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88화 (88/649)

88화. 이전에는 있었던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팀은 8층에서 새로운 임시 거처를 찾았다. 내부 구조는 605호와 완전히 똑같았다.

장목화는 805호 탐색을 마치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임무를 지시했다.

“새벽아, 식당 창문을 내다보니 지프와 장갑차가 보였어. 너는 거길 감시하고 있어. 여홍이 넌 창 앞에서 거리 동정을 살펴. 나랑 건우는 먼저 잠깐만 휴식 취할게. 1시간 뒤에 교대하자.”

“예, 팀장님!”

백새벽과 용여홍은 각자 무기를 쥔 채 전망이 훤히 트인 위치로 향했다.

성건우는 휴식하는 대신 콘센트가 있는 곳에 앉더니 배낭에서 이것저것 꺼냈다. 전에 챙긴 손바닥만 한 스피커와 소형기기, 도구, 부품, 회로였다.

그의 의도를 간파한 장목화가 한마디 던졌다.

“이렇게 급하게 고칠 필요는 없잖아?”

“이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성건우가 하얀 등불 아래 도구를 집어 들며 답했다.

“왜?”

장목화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이내 성건우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음악이 함께한다면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스피커에 자체적인 저장 칩이 있는 것 같아요. 안에는 분명 구세계의 음악이 담겨 있을 거예요.”

“⋯⋯글쎄.”

장목화도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했다.

사실 그녀도 이런 상황에 한가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고등 무심자와 변이 생물의 존재 때문에, 파릇파릇한 신입 용여홍을 더 각별히 신경 써야만 했다.

그래서 장목화는 말로는 휴식을 취하겠다고 하고선, 눈을 감고 한숨 돌리며 전기 신호를 감지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성건우도 휴식 대신,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상관없었다. 본래 유전자 개량을 받은 이들은 하루 이틀 정도 잠을 자지 않아도 멀쩡했다.

그렇게 성건우가 스피커 수리에 열을 올리는 동안, 용여홍은 바깥을 경계하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8층에 불과했지만, 야경을 감상하는 덴 무리가 없었다.

까만 밤하늘에 총총 박힌 별빛이 도시의 야경을 수놓고 있었다. 용여홍은 여태 사진으로만 본 야경을 실제로 마주한 것에 가슴이 벅찬 듯했다.

한참을 야경에 취해있던 그가 결국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짜 예쁘네⋯⋯.”

동시에 그는 이러한 광경에 담긴 독특한 기운을 느꼈다. 다만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용여홍이 다시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좀 낮아서 아쉽네. 더 높은 곳에서 보면 훨씬 예쁠 텐데.”

그 말을 듣고, 장목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통유리창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도 창문 밖의 광경을 함께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꼭대기로 가볼래? 상황도 안정됐고, 다들 얌전하잖아.”

“좋아요.”

용여홍이 곧장 답했다.

“너희도 갈래?”

장목화가 돌아서서 성건우, 백새벽에게도 물었다.

“좋습니다.”

백새벽이 답했다. 그녀도 지금은 마음을 좀 놓아도 될 때란 걸 알았다.

성건우도 잡다한 물건들을 배낭에 쑤셔 넣고 일어났다. 지금 그가 유일하게 들고 있는 건 바탕은 파랑, 표면은 검은색인 스피커뿐이었다.

“거의 다 됐어요. 이 배터리를 아직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가자, 가자. 갔다 와서 다시 해봐.”

장목화가 채근했다.

* * *

일행은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내렸다.

계단을 올라 옥상 문을 여니, 가슴 높이에 이르는 난간 앞에 이르기도 전에 탁 트인 광경이 드러났다.

길가, 건물 안, 높은 곳 어딘가……. 저마다 다른 곳에서 흘러나온 하얗고 노란빛들이 도시를 빼곡히 뒤덮고 있었다.

반짝이는 빛들은 꼭 느릿하게 밤하늘을 표류하는 별 같기도 했고, 끝도 없는 바다 위에서 맡은 구역들을 밝히는 등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빛 속을 오가는 인영과 차들도 하나의 전경이 되어 도시에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장관이네요⋯⋯.”

용여홍은 재차 진심에서 우러난 감탄사를 내뱉었다.

장목화와 성건우 역시도 말없이 옥상 가장자리에 서서 그림 같은 광경에 넋을 놓고 있었다. 지금 이 풍광과 함께 드는 감정들은 세상의 갖가지 글자들을 끌어모은다 해도 절대 완벽하게 형용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얼마 뒤, 성건우는 돌연 뒤쪽으로 두 발 정도 물러나 쪼그려 앉았다.

