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익숙한 생활
곧장 활동 센터 안으로 들어간 성건우는 아는 사람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과도 다 인사를 했다.
이내 활동 센터 책임자 진현오는 삐걱거리는 스툴에 앉아있다가 성건우를 보자마자 오른손을 흔들었다. 자신의 곁으로 오라는 뜻이었다.
“그래, 이번 수확은 어땠어?”
진현오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성건우가 답하기도 전, 그가 앞 좌판에 놓인 물건들을 가리켰다.
“아니면 내가 대신 뭐라도 좀 팔아주랴? 공헌 점수 약간만 떼주면 돼.”
그 옆에 쪼그려 앉은 성건우는 진현오가 오랫동안 팔지 못한 낡은 기계식 손목시계를 집어 들며 진지하게 물었다.
“장갑차를 놓기에는 좀 좁지 않을까요?”
“……?”
진현오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 사이 다시금 성건우의 질문이 이어졌다.
“여기서 중형기관총도 팔릴까요?”
진현오는 본능적으로 버럭 소리쳤다.
“회사를 뭐로 보는 거냐! 그런 물건들은 상납해야지! 쯧⋯⋯. 하긴, 넌 이제 막 돌아왔으니 수확물은 다 아직 심사 중이겠구나. 끝내 뭘 돌려받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
말을 잇던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다고 곧장 말하면 될 것이지, 왜 굳이 빙빙 돌려가며 얘기해? 장갑차? 중형기관총? 왜, 차라리 군용 외골격 장치도 얻었다고 그러지?”
성건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그거야 어르신이 정말로 그걸 원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달렸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타깝기는 개뿔이!”
욕설을 내뱉던 진현오가 돌연 다시 질문을 이었다.
“어땠어, 이번 외근은 순조로웠어?”
성건우는 기억을 한번 되새겨보았다.
“엄청 자극적이었어요.”
진현오가 실소했다.
“자극은 개뿔! 너 같은 신입이 위험한 일을 겪었으면 얼마나 겪었겠어? 기껏해야 회사 주위에서 토끼나 잡고 야외 생존 훈련이나 좀 받았겠지.”
성건우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다.
“음, 토끼 잡기가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진현오는 애송이 같은 그를 비웃었다.
“하하. 난 아직도 토끼를 처음으로 잡았을 때를 기억한다고. 구세계에서 쓰던 소총을 이용했었지. 지금은 다 도태되었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 총으로 한 방을 갈기자 토끼가 그대로 으스러졌어. 어찌나 아깝던지⋯⋯.”
이때, 어떤 직원이 다가와 좌판에 놓인 물건을 뒤적거렸다.
진현오는 곧장 성건우를 내버려 둔 채 그 물건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성건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활동 센터 가장 구석진 자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향했다. 의자를 끌어다 앉은 그는 대화를 나눌 사람을 찾는 대신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작은 나무 테이블엔 남자들 한 무리가 둘러앉아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진 사람은 의자 없이 쪼그려 앉아 게임을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들 주위로 더 많은 이들이 모여있었다. 더러는 팔짱을 낀 채 훈수를 뒀고, 몇몇은 큰 소리로 감탄사를 뱉었다. 또 누군가는 킥킥 웃으며 끊임없이 조롱했고, 일부는 자신도 참가하고 싶다며 게임 중인 사람을 자꾸 채근했다.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는 여자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회사에 떠도는 갖가지 소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중엔 헝겊으로 신발 바닥을 기우는 이도 있고, 물자 공급 시장에서 바꿔온 털실로 아이들에게 입힐 겨울옷을 짜는 이, 또 누군가는 몇 대를 거쳐서 쓰는 물건인지 모를 플라스틱 젖병으로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이도 있었다.
또 다른 한쪽 구석에서는 젊은이들 몇 쌍이 각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귓속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들 앞쪽에는 포장된 사탕이나 단 것, 또 주황색 또는 초록색 유리병 같은 게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보통 물자 공급 시장 내에서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보통 사람은 명절이나 돼야 살까 말까 했지만, 이제 막 직무에 배정돼 연애를 시작한 젊은이들은 그런 것에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아직 각자 부모님 집에서 먹고 지내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성건우는 활동 센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장 가로등 불빛 가장자리, 그 양옆에 자리한 방 사이로 구석진 곳에 일렁이는 인영들이 보였다. 그림자는 내내 길게 뻗기도, 뚝 떨어지기도 했다.
