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각자의 반응
성건우는 낮게 깐 목소리로 먼저 운을 뗐다.
“우정현이 죽었습니다.”
귀에 닿을 듯 짧은 단발을 한 간시연이 조건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우연이야. 분명 우연일 거야⋯⋯.”
그녀의 소리는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끝에는 두려움과 혼란에 잠식된 숨소리만 남았다.
도종완도 침을 꿀꺽 삼킨 뒤, 묵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초적인 검시 결과는 이미 나왔어. 외부 요인은 없으며 심장 마비로 인한 사망이 틀림없다고.”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우연이네요.”
곧장 부부에게 길을 내준 성건우가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고 난 뒤 비로소 뒤돌아 부부를 바라보았다.
천장 가로등 불빛 아래, 몸을 바르르 떠는 간시연과 도종완이 있었다. 여태 만난 이후로 가장 연약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성건우의 기억으론, 부부는 두 차례 유산을 겪은 뒤 가까스로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며 생명 제례 교단에 가입하게 됐다고 했다.
무사히 태어난 아이에겐 고질병도 없었고 유전자 개량자인 부모의 장점 대부분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앞으로 약물 조정을 통한다면, 아이는 이제 더 좋은 천부적 재능을 갖게 될 일만 남았다.
간시연, 도종완 부부는 생육 문제와 관련해 남들과 언쟁을 참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늘 친절했고, 아이도 매우 좋아했다. 집회에서도 자발적으로 남들을 위로하곤 했으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났을 때도 모른 체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배급량이 적다는 성건우의 말에 임결이 당황해하자, 도종완은 자신도 다 먹지 못한 성찬을 성건우에게 기꺼이 나눠준 적도 있었다.
멀어지는 부부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거둔 성건우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주위를 한번 둘러봤지만, 이정희를 비롯한 나머지 교도는 보이지 않았다. 인도자 임결만이 예전 그 자리에서 4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머리를 틀어 올린 임결은 뭔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가 성건우를 발견했다.
이내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성건우도 똑같이 인사를 했다.
뒤이어 그쪽으로 다가가지 않고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앉은 성건우는 어딘가로 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시선 끝엔 카드 게임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성건우는 그들을 바라보는 한편, 라디오 프로그램에 귀를 기울였다.
활동 센터 내 각종 소리에 묻혀, 라디오는 모두에게 관심 밖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거리의 가로등이 꺼지기 시작했다.
밤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임결은 오래된 디지털 손목시계를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그녀가 주위 여자들을 향해 웃으며 이야기했다.
“돌아가자, 돌아가! 다들 집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잖아!”
여자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임결은 활동 센터를 빠져나갔다.
성건우도 뒤따라 일어나선, 방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내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 * *
모퉁이를 돌아 다른 거리에 이른 그때, 길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걸음을 살짝 늦춘 임결이 성건우와의 거리를 좁히며 나란하게 걸었다.
“건우,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임결의 목소리와 말투는 아주 편안하고 여유로웠다.
그 사이 성건우의 눈동자가 점차 짙어졌다.
“임 이모, 보세요. 우리는 같은 층 주민이에요. 같은 교단 교도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멍한 얼굴로 성건우의 이야기를 듣던 임결은 서서히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밀접한 사이가 돼야지. 예를 들면⋯⋯.”
말을 잇던 그녀는 순간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눈빛이 점차 이상해지는가 싶더니, 얼굴도 살짝 붉어졌다.
성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황급히 외쳤다.
“엄마!”
그 외침에 흠칫 놀란 임결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소리 내 웃었다.
“그럼 난 널 양아들 삼아야지. 네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셨다면 내 또래였을 테니.”
성건우를 양아들로 인정한 후, 그녀의 태도는 눈에 띄게 친절해졌다.
성건우는 표정을 통제하며 이전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우정현이 죽었습니다.”
임결은 고개를 살짝 들고 그를 올려다보다 몇 초 후에 반문했다.
“그래서 무섭고 불안해?”
“놀랍기도 하고요.”
성건우가 덧붙였다.
임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게 죄인에 대한 신령의 징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상일 수도 있죠.”
성건우의 생각은 다시 또 제멋대로 튀었다.
임결은 하마터면 대화의 흐름을 잃을 뻔했지만,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난 신 대신 네 질문에 답할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사명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주시하고 계시며 선악에 따라 상벌을 주신다는 것뿐이야. 우정현의 죽음이 신령의 벌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이렇게 공교로운 우연이, 과연 신의 징벌이 아닐 수 있을까?”
성건우가 다시금 물었다.
“그럼 이게 신령의 벌인지 아닌지 아는 사람은 누구죠?”
순간 임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성사.”
임결의 답을 듣고, 성건우가 몇 초간 고민하다가 물었다.
“성사는 누군가요?”
임결이 웃었다.
“그건 지금 네가 알아야 할 문제가 아니야. 인도자가 되면 성사가 알아서 널 만나려 할 거란다. 그때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그럼 인도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건우는 조금도 저어하지 않고 물었다.
“표현을 충분히 해야지. 네가 좋은 모습을 보이기만 한다면 성사께서도 널 무시하지 않으실 거야. 성사는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시거든.”
임결은 이제 양아들로 받아들인 성건우를 위해 끈기 있게 답해주었다. 성건우가 되묻기도 전에, 알아서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말을 잇는 내내 임결은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이었다.
