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하비스트 타운
시간은 늘 그랬듯 착실하게 흐르고, 하늘 끄트머리도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어둠에 삼켜진 빌딩도 여명을 따라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구조팀의 눈에 그 건물들은 어제보다 더 묘비처럼 보였다. 짙고 검은, 혹은 회백색이나 황토색으로 퇴색된 묘비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가자.”
장목화는 빠르게 아침 식사를 해치운 뒤, 먼저 일어났다.
그녀는 백새벽과 용여홍에겐 장갑차에 탑승해 교대로 운전하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성건우와 함께 지프차를 맡기로 했다.
아침 햇살은 점차 더 밝아지고 있었다.
구조팀은 원래 왔던 길을 따라 터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길은 너무도 구불구불하고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길을 잘 아는 차으뜸이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그쪽으로 나아갔다간 늪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 또한 장목화는 그쪽 길이 묵직한 장갑차의 무게를 견딜 수 없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일행은 안여향의 말과 유적 사냥꾼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 북쪽으로 반 바퀴 정도 우회한 후, 비교적 상황이 좋은 도로를 타고 도시를 벗어났다.
이동하는 도중에 그들은 손목시계, 액정 화면, 선글라스, 유용하게 쓰일 각종 금속, 심지어 장갑차에 들어가는 기름도 두 통 찾았다.
계속 앞으로 달려가던 차 안에서 장목화가 홀연 눈을 가늘게 뜨고 보조석에 앉은 성건우에게 말했다.
“전방에 차량 행렬 하나가 오고 있어. 수십 명에서 100명 정도 규모야. 100명 정도 규모면⋯⋯ 양범석의 행동 대대일 거야.”
그녀는 말하는 동시에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 차량 행렬은 반고 바이오에서 이쪽의 이상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보낸 행동 대대였다.
구조팀은 곧 장갑차 등의 장비와 23대대 대장 양범석을 마주했다.
* * *
양범석도 다시 만난 장목화의 구조팀이 의아한 모양이었다.
흑회색 베레모를 고쳐 쓴 그는 지프차 뒤쪽, 회사 소속이 아닌 장갑차를 보고 장목화에게 물었다.
“하비스트 타운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왜 여기로 돌아온 거지? 저 장갑차는 어디에서 난 거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조팀이 그들보다 더 앞서 이 새로운 도시 유적에 도착했다는 사실이었다.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어색하게 웃던 장목화가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전 팀원이 차으뜸에게 매혹당해 좁은 길을 통해 폐허 도시에 진입하게 됐다는 것과 그 후에 겪었던 일들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그녀는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와 미스터리한 실험실, 고등 무심자, 가위 말, 수종, 이두형, 갈루란, 마지막 대폭발 등, 중요한 정보는 다 얘기했다.
하지만 이두형이 제공한 각성자 관련 지식과 더불어 성건우가 발휘한 능력은 비밀에 부쳤다.
장목화는 차으뜸의 매혹에서 벗어나게 된 이유를 고등 무심자와 수종에게로 교묘히 돌렸다. 어떻게 보면, 그 말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진지하게 장목화의 얘기를 듣던 양범석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고마워. 이런 정보 없이 무턱대고 들어갔다면 적잖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거다. 게다가 이곳에는 자네들이 만난 것보다 더 많은 고등 무심자와 변이된 생물이 있겠지.
우리 행동 대대만으로 도시에 진입하기엔 지나치게 위험하군.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위험해. 당장 이 정보를 상부에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겠다. 또 도시 가장자리에 임시 거점도 마련해야겠어.”
장목화는 손을 내저었다.
“대장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저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양범석은 곧 지프차 뒤쪽의 장갑차를 다시 힐긋 바라보며 손을 문지르더니 멋쩍은 듯 웃었다.
“우리 대대를 좀 지원해줄 수 있겠나?”
양범석 대대에 장갑차 한 대와 중형기관총 한 정이 추가된다면, 그만큼 전투력도 더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자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저 장갑차 안에는 많은 물건이 실려 있고, 그 모든 물건을 지프로 싣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 물건들을 책임지고 꼭 회사로 가져와 주셨으면 합니다. 물품 목록은 이미 다 작성해뒀습니다.
