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05화 (105/649)

105화. 신인류

저녁 7시.

잠에서 깨어난 성건우는 일단 647층 간이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 495층 활동 센터로 돌아갔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이 없는 구석을 찾아 앉은 그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는 용여홍과 데이트 상대를 발견했다.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용여홍이 이번에 어마어마한 공헌 점수를 들여 옆쪽 물자 공급 시장에서 사탕과 호박씨, 유리병에 든 음료를 샀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보상과 포상을 받고 나니 그의 씀씀이도 꽤 커졌다.

“사치스럽긴⋯⋯.”

성건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내 시선을 돌리자, 귀를 겨우 가릴 정도의 짧은 단발머리 소유자 간시연도 보였다. 그녀는 카드 게임 중인 남편 도종완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번엔 우정현의 죽음으로 많이 불안해 보였지만, 며칠이 지나서인지 그녀는 많이 회복된 것으로 보였다. 얼굴의 혈색도 돌아왔고,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즐거워 보였다. 심도환의 죽음으로 느꼈던 슬픔과 두려움에서도 이미 다 벗어난 듯했다.

잠시 후, 간시연은 고개를 숙여 남편 도종완에게 몇 마디를 건넨 뒤, 그대로 돌아 출입구로 향했다. 공용 화장실에 가려는 모양이었다.

성건우는 때를 놓치지 않고 일어나 걸음을 옮겨 출입구 근처로 갔다.

그곳에서 간시연과 ‘우연한’ 만남이 이뤄졌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성건우를 보고, 간시연은 약간 복잡한 표정을 드러내더니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랑 여홍이가 지상으로 나갔다가 아주 많은 물건을 가져왔다면서?”

동시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성건우 왼쪽 손목에 있는 기계식 손목시계를 힐끔 바라봤다.

“이런 물건은 폐허에 널렸거든요.”

솔직하게 답한 성건우는 그녀가 대꾸하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날, 478층에서 봐서는 안 될 사람을 본 적은 없나요?”

성건우는 우정현이 죽던 날이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이내 안색이 약간 창백해진 간시연은 모기만큼 작은 소리를 냈다.

“지난 며칠 동안 내내 그 일을 생각해봤어. 그때 난 청소 중이었기 때문에 주위 상황에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어.”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의 말이 빨라졌다.

“그 후 우정현이 죽었고, 난 너무 불안하고 두려워서 그 사람을 관찰할 생각도 하지 못했어.”

그리고 다시 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간시연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유일하게 이상하다고 느꼈던 사람이 있다면 오명훈이야. 점심때 식당에서 밥 먹다가 그 사람을 마주친 적이 있어. 내부 생태 구역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든. 어쩌면 병가를 냈을지도 몰라⋯⋯.”

성건우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 사람이 왜 인상에 남는데요?”

이쯤 되니 이젠 그렇게 두렵지도 않다는 듯 그녀의 소리도 약간 커졌다.

“그 사람은 원래 기억하기 쉬운 사람이야. 넌 모르겠지만, 그 사람 눈이 좀 인상적이거든. 눈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뭔가를 빤히 보고 있는 동안엔 다른 뭔가가 바로 옆에 다가갈 때까지 아무것도 눈치를 못 채.”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일은 이미 다 지나간 일입니다.”

간시연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밖을 가리켰다.

“나도 그러길 바라. 나 이만 가 볼게.”

성건우도 그녀를 막지 않고, 돌아서 반대편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나,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몇 마디 한담을 나눈 것처럼 보였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 성건우는 한참 일찍 647층 14호에 도착했다.

조금 기다리자 장목화가 들어왔다.

“제가 더 빨랐어요.”

뭔가 큰 승리라도 한 듯 말하는 성건우를 보고 장목화도 웃음이 터졌다.

“널 자극하고 싶은 생각 따위 없어. 난 집에서 직접 아침을 해 먹거든.”

그녀는 가끔 부모님께 식사를 차려드리곤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성건우를 슬프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장목화는 그냥 화제를 돌려버렸다.

“근데 이렇게 일찍 도착하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어?”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간시연을 만났습니다.”