곧이어 가로등이 하나둘 꺼지고, 곁으론 집에 돌아가는 사람들이 스쳐 지났다. 그러자 임결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더 할 말이 있거든 그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자.”
고개를 끄덕이던 성건우가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냈다.
“도저히 못 부르겠네요. 아까 전 그 일은 없던 일로 치시죠.”
그는 임결에게 질문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장 돌아섰다.
임결은 잠깐 멍하게 있다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녀석, 부끄러운가 보네⋯⋯.”
* * *
다음날 오전, 성건우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647층 14호로 향했다.
그곳에선 일찍이 와있던 장목화가 자료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이내 그녀가 고개를 들고 웃음을 지었다.
“빠르네? 또 격투 훈련하고 싶어?”
장목화는 당장이라도 훈련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했다.
성건우는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는 쓸데없는 말은 과감히 생략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팀장님, 사람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각성자 능력도 있습니까?”
장목화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잘 모르겠네? 각성자 능력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아는 게 없어서. 심장을 직접 멈추게 하는 게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을 통하는 능력이라면 하나 알고 있는 게 있긴 하지. 하하, 너도 생각났지? 가위 말의 실제적인 꿈! 꿈속에서 숨을 거두면 현실에선 심장 마비가 일어나잖아.”
“당시 잠들어 있었던 게 아니라 근무 중이었다면요?”
성건우는 뭘 숨길 생각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질문이 왜 이렇게 디테일해? 실제로 일어난 일이야?”
순간 장목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순간 예리한 감각으로 단박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곧 어젯밤 정각 뉴스에서 전한 소식이 떠올랐다.
“아, 우 뭐……, 하여튼 그 사람? 심장 마비로 죽었다던 물자 공급 시장 책임자? 왜? 넌 각성자가 그 사람을 죽인 거라고 의심하는 거야? 증거라도 있어? 회사 내부에서 해마다 심장 관련 문제로 죽는 사람은 많아.”
성건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전 회사 내부의 한 교단에 속해 있어요.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성찬을 나눠주죠. 어제 이른 아침에 그들이 집회에서 우정현이 신성한 생육을 모독하고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해 교단 내의 교도를 압박한다고 질책했어요.
당시 우리 층을 담당하는 인도자는 신이 죄인을 징벌할 거라고 했고요. 그로부터 4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우정현이 갑자기 죽었어요.”
“확실히 의심스럽긴 하네…….”
조용히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들었다.
“잠깐. 네가 비밀 교단에 가입해 있다고? 회사 안에서 탄생한 교단이야, 아니면 외부에서 파고든 교단이야?”
사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중요한 문제였다.
“12월의 달지기, 사명을 믿는 교단입니다.”
성건우는 마치 이 층에 자리한 초등학교 교장이 누구인지 말하는 것처럼 침착했다. 장목화는 이것이 우습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이상해서 빙빙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교단에 혐의점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으면 곧장 질서 감독자를 찾아가 신고했어야지. 그럼 그 공을 봐서라도 범죄에 연루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니면 그 교단을 버리기가 싫은 거야?”
“약간은요. 성찬이 꽤 맛있거든요.”
성건우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장목화도 이젠 그와 논리적인 대화는 일찌감치 포기했던 지라 그냥 한번 웃고 말았다.
“이유는 그것뿐이고?”
잠시 침묵하던 성건우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교도들 대부분은 좋은 사람들이에요. 다들 슬픈 과거 때문에 교단에 가입했는데, 뭐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없어요. 집회에 참석하는 것도 서로 마음을 기대고 위로를 얻고 싶어서고요.”
장목화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 일이 회사에 알려지면 그 사람들까지 연루돼 심각한 처벌을 받게 될까 그게 걱정인 거구나? 만약 우정현의 죽음이 정말 공교로운 우연인 거라면 신고돼 처벌받은 교단만 억울해지는 거니까.”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걱정하는 부분을 밝혔다.
눈동자를 살짝 굴리던 장목화가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교단과 관련된 비밀을 말해주는 건, 날 그만큼 믿는다는 건가?”
“네.”
성건우도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장목화는 더욱더 환한 미소를 보였다.
이때, 성건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만한 믿음이 없었더라도 추리 광대 능력을 이용해 팀장님을 믿을 만한 존재로 만들었을 겁니다.”
장목화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왼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는 미세한 은백색 전광이 흐르고 있었다.
“⋯⋯아까 했던 말 다시 해봐.”
“팀장님은 정말 최고로 믿음직스러운 분입니다.”
성건우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장목화는 그제야 손을 내려놓았다.
“왜 날 찾아와 상의한 건데?”
“팀장님이 똑똑하시니까요.”
성건우는 매우 성실하게 답했다.
장목화의 얼굴에는 재차 웃음이 피어났다.
“안다니 다행이네. 만약 너 혼자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어?”
그녀가 궁금하다는 듯 캐물었다.
성건우도 일찍이 이런 생각을 해봤는지 답에 막힘이 없었다.
“인도자 위에 있는 성사를, 명령을 내린 사람을, 임무를 수행한 각성자를, 본분을 어긴 교단의 고위층 인물을 찾아 모두 은밀히 죽일 겁니다. 그럼 교단은 아무 피해도 없이 다들 지식, 고민, 성찬을 나누는 장이 되겠죠.”
그는 꼭 휴일에 물자 공급 시장에서 뭘 살지 얘기하는 사람 같았다. 그만큼 너무 덤덤해서 장목화도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