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94화 (94/649)

94화. 성찬

196호 방 안.

성건우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은 어두웠고 바깥은 고요했다.

성건우는 황급히 베개 안으로 손을 넣어 손전등을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빛기둥 한 줄기가 뻗어나갔다. 빛 아래, 맞은편 벽과 팽창 나사에 걸린 옷, 옆쪽의 세면대가 비쳤다.

노르스름한 빛을 마주하니, 그의 호흡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1분 정도 후, 성건우는 손전등을 끄고 이불을 당기며 잠에 빠져들었다.

똑똑똑-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건우는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노크소리는 세 번 정도 반복된 뒤 점차 멀어졌다.

성건우도 저 소리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생명 제례 교단의 교도가 집회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생명 제례 교단에서는 손목시계도 없고, 거리의 괘종시계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사는 교도들을 위해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을 시켜 집회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노크 소리를 듣고도 일어나기 싫거나 그 외의 갖가지 이유로도 집회에 불참할 수 있었다. 이는 본인이 알아서 선택할 문제였다.

그래서 만약 사전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거나 집에 다른 손님이 와 있어 집회 참석이 어렵다면, 소등 시간 전에 문 아래쪽 분필 낙서를 지워두면 됐다. 그럼 집회 시간을 알리는 사람도 노크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곧이어 성건우는 빠르게 침대를 내려와 세수하고, 열심히 이를 닦았다.

* * *

나갈 준비를 마친 뒤, 성건우는 익숙한 길을 따라 한 집 앞에 이르렀다.

A 구역 35호, 이정희의 집이었다.

똑똑똑-

성건우가 문을 가볍게 세 번 두드렸다.

곧 문 안에선 의도적으로 낮게 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명은 가장 귀중하다.”

성건우도 능숙하게 호응했다.

“새 생명은 태양과 같다.”

문은 작은 소리를 내며 빠르게 입을 벌렸다. 안쪽에선 곧바로 노르스름한 빛을 토해냈다. 그와 함께 눈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간 여자가 나왔다.

이정희는 성건우를 위아래로 한번 살피더니 미소를 지으며 얼른 옆으로 비켜서 주었다. 그녀는 웃으며 한담을 건넸다.

“들어와. 이따가 우리한테 바깥의 진짜 모습이 어땠는지 들려줘.”

“알겠어요, 이모.”

성건우는 매우 예의 바르게 답했다.

곧이어 이정희가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

“앉아. 곧 시작할 거야. 조금 늦었네.”

그녀의 말이 질책은 아니었다. 아직은 약속된 집회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하지만 성건우는 그런 말에도 진지하게 대꾸했다.

“이부터 닦느라요.”

이정희는 약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참 잘했네.”

이내 성건우는 작은 스툴로 가서 앉았다. 다소 낮은 의자라 장신의 그는 최대한 다리를 구부려야만 좀 안정적으로 앉을 수 있었다.

그때, 일찍 와있던 심도환이 불편한 자세로 앉은 성건우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랑 바꿔 앉자.”

“감사합니다, 아저씨.”

성건우도 거절하지 않았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면서 다른 교도들과 인사를 나눴다. 성건우는 이미 이런 교단 집회에 수 차례 참석해서, 기본적으로 이 층의 모든 교도를 다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안방에서 인도자 임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침대와 옷장, 장식장 사이로 걸어 나왔다.

“건우 왔구나?”

오늘 테릴렌 셔츠를 입은 임결은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왔다.

성건우도 곧장 호응했다.

“당신의 관용을 찬미합니다!”

“⋯⋯.”

임결은 몇 초간 멍하게 있다가, 그제야 성건우가 사명의 보살핌에 대한 감사를 표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렇게 정석적으로 굴 필요 없어. 그냥 평범하게 대화하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성건우가 뭐라고 답하기 전, 임결이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곧 설교를 시작할 거야. 오늘 다룰 내용은 죽음이야. 생명은 끝내 스러지고 말아. 결국 노랗게 변해 땅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이 대목에서 성건우가 별안간 손을 번쩍 쳐들었다.