그는 곧 오명훈이 출근했어야 할 시간에 해당 층의 식당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동시에 오명훈의 눈이 좀 특별하단 사실도 밝혔다.

장목화도 이야기를 듣는 내내 표정이 약간 달라졌다.

이윽고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의심스럽네. 대가를 치른 흔적도 있고. 앞으로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와 관련된 증거와 단서를 찾을 방법을 생각해봐야겠어.”

여기까지 말을 잇던 장목화가 성건우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네 사교 능력을 시험해볼 시간이야! 물론 네 대모의 능력에 대한 시험이 될 수도 있겠지.”

* * *

또 한 번의 야간 당직을 마친 날 저녁, 성건우는 478층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그도, 장목화도 오명훈이 어떻게 생겼는지, 퇴근 후 보통 어디에서 활동하는지, 방은 몇 호인지 같은 건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혹여나 그런 뜬금없는 질문이 생명 제례 교단 내 은밀하게 활동하는 교도의 귀에 흘러 들어가는 걸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괜히 필요치 않은 골칫거리나 과민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될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 예시가 바로 심도환의 죽음이었다.

장목화는 이 사건을 통해 심도환이 만났던 질서 감독실 질서 지도자 중 한 명이 생명 제례 교단의 각성자이리라 의심하고 있었다.

능력을 얻기 위해 지불한 대가는 종종 겉으로 그 흔적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건우의 은밀한 관찰만으론 해당 층의 질서 감독자 중 누구에게서도 또렷한 이상 증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중점적인 탐색 범위조차 확정하지 못했으나 성건우는 그런 문제는 고려치 않고 478층 활동 센터로 향했다. 곧 그곳에서 시작할 정각 뉴스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495층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활동 센터는 퇴근 시간 이후 가장 시끌벅적한 장소였다. 이곳에서는 카드 게임을 하는 사람도,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한데 모여 털실 옷을 짜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성건우는 주위를 쓱, 둘러보았으나 오명훈은 찾을 수 없었다. 눈에 확 띄는 인상이라고 했지만, 그런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성건우는 아무도 없는 구석으로 가 더 자세히 관찰해보았다.

그로부터 20분 정도 흘렀을 무렵, 성건우가 돌연 자세를 바로했다.

출입구에 막 활동 센터로 들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25~6살 정도 돼 보이는 그 남자는 잘 재단된 검은색 트위드 상의를 입고, 매우 짧은 머리를 한 가닥, 한 가닥 빳빳이 세운 상태였다. 깨끗한 얼굴에는 엷은 수염 자국만 남아있었고, 준수한 이목구비는 꼭 조각상 같았다.

한눈에 봐도 태아 때부터 유전자 개조를 받은 신세대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눈에는 약간 문제가 있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듯한 눈에서는 활기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대로 딱 고정된 듯 좌우로 움직이기도 힘들어 보였다.

성건우는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갔다.

“오명훈?”

떠보는 듯한 성건우의 목소리에, 남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남자는 성건우와 아주 살짝 빗겨나 있을 뿐이라, 눈동자만 움직여도 성건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넌 누구지?”

젊은 남자는 간접적으로 자신이 오명훈임을 인정했다.

오명훈과 잠시 마주 보니, 성건우는 그의 눈에 이상이 있단 걸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도 이젠 눈앞의 남자가 오명훈임을 확신했다.

성건우는 좌우를 살피며 이쪽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널 보러 왔어.”

“음?”

오명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건우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봐봐. 너한텐 특수한 능력이 있어. 나한테도 특수한 능력이 있고⋯⋯.”

순간 오명훈의 표정이 묵직해지더니 눈빛도 위험하게 변했다.

동시에 성건우는 호흡이 불편해지고, 심장이 금방이라도 멈출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어갔다.

“넌 비밀 조직의 회원이야. 나도 비밀 조직의 회원이고. 그러니까⋯⋯.”

오명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성건우를 몇 초간 응시하다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너도 달지기의 총아, 교단의 교도구나.”

고개를 돌려 시끌벅적한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턱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나가서 좀 걸을까?”