물자 공급 시장으로 이어지는 길 위엔 유리병 여러 개를 가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색은 달라도 다 텅 빈 유리병이었다. 아마도 그건 공헌 점수로 바꾸려는 유리병 같았다.
그리고 집 안팎으로 넓게 트인 공간은 아이들 달리기 시합장이 돼 있었다.
성건우는 평안한 표정으로 계속 꼼짝도 하지 않고, 이러한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 * *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용여홍이 활동 센터 입구로 들어섰다.
그는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뒤, 구석에 앉은 성건우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해?”
성건우는 보통 이 시간이면 집에서 정각 뉴스나 그 후에 이어지는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다렸다. 용여홍도 매우 잘 아는 친구의 습관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이제 막 외근을 마치고 돌아와 더 휴식이 필요한 때였다.
성건우는 용여홍의 질문을 무시하고, 다른 걸 되물었다.
“넌 그 피 어쩌고 하는 방송국 아가씨한테 안가고 뭐해?”
용여홍이 성건우 곁에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피원영? 방금 갔다 왔어. 다른 남자랑 연애 중이더라고.”
성건우도 한숨을 내쉬며 맞장구를 쳐줬다.
“휴, 나는 유전자 개량을 했는데도⋯⋯.”
“아, 진짜!”
짜증을 내던 용여홍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이해해. 밖에 나갔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왔잖아. 그 여자한테 난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안 돌아올지도 모르는 사람이야. 알고 지낸 지도 얼마 안 되는, 친구라고도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날 기다리겠어?”
성건우는 용여홍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뭐라고 할지 알아?”
용여홍이 표정을 굳히며 답했다.
“이게 바로 애쉬랜드야, 라고 하겠지.”
성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네가 외근을 안 나갔어도 그 여자랑 잘 될 가능성은 없었어.”
용여홍은 순간 화를 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픈 데만 골라서 잘도 쑤시네.”
곧이어 성건우가 한 손으로 테이블을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한테 다른 사람이나 소개해달라고 해. 그래, 다음 외근까지는 적어도 두 달이나 남았으니까⋯⋯.”
용여홍이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뭐, 가게?”
성건우가 답하기도 전, 용여홍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래, 밖에서 돌아오고 나니 좀 안심되더라고. 안정되니까 피곤이 몰려오던데? 너도 얼른 가서 좀 자.”
동시에 그도 성건우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건우는 용여홍을 힐긋 바라보다 말했다.
“곧 정각 뉴스 할 시간이야.”
“안 피곤해? 뉴스를 듣겠다고?”
이해가 가질 않아 질문을 되묻던 용여홍이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 사실 구조팀에서 피곤했던 건 자기 자신뿐 아니었을까.
성건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손을 휘휘 휘두른 뒤, 용여홍에게 작별을 고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 * *
천장 가로등 흰 불빛 아래, 한 그림자는 길어졌다 짧아지길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 성건우는 외투를 벗고 침대에 기대듯 누웠다.
불을 켜지는 않았지만,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덕분에 그의 방도 절반 정도는 밝았다.
치직-
안정된 분위기 속, 바깥 천장에 걸린 확성기에서 뭔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후, 앳되고 달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캐스터 허정민입니다. 현재 시각은 저녁 8시 정각입니다.
오늘 회사 이사회의 이사, 인영구 부총재가 에너지 구역을 시찰하고 겨울철 에너지 공급의 보장을 강조했습니다⋯⋯.
지표면의 기상 예보에 따르면 앞으로 수일 안에 빙원 남쪽에서 밀려든 한파에 의해 검은 늪 기온이 5도 정도 떨어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늘 공장 구역에서 또다시 무심병 한 건이 발생했습니다. 발병한 환자는 이미 통제된 상태입니다⋯⋯.
