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귀가
당시 상황을 떠올리던 장목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하, 난 청력만 안 좋을 뿐이지 시력까지 나쁜 게 아니야. 지난 며칠간 넌 어딜 가나 아가씨들을 줄줄 이끌고 다녔잖아. 엄청 즐거워 보이던데.”
“크흠⋯⋯.”
용여홍은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헛기침만 내뱉었다.
당시 그는 정말로 행복에 겨워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성으로부터 이런 환대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목화는 아무 눈치도 못 챈 척, 태연한 얼굴로 계속 그를 놀렸다.
“왜? 누구랑도 우정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았던 거야? 그럴 리가⋯⋯.”
“쟤 아마 그냥 겁에 질렸을걸요.”
음악을 들으며 운전하던 성건우가 끼어들었다.
용여홍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동료들의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하비스트 타운 아가씨들은 지나치게 열정적이었고, 용여홍은 그에 기겁한 나머지 감히 무슨 짓도 하지 못했다.
팀장에게서 앞서 들은 말이 있었다. 장목화는 그 아가씨들이 적극적인 진짜 이유는 바로 반고 바이오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비스트 타운 주민들은 반고 바이오 사람들을 유토피아처럼 여긴다고 했다. 따라서 여자들도 반고 바이오 남자와 결혼하길 원했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반고 바이오 사람의 아이라도 가지길 원했다. 하비스트 마을에도 그 우수한 유전자를 남기고 싶어서였다.
이뿐만 아니라 용여홍을 놀라게 한 여러 요소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하비스트 마을 사람들의 청결 상태였다. 하비스트 타운은 정수 칩이 배달되기 전까진 계속 깨끗한 물이 부족했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겁에 질렸을 수 있지.”
장목화는 쯧, 혀를 찬 뒤 성건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너는? 그 아가씨들, 갈수록 네게서 떨어져 나가던데, 혹시 그들을 상대로 능력이라도 쓴 거야?”
성건우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살짝 몸을 흔들며 답했다.
“아니요? 저는 그냥 현재 인류가 처한 사항, 오염 문제, 질병, 기아, 변이, 무심자, 또 우리 모두의 어깨를 짓누르는 운명에 관한 얘기만 했어요. 다들 상당히 감명받고 느낀 바가 많았나 봐요. 돌아가 좀 더 생각해본다고 하던데요. 하긴 그런 이야기들, 다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다들 최대한 빨리 깨달음을 얻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래, 내가 널 얕잡아 봤네.”
장목화는 웃음을 꾹 참고, 대신 매우 진지한 얼굴로 성건우를 칭찬했다.
뒷좌석의 백새벽은 내내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지만, 표정은 매우 온화했다. 얘기에도 집중하고 이따금 미소를 그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장목화가 콘솔 박스를 두드리며 말했다.
“세워, 이제부터는 내가 운전할게. 어차피 입구에서 검사를 통과할 때는 내가 운전석에 앉아 있어야 하잖아.”
성건우는 못내 아쉽다는 듯 차를 세우고 보조석으로 돌아갔다.
이내 장목화는 운전석에 앉자마자 스피커부터 끈 뒤 웃으며 말했다.
“이제 집으로 가자!”
그녀는 엑셀을 밟고서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 입구로 돌진했다.
그 사이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검은 늪 철갑 뱀과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상대와의 전투, 명랑한 소리로 책을 읽던 해자 마을 아이들, 철강공장 폐허에서 있었던 정법과의 만남, 검은 쥐 마을의 학살 현장…….
차으뜸의 강력한 매혹, 고등 무심자와 변이된 생물, 불이 켜진 후 일반인처럼 행동하던 무심자들, 다시 어둠에 뒤덮인 도시, 그 속에 홀로 울려 퍼지던 구성진 노랫소리, 열정적인 하비스트 타운, 황야에서의 생존 훈련⋯⋯.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꼭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듯했다.
* * *
구조팀의 눈에 드디어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 입구가 비쳤다.
용여홍은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긴긴 바람 속을 표류하다 뿌리로 돌아온 낙엽의 느낌이 이러할까.
장목화 역시 차를 몰면서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간 지 오래되면 돌아가고 싶고, 돌아온 지 오래되면 또 나가고 싶고. 인간이란 정말 모순적인 생물이야.”
차는 여러 사람의 감정을 싣고서, 계속해서 대문을 향해 나아갔다.
일련의 검사를 통과한 후, 구조팀은 마침내 647층 14호로 돌아왔다.
장목화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
“밖에서 가져온 것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회사에선 이걸 다 심사한 뒤에 다시 돌려줄지 말지 결정할 거야.”
그리고 그녀가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결국 회사에 상납해야 하더라도 공헌 점수는 넉넉하게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원래 회사에서 마음에 들어 하는 물건들이 그렇게 많질 않아. 대부분은 너희들한테 돌아갈 거야, 하하.
양범석 대대는 돌아왔는지 모르겠네. 그 장갑차에도 물건이 꽤 많았는데.”
양범석의 이름을 듣자마자 백새벽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도시 이상 현상들에 관해 유용한 단서를 찾았을지도 궁금하네요.”
장목화도 동조했다.
“나중에 만나면 한 번 물어볼게. 보안 등급이 그다지 높지는 않은 사항이길 바라자고. 휴, 근데 내 생각엔 아마 못 찾았을 것 같아. 실험실이 폭파돼서 그 안에서 포효하던 생물도 뼛조각 하나 안 남았을걸.”
