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95화 (95/649)

95화. 상의

“그다음은?”

“그다음은 없습니다.”

성건우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뭐?”

인 선생은 순간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이후, 성건우가 다시 설명을 이었다.

“그다음 일은 보안 사항에 연루돼 있어서요.”

약간 멍한 표정을 드러낸 인 선생은 잠시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간 지 몇 시간 만에 보안 사항과 관련된 일을 맞닥뜨렸다는 말이야? 그럼 그 이후는? 이후에 있던 일 중에 얘기할 수 있는 건?”

성건우는 진지하게 답했다.

“소고기 조림 통조림을 먹고, 에너지 바, 압축 비스킷을 먹었어요. 수풀 안쪽으로 들어가 오줌을 한 번 싸고, 모기 두 마리를 죽이기도⋯⋯.”

“됐어, 그런 얘기라면 안 해도 돼.”

인 선생도 약간 지친 듯 성건우의 말을 끊었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못 참고 다시 또 물었다.

“그런 일상적인 일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보안 사항인 거야?”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심사 결과를 받기 전까지는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인 선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대체 어떤 일을 겪었니? 혹시 다치거나 죽은 동료가 있어?”

그녀는 그런 사건이 성건우를 자극해 병증을 키웠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성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그의 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인 선생이 화제를 바꿨다.

“지상에서 겪은 일로 스스로 좀 성장한 것 같아?”

“네. 인류를 구원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란 걸 깨달았어요. 한 마을, 한 거점, 아이 하나조차 구하지 못할 때도 있었거든요.”

성건우의 표정은 엄숙했다.

인 선생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깨달았다니 다행이네. 네가 품은 그 이상에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런 이상을 고집하기 전에 비교적 달성하기 쉬운 목표부터 수립해야 해. 그런 목표를 달성하다 보면 자신감도 커지고, 네 상태도 개선될 거야.”

성건우도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전 스스로를 단련하고 강화하는 데 더 노력하기로 했어요. 그래야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테니까요.”

“⋯⋯.”

인 선생은 눈동자를 살짝 굴리다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성건우가 인 선생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나섰다.

“인 선생님, 제가 오늘 선생님을 찾아온 건 질문 하나를 하고 싶어서였어요. 마음에 잠재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인 선생도 엷은 미소를 되찾았다. 그녀는 전문적인 용어를 쓰는 대신 그저 편안한 대화를 나누듯 쉬운 단어와 방식을 골랐다.

“좋은 질문이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마음에 잠재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선 일단 그걸 파악하고, 부딪혀야 해. 도망치거나 외면하기만 해서는 절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때로는 피로 범벅된 자신의 상처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성건우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인 선생은 잠시 그의 표정을 살피다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근데 현실에서 곧장 두려움을 직면하라고 주장하고 싶진 않아. 그랬다간 2차 피해를 입고 정신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거든. 무엇보다 적합한 건 그 두려움에 조금씩 접근하는 거지. 가장자리로부터 중심으로 조금씩, 천천히.

그렇게 끊임없이 마음의 힘을 키워 그걸 뒤덮은 그림자를 조금씩 해치워가야 해. 그러다 그 악몽을 완전히 직면할 수 있게 되는 때가 오면 넌 그게 사실은 그렇게 강력하지도 않고, 극복하기 쉬운 존재였음을 깨닫게 될 거야.”

마지막으로 인 선생이 웃으며 덧붙였다.

“내게 대략적인 느낌을 알려주면 방법을 찾는 걸 좀 도와줄 수 있어.”

성건우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인 선생도 그 반응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급하게 굴 필요 없지. 일주일 동안 천천히 생각해봐. 다음 주 이 시간에 재검사하러 오는 것 잊지 말고. 만약 나한테 말하기 껄끄럽다면 다른 방식을 선택하거나 믿을 만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인 선생님.”

성건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했다.