“무슨 질문이라도 있니?”

임결이 약간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그녀는 성건우가 뭔가 또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우려하고 있었다.

성건우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뭇잎이 노랗게 변하지 않는 나무들도 많습⋯⋯.”

일순 임결의 얼굴 근육에 몇 차례 경련이 일어났다.

“이건 그냥 비유야. 설교하는 동안 그런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냥 듣기만 해, 말은 하지 말고.”

그녀는 서둘러 성건우의 말을 끊어버렸다.

“예.”

성건우는 약간 풀이 죽은 채 자리에 앉았다.

곧 그는 아주 집중한 표정으로 임결의 설교를 들었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이었다. 이미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텅 비어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교를 마친 임결이 집회에 참석한 교도들에게 말했다.

“이제 고백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 고민을 형제자매에게 알리고 그들로부터 힘을 얻으세요⋯⋯.”

동시에 그녀는 끼어들지 말라는 듯 성건우를 매섭게 노려보며 눈빛으로 그를 제압했다. 이 말을 처음 하던 당시, 냅다 끼어든 성건우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아줌마, 아저씨들도 계시는데요.’

“하…….”

오늘은 아무 말도 없는 그를 보니, 임결도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성건우가 누구보다 먼저 손을 들어 고민을 말했다.

“저 지금 좀 배고파요.”

“다음.”

임결은 숨도 쉬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20대 여자 하나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말했다.

“우리 물자 공급 시장의 주요 책임자 우정현이 계속해서 생육 센터 건립을 지지하고 있어요. 생육 센터가 생기면 여직원들의 휴가 신청이 줄고 부부 사이도 더 좋아질 거라면서요.

개인적인 의견일 뿐인 그 이야기가 무엇도 대표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번번이 참지 못하고 그와 논쟁을 벌이게 돼요.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떻게든 구실을 찾아 저를 원래 직무에서 빼고 가장 힘든 청소 직무로 전출시키려 하고 있어요⋯⋯.”

임결은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하다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아이를 안아 어르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신께서는 죄인을 징벌하실 겁니다.”

뒤이어 그녀가 심도환에게 말했다.

“당신 차례에요.”

심도환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저희 애가 갈수록 말을 안 듣습니다⋯⋯.”

그 후로도 각 교도는 가족의 죽음, 남편의 폭력, 아내의 무관심, 아이의 말썽, 직장에서의 고민 등을 공유하며 다른 교도들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그렇게 고백 시간을 마무리 짓고, 임결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성찬을 즐길 시간이네요.”

건우는 곧장 허리와 등을 곧추세우며 눈을 반짝였다.

잠시 후, 임결과 이정희가 안방에서 반투명한 원통형 용기와 각종 식기를 품에 안고 나왔다. 용기 안에는 희고 걸쭉한 액체가 가득 들어 있었다.

임결은 가장 먼저 성건우 앞으로 다가와 들고 있는 도시락통에 그 흰 액체를 한 국자 담아주었다.

“오늘 성찬은 요거트란다.”

가볍게 냄새를 맡아보던 그가 이상하리만치 진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의 관용을 찬미합니다!”

성건우는 단맛이 살짝 도는 요거트를 빠르게 해치운 뒤, 빈 도시락통을 들고 임결과 이정희를 쳐다보았다.

성찬 분배를 담당하는 그녀들은 단번에 성건우를 무시하고,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며 교도들에게 요거트 한 국자씩을 나눠주었다.

성찬례를 마친 후, 이정희는 식기를 들고 중문을 통해 안쪽 방으로 들어갔고, 임결은 주위 교도와 한담을 나누며 오늘 성찬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임결은 이제 성건우 쪽으론 아예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맛은 좋은데 양이 너무 적습니다.’

성건우가 무슨 말을 할지, 그냥 알아서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했다.