그녀의 말이 이어지는 사이, 성건우는 이미 밖에서 주워온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검은색 선글라스, 흑판 기계식 손목시계, 해자 마을에서 가져온 노란 꽃잎이 담긴 투명한 유리구슬, 철강공장 병원 폐허에서 찾아낸 종이, 검은 쥐 마을 여자아이 것이었던 녹음기 펜.
오수혁에게서 찾은 우베이 7 권총과 동전 열두 개, 외골격 장치를 가진 강도에게서 찾아낸 사냥꾼 배지, 이 외의 수확물은 지프에 남아있었다.
물건들을 한번 훑어보던 장목화가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뭐지?”
“철강공장 병원 외래진료실에서 주운 종이입니다.”
성건우가 답했다.
“왜 여태 말 안 한 거야?”
장목화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잊어버렸습니다.”
성건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당당했다.
장목화는 그냥 시선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그럴 수 있지. 정법을 맞닥뜨렸으니까. 잘했어. 상부에 넘기면 유용한 정보가 남아있는지 알아서 연구해볼 거야.”
정리를 다 마치고, 장목화가 모두를 불러 앉혔다.
그녀는 웃으며 서두를 꺼냈다.
“다들 지쳐있으리라는 거 알아. 근데 전체적으로 이번 야영 훈련을 한번 복기해야 해. 왜, 새벽아. 할 말 있어?”
장목화의 시선이 백새벽에게 향했다.
백새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뗐다.
“해야 할 말은 이전 복기 때 이미 다하지 않았나요?”
“음, 이번에는 전체적인 훈련을 한번 아울러 보자는 거야.”
장목화가 토론 방향을 분명하게 잡아주자, 백새벽은 몇 초간 생각한 후에 말을 시작했다.
“뜻밖의 사건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단 한 번의 야영 훈련이었는데 지난 3년 동안 마주쳤던 것보다 더 많은 위험에 봉착했어요.”
성건우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운이 좋지 않아서⋯⋯.”
이 말에, 용여홍의 표정이 무너져내렸다.
“그만, 그만.”
성건우의 얘기를 중단시킨 장목화가 용여홍을 향해 웃어 보였다.
“난 운이니 뭐니 그런 건 안 믿어. 조금도 과학적이질 않잖아.”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 용여홍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자신을 보며 빙그레 웃고 있는 팀장을 발견했다.
“근데 말이야, 네 이름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뭐 여차하면 바꾸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용애홍은 어때? 네 부모님도 분명 만족하실걸.”
용여홍은 잠시 멍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팀장님, 운 같은 건 안 믿으신다면서요.”
“애쉬랜드에선 가끔은 뭐든 없다고 믿는 것보다 있다고 믿는 게 낫거든.”
이내 장목화가 소리 내 웃었다.
“하하! 농담이야. 난 이번 임무 보고서 작성할 때 널 합격시킬 거야. 동시에 구조팀 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팀을 바꿔 달라는 건의도 덧붙일게. 그럼 넌 감점 없이 다른 직무로 전환될 거야.”
용여홍은 감동받은 듯 황급히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장목화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 인사는 나중에. 난 건의만 할 수 있는 거니까. 최종적으로 널 다른 직무로 차출시켜주느냐 마느냐는 상부 뜻에 달렸어. 내가 너랑은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넌 완전히 불합격이고 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쓴다면야 즉시 구조팀을 나갈 수 있겠지만, 그럼 네 파일에는 오점이 남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용여홍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내 장목화는 피식 웃었다.
“사실 난 네가 좀 아까워. 운이 나쁜 것도 때로는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거든. 생각해봐, 만약 그렇게 뜻밖의 사건을 많이 맞닥뜨리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도시에 들어가서 구세계 인류가 위험한 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겠어? 이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확이라고!”
용여홍도 이젠 힘이 빠진 듯, 약간 무기력하게 자신을 변호했다.
“팀장님, 전 그렇게까지 운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장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알았어. 너한테 자신감을 좀 더 실어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어쨌든 이건 네가 이번 야영 훈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지.”
그녀가 해명할수록 용여홍의 기분만 더 찝찝해졌다. 그도 더는 강조하고 싶지 않다는 듯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런 역할은 안 하느니만 못하죠.”
장목화가 그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겠다는 듯 한껏 고개를 기울였다.
“뭐라고? 아니야. 뭐, 됐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복기나 계속하자고.”
그녀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 야영 훈련에서 겪었던 사건들, 그거에 관한 토론이나 결산은 이미 다 상세하게 했으니까 반복하진 않을게. 내가 원하는 건 너희들이 훈련을 전체적으로 아울러 보면서 사건 전후에 내린 각각의 선택을 평가하고, 반성할 부분이 있는지 살피는 거야.”
백새벽은 팀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억을 반추해보았다.
“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팀장님이 내리신 결정 하나하나 다, 당시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그저 예상 밖의 사건을 지나치게 많이 맞닥뜨리다 보니 위험했던 것처럼 보일 뿐이죠.”
용여홍도 동조했다.
“맞아요, 맞아요.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강도와 맞닥뜨렸을 때도, 기계 승려 정법을 만났을 때도, 검은 쥐 마을의 학살 현장을 마주했을 때도, 팀장님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면서 저희도 위험에서 구해주셨어요.”
이어, 성건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냥 다 네 운이 나빠서 그랬던 거야.”
“⋯⋯.”
용여홍이 성건우와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분명 성건우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장목화는 성건우를 살짝 흘겨보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농담이 싫다면 똑바로 얘기해. 계속 그런 식으로 군다면 친구가 남아나지 않을 거라고.”
“사, 사실 이미 습관이 돼서요.”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대꾸했다.
그러자 장목화도 손을 펼쳐 보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 나도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