이윽고 성건우는 495층으로 돌아와 또 다른 곳에 자리한 4번째 엘리베이터 로비로 향했다. 안전부로 통하는 엘리베이터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가 카드를 긁고 647층 버튼을 눌렀다.

* * *

성건우는 금세 구조팀 옆쪽 탈의실에 도착했다. 그는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훈련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장목화가 보였다. 포니테일 스타일로 머리를 올려 묶은 그녀는 벤치에 앉아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왜 왔어?”

장목화는 역시 일찍부터 성건우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팀원들에게 이틀간 휴가를 줬는데도 이곳에 나타난 것이 의아했다.

“단련하려고요.”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잠시 생각하던 장목화가 비로소 이해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긴, 네 또래 친구들은 이 시간에 다 일을 하러 나갔을 테니까. 집에 있어봤자 자는 것 외에 할 일도 없겠지.”

“책도 읽을 수 있습니다.”

성건우가 짧게 대꾸했다.

“⋯⋯.”

그를 살짝 째려보려던 장목화는 순간 또 뭔가를 느끼고 문 쪽을 돌아봤다. 이번에 등장한 건 회색 스카프를 둘둘 감은 백새벽이었다.

백새벽은 장목화와 성건우가 묻기도 전에 미리 말하며 걸어왔다.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요.”

장목화는 피식 웃으며 칭찬했다.

“훌륭하네.”

백새벽이 막 몇 걸음 들어왔을 때, 수건을 쥔 용여홍이 나타났다.

“어? 왜, 왜 다들 여기…….”

용여홍은 팀장과 성건우, 백새벽이 일제히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의아한 동시에 약간 무섭기까지 한 것 같았다.

“너는 왜 왔는데?”

장목화는 답을 하는 대신 반문했다.

용여홍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엄마가 여자를 소개해줬는데, 그 사람이 출근을 해서, 저녁 시간 이후에나 마, 만날 수 있다길래, 할 일도 없고 해서 몸이나 좀 풀까 하고요.”

장목화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잘했어.”

이내 주위를 한번 둘러보던 그녀가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왔으니 격투 훈련이나 하자고.”

“아아⋯⋯.”

용여홍은 순간 맥이 축 빠졌다.

* * *

저녁 8시, 성건우는 언제나처럼 침대에 누워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다렸다.

눈을 반쯤 감고 10여 초쯤 지나자, 익숙한 그 음성이 울려 퍼졌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캐스터 허정민입니다. 현재 시각은 저녁 8시 정각입니다.

이사회는 오늘 금년도 22차 회의를 개최해 겨울 작업의 중점을 토론했습니다⋯⋯.

내부 생태 구역의 목화가 대풍년을 맞았다고 합니다⋯⋯.

오늘 오전 9시 35분, 478층의 물자 공급 시장 주요 책임자 우정현이 심장 마비로 인해 근무 중 숨졌습니다⋯⋯.

순간 성건우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우정현, 그건 성건우가 불과 오늘 아침에 들었던 이름이었다.

생명 제례 교단 집회에서 한 교도가 우정현이 생육 센터 건립을 지지하며 아이를 모두 인공 자궁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었다. 이로 인해 그 교도는 우정현과 언쟁을 벌이게 됐고, 주요 책임자인 그가 가장 힘든 청소 직무로 전출시키려 한다며 설움을 토로했었다.

이 말을 듣고, 인도자 임결은 그렇게 답했었다.

“신께서는 죄인을 징벌하실 겁니다.”

그 말이 나온 지 채 4시간도 지나지 않아, 우정현은 근무 중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사망했다.

교도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성건우도 이 뉴스에 대해 별다른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반고 바이오 내에선 매해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직원들이 있었다. 그만큼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적인 뉴스였다.

또 만약 우정현이 이삼 년 후에 세상을 떠났었더라도 성건우는 그저 우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임결이 신이 죄인을 징벌할 거라 말한 오늘, 우정현은 공교롭게도 병으로 급사했다.