마지막으로 저 장갑차와 중형기관총은 저희 전리품이니 꼭 저희 공헌 점수로 돌려받을 겁니다.”
사실 구조팀 입장에서 애쉬랜드를 달리기에는 지프차가 더 편했다.
양범석은 약간 골치가 아프다는 듯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
양범석 대대와 작별을 고한 뒤, 용여홍과 백새벽은 지프로 돌아갔다.
* * *
장목화는 차를 몰면서 깊이 생각에 빠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행동 대대를 마주쳤다는 건 이 길에는 아무 위험도, 차으뜸을 만날 염려도 없다는 뜻일 거야. 건우야, 이제 추리 광대 효과를 거둬도 좋아.”
성건우는 검은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며 착용해보고 또 벗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팀장의 명령을 듣고 피식 웃었다.
“회사 내부에는 자유연애로 만난 부부도 상당히 많습니다.”
흠칫 놀라 멍한 표정이 된 장목화가 지프 클락션을 두드리며 말했다.
“맞아. 난 왜 공동 결혼으로 배정된 상대만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했지?”
뒤이어 성건우가 고개를 돌리고 백새벽을 바라보았다.
“인간도 믿고 의지할만해. 지난 며칠간 우리가 네 뒤도 지켜줬잖아?”
백새벽 역시 장목화처럼 흠칫 놀란 얼굴로 눈을 반짝거렸다.
이때, 장목화가 끼어들었다.
“그 말, 왜 이렇게 귀에 익지? 감히 내가 했던 말을 표절한 거야?”
“인용이죠.”
성건우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이들의 말싸움을 듣던 백새벽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저도 모르게 나온 웃음인 것 같았다.
이젠 용여홍 하나만 남아있었다. 성건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용여홍을 돌아보고 픽 웃었다.
“생식기 이식, 신경 재건 수술, 인공 자궁.”
“⋯⋯.”
순간 용여홍의 얼굴 근육이 몇 차례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성건우를 당장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그의 상대가 안 되기 때문이었다.
용여홍은 가만히 과거를 되새겨보다가 저도 모르는 새, 추리 광대의 영향에 휩싸여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갑자기 약간 두려움이 밀려왔다.
“야, 너 평소에도 나한테 추리 광대 능력을 쓴 건 아니지?”
성건우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답했다.
“가치도 없는 짓을 뭐하러.”
“⋯⋯.”
이를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할 말을 잃은 용여홍은 순간 더 얼빠진 얼굴이 됐다.
이내 장목화가 더 이상은 봐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건우 넌 일단 좀 자. 이따 네가 운전해야 하니까. 휴, 드디어 이곳에서 벗어났으니 더는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목적지는 하비스트 타운이다!”
성건우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 선글라스를 끼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 * *
뭇별 홀 깊은 안쪽, 은색 계단 꼭대기 회백색 돌문 앞.
성건우는 눈앞에 자리한 홈 세 개를 바라보았다. 그런 뒤, 한 손은 주머니에 꽂고 한 손만 앞으로 내밀어 문에 얹었다.
이내 홈 안쪽에선 흰빛이 나타났다.
빛은 허상의 별 세 개로 응집됐다.
그중 추리 광대를 대표하는 흰빛은 나머지 두 개보다 훨씬 밝았다.
다음 순간, 억지쟁이라는 글자를 드러낸 흰색 빛이 급속도로 밝아지더니 추리 광대와 비슷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묵직한 돌문이 살짝 진동하면서 뒤쪽으로 느릿하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문틈이 점점 넓어지니, 안의 광경도 제법 훤히 드러났다.
그곳은 끝이 보이지 않는 허상의 바다였다.
수면에서 미약한 빛이 일렁이는…… 기원의 바다였다.
* * *
“자, 이제 건우 네 차례야. 이제 좀 순조롭게 가보자고.”
장목화가 성건우를 깨웠다.