⋯⋯오락부에서는 각 부서 책임자들을 초빙해 연말 공연에 관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확성기로 흐르는 목소리는 냉랭하기만 한 방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가로등 불이 속속들이 꺼지고, 주위도 이젠 어둑해졌다.
성건우는 오른손을 들어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똑바로 누웠다.
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이번에 성건우가 나타난 장소는 뭇별 홀이 아니었다. 미약한 빛이 흐르는 허상의 바다였다.
그의 눈앞엔 크지 않은 섬 하나가 있었다. 그 위를 채운 짙은 색 흙과 기암괴석이 있지만, 생명의 흔적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성건우가 기원의 바다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마주한 섬이었다.
골동품 학자 이두형은 이것이 각자 마음에 잠재된 두려움이라고 말했다. 각성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섬은 다 다르며 숫자도 각기 다양하다고 했었다.
성건우는 벌써 며칠이나 이곳에 머물러 있었지만, 여태 이 섬을 극복하지 못했다. 섬에 괴물은 없었으나 자연적 조건이 너무나 악랄했다.
섬에 오른 순간부터 눈앞에 보이는 빛은 모조리 사라졌고 귀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섬 위에서 그는 꼭 어둡고 밀폐된, 기이한 방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손을 뻗어도 다섯 손가락 하나 볼 수 없고, 심지어는 자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이에 성건우는 시간의 흐름도 감지하지 못했다. 어둠과 적막이 실체로 변해 자신의 심령을 천천히 침식하는 듯한 느낌만 받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섬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다. 정신이 무너져 내리고 극도의 두려움으로 거의 미칠 것 같을 때면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만약 이두형이 기원의 바다와 그 위에 자리한 섬들의 의미를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성건우는 이미 시도도 포기한 채 끝없는 바다로 눈길을 돌려 다른 섬을 찾았을 것이었다.
그는 이 섬을 피해 다른 섬을 찾는 건 마음속 두려움에게 지는 것이라 믿었다. 그 순간 각성자 능력도 더는 강화되지도, 변하지도 않을 터였다.
한동안 섬을 응시하던 성건우는 그가 세워둔 계획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허상의 해수면 위로 성건우의 모습이 보일 듯 말 듯 비췄다.
몇 초간 망설임 끝에, 그의 눈동자가 점차 짙어졌다.
“그들은 반고 바이오 직원이고, 나 역시 반고 바이오의 직원이다. 그들은 아주 젊고, 나 역시 아주 젊지. 그들의 부모님은 곁에 있다. 그러니까⋯⋯.”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던 성건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 역시 곁에 있어.”
그의 얼굴에 점차 웃음이 피어났다. 부드럽고 안정된 웃음이었다.
더 이상의 시간 낭비는 필요 없었다. 양손으로 섬 가장자리 바위를 움켜쥔 성건우가 곧장 그 위로 몸을 훌쩍 넘겼다.
기원의 바다는 허상이라 그의 옷이 젖진 않았다. 머리카락도 뽀송했다.
두 발이 막 땅에 닿은 순간,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져서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줄어드는 공간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깊은 어둠 속에도 알 수 없는 어둠이 잠재돼 있을 듯했다.
“이봐! 안녕?”
성건우가 목청을 높였지만, 역시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이 순간의 그는 꼭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것만 같았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뒤안길로, 극도로 공포스러운 장소로 밀려난 느낌이었다.
그래도 성건우는 걸음을 내딛어보려 했다. 그로 인해 마음속 두려움과 불안함을 조금이나마 떨칠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도 짙은 어둠은 여전히 느릿하게, 끊임없이 그의 심령을 침식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어둠 속, 성건우는 기댈 데라도 찾고자 몸을 웅크렸다.
덕분에 평소보다 더 오래 버틴 듯했으나 뒤로 갈수록 곁에 공기밖에 없다는 사실만 더 생생히 느껴졌다. 심장 박동은 더 빨라지고, 낙담한 그의 정신도 점차 흔들렸다. 그 순간, 성건우는 낮게 읊조렸다.
“거짓이야⋯⋯.”
그의 이마로 식은땀이 빠르게 배어 나왔다. 그 사이 두 무릎은 천천히 굽어졌다. 더 쪼그려 앉은 성건우는 스스로를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