성건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둔 외투를 챙겨 입었다. 그런 뒤, 곧장 방 밖으로 나가 C 구역으로 돌진했다.

* * *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성건우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결국은 평소 걷는 속도와 거의 똑같아졌다.

활동 센터 근처에 이르렀을 무렵, 그쪽을 한번 훑어본 성건우는 옆쪽 벽에 서 있는 심도환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은 완전한 그늘에 잠겨있었다.

놀란 듯 좀 멍한 표정인 그는 전방을 보고 있긴 해도 눈 초점이 완전히 나가 있었다. 성건우가 가까이 다가가도 그는 누군가 제게로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저씨.”

성건우의 목소리에 바르르 몸을 떨던 심도환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어, 건우⋯⋯.”

심도환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미소는 억지로 짓는 것처럼 보였다.

“우정현이 죽었습니다.”

성건우의 말투는 매우 덤덤했다.

이내 심도환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며 입꼬리도 두어 번 뒤틀렸다.

“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건드리기라도 할까 걱정된다는 듯 목소리를 아주 조그맣게 냈다.

성건우는 그런 심도환을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신의 징벌일까요?”

또 한 번 몸을 떨던 심도환은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다⋯⋯.”

그의 시선은 성건우 너머의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눈동자는 또다시 초점을 잃은 듯했다.

성건우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가려 했지만, 그때 이쪽으로 달려온 대여섯 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심도환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빠, 아빠!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야!”

“그래, 그래.”

심도환은 아이에게 대꾸하며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난 먼저 가봐야겠다.”

“네, 나중에 봬요.”

성건우는 예의 바르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를 보며 심도환도 점차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곧 그는 아이를 데리고 막 활동 센터에서 나온 아내와 B 구역으로 돌아갔다.

성건우는 그의 뒷모습으로부터 한동안 시선을 떼지 않았다.

생명 제례 집회에 몇 차례 참석하는 동안,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이용해 상당한 교도들과 인맥을 쌓았다. 그러면서 그들과 교단에 가입한 이유를 공유했는데, 심도환의 가입 계기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심도환 부부는 일찍이 어린 자식을 잃고, 내내 임신이 잘 안 되었다가 조금 전 만난 그 아이를 어렵게 갖게 됐다고 했다. 심도환에겐 당연하게도 저 아이마저 이른 나이에 잃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임결은 심도환의 그런 상황을 내내 주시하다가,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해 수많은 육아 지식을 전수해줬다고 했다.

심도환이 결국 생명 제례 교단에 가입한 건,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를 보고 임결이 말하는 신령을 믿게 되어서였다.

한참 후, 성건우도 시선을 돌리고 활동 센터 안으로 향했다.

* * *

라디오 프로그램이 이미 시작한 때라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활동 센터 안에서도 카드 게임을 하거나 대화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물론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면 그늘진 곳에 쌍쌍이 앉은 인영들도 있었다.

성건우는 활동 센터 대문을 통과하자마자 마침 이쪽으로 걸어 나오던 익숙한 두 사람을 발견했다. 남녀 한 쌍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여자는 바로 오늘 우정현에게 원망을 쏟아내던 교도였다.

이름은 간시연, 겉보기엔 스물일고여덟 살 정도로 수려한 분위기까지 지닌 상당한 미인이었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유전자 개량 약품의 보급 덕분이었다.

곁에 있는 남자는 그녀의 남편으로, 역시 그도 생명 제례 교단의 교도였다. 남자의 이름은 도종완이었다.

지금 간시연은 큰 병이라도 앓고 있는 듯 안색이 매우 창백했다. 무척 긴장한 듯한 그녀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에도 소스라치게 놀랄 것만 같았다.

그녀의 남편 역시도 매우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어 좀처럼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다.

하지만 성건우는 두 발짝 앞으로 걸어가 부부의 앞에 섰다.

동시에 우뚝 멈춰 선 간시연과 도종완의 몸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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