애초에 왜 저런 사람을 교단에 끌어들인 걸까. 물론 성사(聖師)께서는 언제나 젊은이들을, 특히 결혼적령기의 젊은이들을 대대적으로 가입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젊은이도 젊은이 나름 아니던가?

이내 임결은 중문으로 통하는 복도로 나아가, 교도들을 향해 뒤돌았다.

“오늘 집회는 여기까지예요. 다들 순서대로 돌아가세요. 조심하시고요.”

동시에 예를 갖춘 교도들은 조금씩 나뉘어서 순서대로 이정희의 집을 빠져나갔다. 그런 뒤, 다들 어둑한 복도를 따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 * *

두꺼운 암녹색 겉옷을 걸친 성건우는 조악한 손전등을 쥐고 감시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이동했다. 그의 곁에는 심도환도 함께였다.

헤어지기 직전, 어둠에 잠긴 천장을 한번 바라본 심도환이 불쑥 물었다.

“진정한 하늘은 어떻게 생겼든?”

성건우가 손전등에서 나오는 빛기둥을 보며 답했다.

“아주 높고, 아주 파랗고, 아주 공허했어요.”

심도환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집으로 향했다.

* * *

성건우는 B 구역 196호로 돌아갔다.

그는 돌아가자마자 좀 부족한 잠을 청하려 눈을 붙인 뒤,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했다.

일부러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출근 시간을 피해, 거의 식당이 문을 닫기 직전에야 입장했다.

든든히 배를 채운 뒤엔 C 구역 구석에 자리한 엘리베이터 로비로 향했다.

이곳엔 엘리베이터가 총 열두 대인데, 모두 연구 구역으로 이어졌다.

성건우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익숙하게 25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자, 그는 도중에 카드를 긁고 3층 버튼을 눌렀다.

3층에 도착한 성건우가 금속 문 너머 복도를 따라 걷다가, 오른쪽에 붙은 가장 안쪽 방으로 향했다.

똑똑똑-

그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성건우는 먼저 이름을 대고 목적을 덧붙였다.

“인 선생님, 재검사를 예약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안에선 다시 인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건우구나, 그래. 마침 딱 시간이 비었어.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성건우는 문고리를 돌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인 선생은 전처럼 금테 안경에 흰색 가운을 걸치고, 원목 책상 앞에 앉아 만년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그녀는 머리를 틀어 올리는 대신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몇 살은 더 어려 보였다.

“안녕하세요, 인 선생님.”

성건우가 웃으며 인사했다.

인 선생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그래, 안녕. 여기 앉아.”

그가 자리에 앉자, 앞에 펼쳐둔 파일을 살피던 그녀가 여유롭게 물었다.

“외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나 됐지?”

“어제 오후에 돌아왔습니다.”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인 선생은 만년필 끝부분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니 테스트는 생략하도록 할게. 그냥 편안하게 대화나 좀 나눌까 해. 어때? 이번 외근은 순조로웠어?”

“아주 위험했어요.”

성건우는 이번에도 솔직하게 답했다.

인 선생의 얼굴엔 호기심 어린 표정이 드러났다.

“얼마나?”

“보통의 안전부 직원이었다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정도로요.”

성건우는 비교 대상까지 찾아 설명했다.

“건우 네 운이 정말 좋았던 모양이네. 이렇게 살아 돌아온 걸 보니.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보안 사항이면 말 안 해도 돼.”

감탄하던 인 선생이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성건우는 잠시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차를 타고 대문 밖으로 나가니 하늘이 보였어요. 아주 파랗고, 높고, 공허한 하늘이요. 꼭 모든 걸 다 빨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처음에는 좀 무서웠지만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괜찮았습니다.

또 주위엔 나무들이 아주 많았어요. 그 나뭇잎 일부는 녹색이고, 일부는 노랗게 말라붙어 있었어요. 공기 중에서는 신선한 똥 냄새⋯⋯.”

“그만! 그렇게까지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인 선생이 코를 살짝 막으며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뒤이어 찻잔을 든 그녀가 맑은 차를 홀짝이며 물었다.

“그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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