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특별 훈련
저녁 식사를 마친 성건우는 곧장 495층으로 돌아가는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고 490층으로 향했다.
그는 능숙하게 이곳의 활동 센터와 물자 공급 시장을 우회해, 그 뒤쪽으로 돌았다. 뒤쪽엔 방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었다. 성건우는 이 여러 방 중에 정 가운데 방 앞으로 갔다.
이 방 앞엔,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가 적힌 현판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제11 고아원》
성건우가 3년간 지냈던 곳이었다.
반고 바이오 내부에는 매 10층, 혹은 20층마다 고아원이 하나씩 있었다. 직계 가족을 잃은 아이는 그곳에서 만 18세가 될 때까지 지내곤 했다.
지금 고아원의 많은 문이 다 활짝 열려 있었다. 하지만 안에 보이는 인영은 두세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다 앞쪽 식당에 간 모양이었다.
이내 성건우는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곧 절름발이 노인의 앞으로 갔다. 노인의 이름은 이지만이었다. 머리가 이미 다 하얗게 세어버린 이지만은 책상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원장님 계십니까?”
성건우의 목소리는 아주 침착했다.
순간 고개를 든 이지만이 성건우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 건우구나⋯⋯. 원장님은 식사하러 가셨다. 앉아라, 곧 돌아오실 거야.”
“괜찮습니다.”
성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이지만의 옆쪽으로 다가갔다.
그쪽 벽에는 검은 외각의 기계가 하나 설치되어 있었다. 공헌 점수 거래를 할 때 쓰는 기계였다.
성건우는 잠시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활동 공간은 상당히 넓었지만 각종 기구는 다 오래된 것들이었고, 설비도 상당히 조악했다. 모든 걸 차례대로 조용히 훑던 그는 전자카드를 꺼내 공헌 점수 거래를 하는 기계에 긁었다.
[50,000]
성건우는 5만이란 숫자를 입력했다. 이체 점수가 어마어마한 까닭에 지문으로 본인 확인까지 해야 했다.
오늘 그가 이곳에 온 건 제11 고아원에 기부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내 이지만이 성건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기부하러 온 거냐? 착하기도 하지, 이제 막 일을 시작한 거 아니었어?”
고아원의 기본 예산은 회사에서 책임지고 있었지만, 그걸론 방과 장소 임대료, 인건비, 아이들을 먹이고 키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에너지 비용을 대는 것만으로도 빠듯한 수준이었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더 나은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직원들의 자발적인 기부가 절실했다.
이윽고 돌아선 성건우가 전자카드를 챙겨 넣으며 웃었다.
“아껴두세요.”
“뭘?”
이지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고맙다는 말이요.”
성건우는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후, 그대로 고아원을 떠났다.
이지만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절뚝거리며 검은 기계 앞으로 다가가 기부 내역을 확인했다.
“5만?”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쳤다.
방금 성건우가 기부한 점수는 오랜 시간 이곳에서 일했던 이지만의 현재 잔고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 * *
495층, 물자 공급 시장.
성건우는 옷감처럼 단가는 높고 팔기에 용이한 물건들을 한 아름 산 뒤, 그것들을 안고 B 구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집이 아니었다. 방향을 꺾어 한참을 걷던 성건우는 문이 열려 있는 방 앞에 이르렀다.
심도환의 집 앞이었다.
심도환의 집은 현재 성건우가 사는 곳보다 조금 더 넓었다. 오른편으론 좁은 안방이 딸려 있고, 그 외 부분은 거실과 주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심도환의 아내 전희정은 바깥쪽에 붙은 주방에서 매우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내내 그녀의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이내 성건우는 집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왜 식당에 안 가세요?”
인기척에 전희정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 30대인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부쩍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전희정이 곧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자제해야 해서. 회사에선 줄곧 무심병이 전염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다들 무서워하잖아. 안 그럼 나한테 휴가를 주지도 않았겠지.”
