찍 647층 14호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장목화는 먼저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성건우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며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는 팀장이 무슨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습격당할 뻔했습니다.”
장목화가 원래 하려던 말도 순간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녀는 정말로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뻔했다니?”
성건우가 왼쪽 어깨와 가슴팍 사이를 가리켰다.
“여기 전에 없던 구멍이 나 있어요. 옷을 관통한 구멍이 방탄조끼에서 멈춰있습니다.”
뒤이어 그가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이쪽 팔꿈치, 갈비뼈, 다리 옆쪽에도 알 수 없는 멍과 찰과상이 났습니다. 팀장님과 격투 훈련으로 생긴 상처는 아닙니다. 전 어제 훈련에 참가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예리하네. 그 흔적들 언제 생긴 거야?”
성건우도 일찍이 이 문제를 고민했던 터라 즉각 답이 나왔다.
“팀장님과 헤어진 후에 방에 들어가기 직전입니다. 근데 B 구역에 이른 순간까지밖에 기억이 없네요. 그다음으로 기억나는 건 방문 앞에 섰을 때에요. 그 사이 2~3분 정도에 대한 기억은 공백입니다. 당시 기이한 사람이 제 곁을 스쳐 지나갔었는데 생김새는 제대로 못 봤어요.”
“얼마나 기이했는데?”
장목화가 질문을 이어나갔다.
“노래 실력이 아주 끔찍했습니다.”
성건우의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장목화는 잠시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일 수 있지. 그 외에는?”
“야구모자를 아주 푹 눌러쓰고 있었어요. 제가 부르니까 토끼처럼 달아나던데요? 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얇은 금속관과 다른 뭔가를 줍기도 했습니다. 그게 제 옷을 뚫은 무기가 아닐까 의심됩니다.”
성건우의 설명을 듣고, 장목화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토끼가 너한테 꽤 깊은 인상을 남겼나 보네. 왜 그때 바로 안 쫓았어?”
성건우는 솔직하게 답했다.
“제 평가가 무서워서 도망친 줄 알았어요. 노래 실력이 별로였으니까요.”
장목화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다.
“⋯⋯넌 진짜 장단이 확실한 사람이구나? 네 그 예측할 수 없는 사고방식. 물론 현재 상황에 개의치 않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줄 때도 있지. 근데 또렷한 단서도 놓쳐버리는 때도 있네.”
성건우의 대꾸가 있기 전, 장목화가 다시 또 물었다.
“기억이 비어있는 시간이 2~3분 정도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뭐야?”
성건우는 외려 이상하다는 듯 팀장을 바라보았다.
“팀장님은 처음으로 손목시계가 생겼을 때 수시로 쳐다보지 않으셨나요?”
성건우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장목화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기꺼이 또 그렇게 인정하기도 싫었다.
“⋯⋯근데 너 손목시계 얻은 지도 벌써 며칠이나 지났잖아. 그걸 얻고 하비스트 타운에 갔었을 뿐만 아니라 회사로 돌아오기도 했고. 물론, 네 시계는 약간 흠집이 있긴 해도 좋은 편인 거 알아. 그래도 여태까지 한시도 떨어뜨려 놓은 적이 없었는데, 안 질려?”
성건우는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이야기했다.
“수시로 시계를 보지 않으면, 저에게 기계식 손목시계가 있다는 사실을 회사 직원들한테 어떻게 알릴 수 있겠어요?”
“그건 그렇지⋯⋯.”
결국 그에게 설득당하고만 장목화가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는 건, 네가 기습을 당했을 확률은 높지만, 그와 관련된 기억은 없다는 거네. 몸에 남은 흔적을 통해 추측할 수만 있을 거지.
최근 널 습격할 가능성이 가장 큰 건 역시 생명 제례 교단 사람들이야. 그래, 두칠 성사는 너랑 오명훈이 대화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을 가능성이 커. 그럼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겠지.
그들의 목표는 관련된 단서를 지워 조사를 중단시키는 거였을 거야. 널 죽이고 너한테 무심병을 감염시키는 게 그 목표였겠지. 관련된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것도 방법이었을 테고. 네가 습격당한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은 후자랑 연관 지을 수 있어.”
자문자답하던 장목화가 천천히 성건우를 돌아보며 추측을 이어갔다.
“생명 제례 교단은 주도면밀한 살인 방안을 수립할 여유가 없어서, 먼저 기억을 지우는 능력을 가진 각성자를 너한테 보낸 거야. 그 과정에서 격투가 벌어졌고, 결국 임무에 실패한 그 각성자는 어쩔 수 없이 최근의 기억만 지우고 안전하게 도망친 거지⋯⋯.”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치며 장목화의 추측에 동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