그러자 성건우가 눈을 뜨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팀장은 어느덧 지프를 늪 깊은 곳까지 몰고 왔다.
그는 바로 운전석으로 가 장목화와 자리를 바꿨다. 자리에 제대로 앉고 나서야 전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흑회색 황야가 보였다.
하늘엔 구름도 극히 드물었다. 참 맑고 파랗기만 했다.
“날씨 진짜 좋네.”
고개를 끄덕이던 성건우는 다시 선글라스부터 착용한 뒤, 배낭에서 작은 스피커를 꺼냈다. 곁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장목화의 시선이 느껴졌다.
성건우는 이리저리 기지개를 켜다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음악도 없이 운전할 수 있겠습니까?”
백새벽과 용여홍의 시선도 이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건우는 당당하게 스피커를 켰다.
스피커에선 곧 호령하는 듯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 일어나라, 굶주림과 추위에 고통받는 노예들이여! 일어나라, 전 세계의 고통받는 자들이여! (*주1: 민중가요《인터내셔널가》)
웅장하고 당당한 음악은 이 순간의 배경이 되고, 성건우는 곡조처럼 당당히 손을 흔들며 외쳤다.
“출발!”
동시에 성건우는 엑셀을 밟으며 황야 저 먼 곳으로 질주했다.
* * *
- 여태껏 구세주는 없었고, 신선과 황제에 기대할 수도 없었네. 인류의 행복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 할 뿐!
힘찬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지프는 숲 사이를 거칠게 달렸다.
“드디어 회사로 돌아가는구나⋯⋯.”
용여홍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감개무량해져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무 오랜 시간 밖에 나와 있었기 때문인지,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회사 내부의 안정적인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애쉬랜드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다 반고 바이오란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회사 본부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반고 바이오는 언제나 비밀스러운 존재로 있을 수 있었다.
수많은 유적 사냥꾼도 구조팀이 현재 자리한 이 구역에 강력한 강도단 여럿이 머물고 있다고만 알고 있어서 감히 그 근처론 접근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애쉬랜드엔 파란 하늘과 흰 구름, 태양, 숲과 더불어 각양각색의 풍광이 구조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탁 트인 환경이었다.
용여홍의 중얼거림을 듣고, 보조석에 앉아 귀를 만지작거리던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회사로 돌아가기 싫어할 줄 알았는데. 하비스트 타운 아가씨들이 상당히 열정적이었잖아.”
그 말에 용여홍의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팀장님, 그렇게 없는 말 지어내실 겁니까?”
하비스트 타운은 검은 늪 황야 산림 지대의 구석진 곳에 자리해 있어 찾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구조팀이 모는 지프도 안으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당시 구조팀은 산 아래를 지키던 경비를 따라 거의 15분을 걸어가서야 드넓게 펼쳐진 논밭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하비스트 타운은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안전은 보장돼도 늘 수자원 부족 현상에 시달렸다. 산에 물이 없는 건 아닌데, 물은 흙이 섞인 듯 상당히 더러워 보였다.
하비스트 타운 주민들도 불결해 보이는 그 물을 농지에 대는 것조차 걱정스러워했다. 혹시나 그로 인해 오염이라도 될까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주민들은 반고 바이오에 의탁하기 전까진 빗물을 모으거나 산 반대편에서 물을 길어오는 등 힘겨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힘겨운 계절이 와 산행이 힘들어질 땐, 어쩔 수 없이 더러운 물을 마셔야 했다.
그래서 이들의 평균 수명은 해자 마을만도 못한 수준이었다.
그때, 구조팀이 등장해 새로운 정수 칩을 건네주고, 조악한 정수장도 고쳐줬다. 주민들이 구조팀에게 얼마나 고마워했는지는 굳이 설명도 필요 없었다. 덕분에 구조팀이 내내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된 것이었다.
구조팀은 진귀한 음식을 대접받았고, 심지어 하비스트 타운의 여자 여럿이 성건우와 용여홍을 에워싸며 아주 적극적으로 굴었다. 남자들도 똑같았다. 백새벽과 장목화 역시도 내내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