잠시 침묵하던 성건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심도환 아저씨는 예전부터 저를 잘 보살펴주셨어요.”
동시에 그는 손에 들린 물건들을 심도환의 집 안에 내려놓았다.
전희정도 무심결에 성건우가 가져온 물건들을 슥 훑어보았다. 한눈에 봐도 족히 수만 점은 될 것 같은 물건들이었다.
“⋯⋯아냐, 아냐! 너무 비싼 물건들이잖아!”
성건우는 잠깐 멈춰서 고민하다가 전희정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물건을 받기 싫으시다면 제 엄마가 되어주세요.”
“……?”
머릿속이 멍해진 전희정이 당황해하는 동안, 그 틈을 타 성건우는 물건들을 바닥에 다 내려놓았다. 그는 손을 탁탁 털면서 말을 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싫으신가 보네요.”
그의 단호한 모습에 전희정은 한동안 우물거리다 천천히 운을 뗐다.
“앞으로 뭐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렴.”
성건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곧장 그의 집을 향해 돌아섰다.
뒤에선 다시 심도환의 아이가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저 아저씨는 우리가 병에 걸릴 수도 있는데 안 무섭대? 엄마, 근데 아빠는 언제 다 나아? 엄마! 근데 아빠는 언제 집에 와?”
순간 우뚝 멈췄던 성건우의 걸음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 * *
며칠이 지나, 오후 훈련 시간을 맞아 구조팀 모두가 모였다.
그때, 잠시 밖으로 나간 장목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좀 복잡해 보였다.
그녀는 곧 용여홍 앞으로 갔다. 잠시 침묵 끝에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여홍아, 네 팀 조정 신청이 거부됐어.”
순간 용여홍은 몸을 휘청거렸다. 얼굴에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목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부에서 뒤처진 팀원을 포기하거나 버려선 안 된대. 딱 한 번 한 훈련에 정신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곧장 사형 판결을 내리면 안 된다는 거야. 무엇보다 지금 구조팀에 오겠다는 신청자도 없고. 각 분야 인력이 다 부족해서 교체를 원한다면 다음 직무 분배까지 기다려야 한대.”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용여홍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혼잣말을 하듯 답했다.
살짝 머뭇거리던 장목화가 미소를 지으며 위로를 건넸다.
“이번에는 큰 소리로 이야기하라고 안 할게.”
용여홍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실망스럽거나 고통스럽지는 않아요. 적어도 지금은, 구조팀 작업이 상당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장목화가 빙그레 웃으며 용여홍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안 그랬다면 나도 구조팀을 만들지 않았겠지. 스스로를 잘 단련하고 강해지면 돼. 내년 7월까지 살아남아야지. 그래야 나도 널 대신할 새로운 팀원을 신청할 수 있을 테니까.”
용여홍의 얼굴에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드리웠다.
그때, 성건우가 가까이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그 말 굉장히 불길하게 들리네요. 그냥 이따가 너를 흠씬 두들겨 패서 생존력을 높여줄게, 라고 하셔야죠.”
순간 용여홍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외부로 나가 조사하는 것보다 장목화와 전투 훈련을 하는 것이 더 두려운 모양이었다.
각종 위험을 마주하게 될 정식 임무는 봄 이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건 아직 몇 달이나 남아있었지만, 훈련까지는 단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이따가 너를 흠씬 두들겨 패서 생존력을 높여줄게!”
곧이어 장목화가 성건우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용여홍이 아닌, 성건우에게 향해 있었다.
손이 근질거려 죽겠다는 듯한 자세를 취해 보이던 그녀가 다시 무슨 생각을 하며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기회를 봐서 군용 외골격 장치를 하나 신청할 생각이야. 그게 있으면 네 위력도 크게 높아지겠지.”
“좋아요.”
용여홍이 눈을 반짝이며 호응했다.
그리고 약간 뜸을 들이던 장목화가 덧붙였다.