“좋아.”

성건우는 약간 실망했다. 사이가 이 정도로 친근해졌다면, 그가 적어도 호박씨나 오렌지 맛이 나는 탄산음료라도 대접할 거란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 * *

성건우와 오명훈은 활동 센터를 나와 조용한 구석으로 향했다. 두 사람 모두 천장에서 쏟아지는 하얀 불빛을 맞으며 산책하듯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그때, 한참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걷던 오명훈이 불쑥 물었다.

“넌 언제 각성했지?”

“올해.”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오명훈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점점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난 작년 초였어. 사명의 비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성에 성공하는 사람은 매번 한두 명밖에 안 되지. 심지어는 아예 없을 때도 있고.

우리 같은 각성자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신의 총아이자 독특하고 탁월한 존재야. 내가 너한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나머지하고는 이야기 나눌 가치도 없으니까.”

이내 오명훈이 잠시 뒤돌아 활동 센터를 가리켰다.

“저들을 봤어? 내가 죽이려 한다면 저들은 바로 죽어. 그만큼 평범하고, 멍청하고, 저속하지. 저들의 존재 이유는 우릴 돋보이게 해주려는 것뿐이야. 신세계는 새로운 인류를 위해 준비된 곳이야.”

오명훈이 고개를 틀어 성건우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성건우 역시 웃으며 대꾸했다.

“일찍이 어떤 선사도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어. 하지만 그는 적어도 일반인 노동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지. 오줌을 싸지도, 방귀를 뀌지도, 똥을 싸지도…….”

그러자 오명훈이 미간을 팩 찌푸리며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런 얘기는 할 필요는 없어. 기계는 결국 구 인류를 대체하게 될 거야. 기원의 바다에는 진입했어?”

“이제 막.”

성건우의 답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천부적인 재능이 꽤 뛰어나네.”

오명훈은 다시 돌아서 아무도 없는 구석진 곳으로 계속 나아갔다.

두 사람의 옆으론 수많은 방이 닭장처럼 빽빽하게 자리해 있었다.

오명훈은 고개와 몸을 돌려가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우리 같은 신인류는 이런 곳에 살아선 안 돼. 하지만 걱정하지 마.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위치를 되찾게 될 테니. 우리 머리 위에 자리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명뿐이야.”

성건우는 잠시 오명훈의 나무토막 같은 눈을 응시하다 뜬금없이 물었다.

“네 능력은 심장을 멈추게 하는 거야?”

오명훈은 곧장 답하지 않고 깊은 눈빛으로 성건우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에 성건우의 심장 박동이 비정상적으로 바뀌었다. 점차 숨이 막혀오는 듯한 느낌도 또렷해졌다.

“우정현의 죽음을 통해 추측한 거냐?”

오명훈이 입을 열자마자, 성건우도 비로소 숨이 막히는 듯한 그 느낌에서 벗어났다. 성건우는 곧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뻔하잖아, 안 그래?”

오명훈도 웃었다.

“사실 더 은밀한 방법을 쓸 수도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더라고. 그렇게까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상대였어.”

성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의 말에 대한 동의의 표시인지, 아니면 습관적인 행동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질문이 이어졌다.

“성사가 네게 우정현을 죽이라고 시킨 거야?”

오명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사람, 평소에도 질이 나빴어. 직원들한테 물건의 무게를 속여 팔게 하고, 소량만 공급되는 물건을 숨겨뒀다가 직접 찾아가 부탁하는 사람들한테만 팔았더라고.

그래서 나도 임무를 받아들였어. 그 사람을 죽이려고 미리 병가도 냈지.

그날, 아침을 먹고 활동 센터에 들어갔어. 물자 공급 시장과 나란히 붙은 벽 근처에서 기다렸지. 전략위원회의 어느 직원 한 명이 어느 감시카메라가 아직 작동되고 있는지 알려줬거든.”

반고 바이오 내부의 감시 시스템은 전략위원회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이는 질서 감독부의 권력을 제한하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전략위원회⋯⋯.”

성건우는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도 기억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495층의 인도자 임결이 전략위원회에서 근무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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