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질문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성건우는 작은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이번엔 이도 닦지 않고 정신만 차리려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 후 심도환의 것과 같은 두꺼운 암녹색 겉옷을 걸친 그는 조악한 손전등을 가지고 방 밖으로 나갔다.
A 구역으로 향하는 동안 성건우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붉은 점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감시카메라였다.
직원 대부분은 중요 구역을 제외한 감시카메라는 이미 다 망가져 제 역할을 못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직원들을 겁주기 위한 구색일 뿐이라 여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건우는 장목화의 말을 통해, 아직 작동되는 감시카메라가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내 돌연 손을 든 그가 손전등 불빛으로 감시카메라를 비춰보았다. 그런 뒤 벽에 찰싹 달라붙어 사각 지대로 들어갔다.
* * *
A 구역 이정희의 집에 도착한 성건우가 암호를 완벽하게 대고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집회에 참석한 교도들 분위기는 분명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저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인도자 임결이 나오기 전까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특히 간시연, 도종완 부부는 불안해 견딜 수 없다는 듯 수시로 자세를 바꿔 앉곤 했다.
마침내 안쪽 방에서 인도자 임결이 걸어 나왔다. 옷장과 장식장, 침대 사이로 나와 주위를 한번 둘러본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운을 뗐다.
“오늘 여러분을 소집한 것은 한 가지 통보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하는 사이 그녀는 겁에 질리기라도 한 듯 몸을 살짝 떨었지만, 얼굴엔 열광적인 표정이 자리해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임결이 묵직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심도환은 교단을 배반하려다 신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정희의 집을 비추는 노르스름한 불빛 아래, 교도들 얼굴엔 각기 다른 명암이 내려앉았다. 불균형한 빛 때문에 그림자는 모습을 다 달리하고 있었다.
임결이 말을 한 지 거의 10초가 지났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집의 모든 것이 잠시 다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적막을 먼저 깨고 나온 건 다시 또 인도자 임결이었다. 그녀는 두 팔을 굽힌 채 아이를 어르는 듯한 자세로 말했다.
“당신의 관용을 찬미합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교도들은 오랫동안 참은 숨을 내쉬며 아주 거칠고 묵직한 콧김을 뿜어냈다.
“당신의 관용을 찬양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인도자를 따라 예를 취했다.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신실한 모습이었다.
성건우 역시 그들 사이에 섞여 능숙하게 아이를 어르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인도자 임결이 말을 이었다.
“죄인 우정현 역시 신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주위를 한번 느릿하게 둘러보며 고개 숙인 교도들을 바라보았다. 이후론 더 이상 심도환과 우정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설교를 시작했다. 이번 설교의 주제는 사명의 숭고함과 신성함이었다.
설교를 거의 마무리 지었을 무렵, 임결은 또 한 번 교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둘러보았다.
“우리 주님은 자비로우시며 위엄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늘 세상을 주시하고 계십니다. 성사 역시 그렇습니다. 누구도 그의 눈을 속일 순 없습니다.”
방금 전 그녀는 생명 제례 교단 내부 구조를 처음으로 언급했다. 교단에 막 가입한 자는 신생자, 일정한 공헌을 하며 적잖은 신도를 끌어들이면 인도자로 승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도자 위에는 성사가 자리했다.
그러나 임결은 성사 위에 또 누가 존재하는지, 그의 칭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당신의 관용을 찬미합니다!”
신생자 여러 명이 재차 아이를 어르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이번 집회는 임시 집회였기 때문에 성찬례는 없었다. 교도들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성건우 역시 바로 떠나려는데, 임결이 그를 불러세웠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두려워할 것 없다. 달지기 사명은 자비로운 분이셔. 신령을 모독하지 않는다면, 또 교단을 팔아넘기지 않는다면 그분께서는 벌이 아니라 축복을 내리실 거야.”
임결은 성건우에게 전보다 훨씬 다정해졌다.
“당신의 관용을 찬미합니다.”
성건우는 아주 신실한 모습으로 호응했다.
* * *
이정희의 집을 나온 성건우는 손전등을 쥔 채 벽에 딱 달라붙었다. 그렇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시야에 간시연, 도종완 부부가 들어왔다. 어떻게 보면 저들은 우정현의 죽음을 야기한 원흉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부부가 든 손전등의 불빛은 미약했다. 당장 새 배터리로 바꿔야 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연약한 빛에만 의지하고 있더라도, 부부의 걸음 속도는 매우 빨랐다. 아마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괴물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건우는 보폭을 조금 빠르게 놀렸다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미약한 불빛과 함께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부부를 계속 눈으로 좇았다.
* * *
오전 7시 50분, 647층 14호.
성건우는 용여홍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구조팀 방에 도착했다.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그보다 앞서 도착해있던 장목화는 펜을 쥔 채 그녀의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가 곧 성건우의 존재를 감지하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내가 뭘 좀 찾았어.”
성건우는 곧장 그녀의 앞으로 폴짝 뛰어갔다.
“⋯⋯그렇게 오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장목화가 흠칫 놀란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머리에 쥐가 나서요.”
성건우가 진지하게 변명했다.
“그래, 너한테는 의사가 써준 소견서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던 장목화가 금세 정색했다.
“기본적인 단서에 따르면, 그 각성자는 478층 주민이거나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일 가능성이 커.”