“사실 생체 공학 의수 이식도 생각해볼 만한 일이야. 유전자 개조보다 훨씬 안전하기도 하고. 너도 기계에 대한 로망이 있다면 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해 봐. 특정 대형 세력에선 이런 방면에 아주 뛰어난 능력이 있어. 몇몇 기계 팔엔 어마어마한 능력이 장착돼있기도 하고. 진짜 탐 난다니까.”
“⋯⋯아직은 괜찮습니다.”
용여홍은 아직까지는 본연의 몸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 순간, 성건우가 곁에서 용여홍의 레퍼토리를 대신했다.
“휴……, 나는 유전자 개량을 했는데도 175cm밖에 안 되고, 차라리 갈아 치워버리는 게 낫지.”
잠시 용여홍의 얼굴 근육이 몇 번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빽 소리를 질렀다.
“넌 왜 안 바꾸는데!”
“아직 기회가 없어서.”
성건우의 답은 아주 진지해서, 용여홍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호전되자 장목화는 가만히 있던 백새벽을 바라봤다.
“새벽아, 방금 한 제안 말이야, 너한테 한 것이기도 해. 생체 공학 의수 이식과 기계 개조 기술은 상당히 성숙한 상태라 그렇게 위험하진 않아. 나랑 같이 전기 뱀장어 자매가 되는 건 어때?”
이윽고 다시 성건우가 끼어들었다.
“팀장님, 작명 센스가 정말 끔찍하네요. 라디오 프로그램을 잘 안 들으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 넌 전기 맛을 못 봐서 그런 것 같은데.”
장목화가 입술을 꽉 깨물고 중얼거렸다.
그사이 느릿하게 한숨을 토하던 백새벽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생각해볼게요.”
“문제는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이냐는 거죠.”
성건우는 이번엔 백새벽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장목화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백새벽은 그녀보다 연상이고, 정신적으로도 훨씬 더 성숙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생을 자청하기엔 여태 팀의 보호자 역할을 했던 수장으로서 면이 죽을 것 같았다.
그러다 다시 성건우에게 말렸음을 깨달은 장목화가 그를 째려본 뒤 소리 내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오늘 훈련이 끝난 뒤에 특별 훈련이 있어. 담력 훈련을 할 거야.”
“어떻게 하는 건데요?”
용여홍이 약간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장목화가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웃었다.
“오늘 밤 혼자 이곳에 남는 거야. 손전등 포함해 조명 도구 일체 없이.”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하네요⋯⋯.”
용여홍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모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훈련은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할 수밖에 없어. 다 같이 해서는 효과가 없으니까. 건우, 오늘은 너야. 내일은 새벽이가, 모레는 여홍이가 할 거고.”
용여홍은 자신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 안도한 듯했다.
“네, 팀장님!”
성건우도 제법 진지하게 답했다.
“네, 팀장님.”
백새벽까지 답하자, 성건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머무는 동안 자도 됩니까? 스피커로 노래를 들어도 되나요?”
“둘 다 안돼!”
장목화는 매우 단호했다.
* * *
저녁을 먹고,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은 속속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장목화는 모든 손전등과 배터리를 수거해갔다.
성건우는 방 안 조명에 기대 두꺼운 구술사를 열람하는 한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각 알림을 들었다.
9시가 되자 온 빌딩의 빛이 꺼지고, 성건우의 눈앞도 캄캄해졌다. 자연광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주위 책상과 벽뿐인 이곳에서 성건우는 자신의 손가락 하나조차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탁상 등을 켜보려 했다. 그러나 버튼을 눌렀음에도 등은 응답이 없었다.
생활 구역 가로등이 꺼졌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방 안에선 개인에게 배급된 에너지를 이용해 불을 켤 수 있었지만, 안전부인 이곳에선 야근이나 당직을 위해 미리 신청한 사람 외엔 누구도 불을 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