성건우의 대답이 있기 전, 그녀는 단서의 출처와 판단 근거를 대략적으로 설명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간시연이란 사람한테 물어봐. 혹시 우정현이 죽은 그날 해당 층 주민 중 결근한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활동 센터, 초등학교, 질서 감독실 등에서 일하는 직원 중에 우정현의 사망 전후로 물자 공급 시장에 온 사람이 있는지.”
“그런 사람이 없다면요? 아무도요.”
성건우의 반문에, 장목화가 웃음을 보였다.
“그렇다는 건 그 각성자가 478층 물자 공급 시장 일원이라는 뜻이겠지. 그렇게 되면 그 층에 사는 친구를 찾아가 같이 밥을 먹으면서, 해당 층의 직원 중에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보는 거야. 너도 간시연을 통해 확인해볼 수도 있을 테고.”
여기까지 말을 잇던 그녀가 당부했다.
“하지만 당분간은 나서지 않는 게 좋아. 며칠 더 기다려야 할 거야. 활동 센터처럼 주위 사람이 많은 곳에서 좀 구석진 곳을 찾아 완곡하게 물어야 해. 지나치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가는 상대를 놀라게 할 수 있으니까.
네가 너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일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하지만 상대의 안위도 고려해야 해. 심도환 같은 사람이 또 나타나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성건우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저도 겁납니다. 하지만 때론 아무리 무서워도 해야 하는 일이 있죠.”
장목화가 호응했다.
“좋아, 그럼 이제 가서 자료나 살펴. 앞으로 며칠 동안은 이 사건에 대해 생각도 하지 말고.”
성건우는 곧장 뒤를 도는가 싶더니 다시 장목화를 향해 돌아섰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뭐지?”
장목화는 또 무슨 큰일이 났나 하는 마음에 덜컥 겁이 났다.
그 사이, 잠시 머뭇거리던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마음에 잠재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목화는 눈이 살짝 휘둥그레졌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좀 뒤로 웅크린 그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성건우를 주시했다.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데?”
성건우의 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잊어버리셨어요? 이두형이 그랬잖습니까, 기원의 바다에 들어가고 나면 마음속 두려움과 맞서 그걸 하나하나 이겨내야 한다고요.”
“아, 그 얘기구나. 난 또⋯⋯.”
때맞춰 입을 다문 장목화는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물었다.
“너, 기원의 바다에 들어간 거야?”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능력의 변화는 있었어?”
장목화의 질문이 이어졌다.
성건우는 솔직하게 답했다.
“없었습니다.”
“그래, 넌 아직 한 가지 두려움도 이겨내지 못했으니⋯⋯.”
장목화는 잠시 생각에 잠겨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살짝 뭔가를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결심했는지 직접적으로 물었다.
“네가 지금 마주한 건 어떤 두려움인데?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해야만 적합한 방법을 알려줄 수 있지.”
성건우는 아무런 말 없이 주머니에서 몇 번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장목화는 곧바로 손을 뻗어 받아든 뒤, 빠르게 종이를 펼쳤다.
안엔 규칙 따위 없이 그어진 수많은 파란색 선이 있었다.
볼펜으로 그려진 선은 그림자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 그림자는 중앙 원을 침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 지저분한 선 위쪽으론 또 다른 원이 두 개 더 있었는데, 그걸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텅 비어있었다.
종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던 장목화는 성건우와 관련한 자료를 결합해 어렴풋이 드는 생각이 있었다. 추측을 끝낸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이틀 잘 고민해볼게. 최대한 빨리 너한테 제안해줄 수 있으면 좋겠네.”
말을 마치고, 그녀는 뭔가를 떠올린 듯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차에서 그렸던 그림이야? 차으뜸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그린 그림?”
“기억하십니까?”
성건우도 의아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장목화는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했잖아, 난 아주 옹졸하고 뒤끝이 긴 사람이라니까.”
성건우가 뭐라고 대꾸하려던 그때, 백새벽과 용여홍이 방으로 들어왔다.
장목화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길어도 이틀 안에 어떤 물건을 돌려받게 될지, 어떤 보상을 받게 될지 알 수 있을 거야.”
성건우는 팀원들과 함께 자료를 살피고 각종 훈련을 받으며 이날 하루도 평범하고, 충실하게 보냈다.
* * *
일과를 끝낸 후, 성건우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귀가했지만 잠시 고민하다가 활동 센터로 돌아갔다.
활동 센터 안을 한번 둘러보니, 한쪽 구석에서 한 단발머리 여자와 대화하고 있는 용여홍이 보였다. 같이 있는 여자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성건우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그의 귓가로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꽂혔다.
“네가 생각하기에도 여홍이는 좀 멍청한 것 같지? 여자와 첫 데이트를 하는 장소로 활동 센터를 선택하다니.”
성건우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조여름이 있었다.
조여름은 성건우, 용여홍, 양진원을 비롯한 이들의 또래이자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이었다. 당연히 같은 학교에 다니기도 했었기 때문에 성건우는 그녀와 꽤 잘 아는 편이었다.
그녀는 키도 크고 늘씬하며, 얼굴이 깨끗하고 이목구비도 오밀조밀했다. 그런 사람이 긴 카멜색 코트를 걸친 걸 보니 전보다 더 성숙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20대 남자 한 명과 함께였다. 170센티미터가 조금 넘을 듯한 그의 키는 조여름과 거의 비슷했다.
남자의 생김새는 단정했으나 피부는 햇빛에 그을린 듯 살짝 검었다. 또한 얼굴엔 고초를 겪은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눈빛은 좀 날카로웠다.
조여름과 남자는 한순간이라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손을 꼭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