“이럴 때 음악이 빠질 수가 없지⋯⋯.”

그는 스피커를 내려놓고, 계속해서 주물러대며 성능시험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 쪽에서 하늘을 다 진동시킬 정도의 처량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포효의 메아리가 이어지던 사이, 장목화는 그 소리가 들려온 곳에서 밝은 화염을 목격했다. 폭발이었다.

콰광!

뒤이어 고막을 울릴 정도의 폭발음이 모든 기척을 다 뒤덮어버렸다.

회백색 연기가 빠르게 응집해 꼭 거대한 버섯처럼 솟구쳐 올랐다.

구조팀도 지금 이 빌딩 자체가 파르르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난 성건우는 금세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가 폭발이 일어난 곳을 바라보았다.

몸집을 키워가는 화염과 뭉게뭉게 피어나는 연기 속, 해당 구역의 불빛이 몇 번 깜빡이다 속속 꺼져버렸다.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 빌딩도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도시 곳곳의 가로등도, 빌딩 유리창을 수놓던 빛도 줄지어 꺼졌다.

도시는 단 몇 초 만에 어둠에 삼켜졌다. 바깥이나 창문 안으로 각자 일에 몰두하던 무심자들과 거리를 오가던 차들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미약한 달빛 아래, 빌딩들은 보일 듯 말 듯 흐려졌다. 빽빽이 늘어선 빌딩들이 다시 빛을 잃자, 꼭 저 깊은 악몽 심연에 숨은 괴물이 된 것만 같았다.

온 도시가 또 한 번 죽음과 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구조팀은 잠시 몇 초간 움직임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어도 정신은 계속 멍할 뿐이었다. 그와 달리 심장은 저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지금 이 감정 역시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 캄캄한 사방을 지켜보던 구조팀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빌딩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연약한 별빛 아래, 어느 창문에서 무심자 하나가 기어 나왔다. 흰 머리칼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힘겹게 창밖으로 기어 나와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더니, 일순간 늙은 유인원처럼 빌딩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이에 충격을 받은 용여홍은 더는 참기 힘든 듯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탁-

비틀비틀 물러나던 그의 발이 바닥에 놓여 있던 스피커를 건드렸다.

치직……. 치직치직-

네 사람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스피커에선 여인의 처연하고 애처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과거의 고통과 슬픔은 잊을 수가 없는데⋯⋯.

탁 트인 옥상 위, 끝없는 적막에 휩싸인 도시 속에 멍하니 선 네 사람 사이로 구슬픈 음악 소리가 구성지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높디높은 빌딩 꼭대기에 자리한 텅 빈 옥상에선 여자 가수의 처연한 노랫소리가 간드러지게 번져가고,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던 장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적막한 어둠에 뒤덮인 세상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좋은 노래네.”

그리고 다른 팀원들이 호응하기 전, 다시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내려가자. 불이 꺼졌으니 또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몰라. 계속 지프와 장갑차를 감시해야겠어. 자칫 잘못했다가는 둘 다 잃게 될 거야. 그러면 앞으로 더 골치 아픈 위험과 맞닥뜨려야 할 테고.”

장목화는 내일 아침 타고 갈 교통수단에 대해선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본래 이 폐허 도시엔 이용할 수 있는 차들이 많았다.

“예, 팀장님!”

용여홍이 조건반사적으로 답했다.

이내 장목화가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스피커 꺼. 과녁 신세 되고 싶은 거 아니라면.”

쪼그려 앉아 있던 성건우는 아무 반박도 하지 않고, 스피커를 끄고 배낭에 집어넣었다.

주위는 다시 극도로 고요해졌다. 높은 곳엔 세차게 부는 바람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계단으로 향하는데, 백새벽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야에 다시 끝없이 펼쳐진 도시가 들어왔다.

그러나 빽빽하게 세워진 빌딩들은 어둠에 잠긴 채 소리를 잃었다. 밤하늘을 그토록 황홀하게 물들이던 빛들도 꿈처럼 사라져버렸다.

“팀장님, 꼭 묘비 같지 않아요?”

백새벽이 시선을 거두며 부드럽게 물었다.

장목화도 고개를 돌렸다가, 잠시간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래, 저 빌딩들 꼭 구세계의 묘비 같아. 하나하나 세워진 묘비⋯⋯.”

“묘비가 뭡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성건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반고 바이오 내부에 무덤 같은 것은 없었다. 직원들이 죽으면 배정받은 벽에 글만 한 줄 남겨질 뿐이었다.

“묘비는⋯⋯.”

잠시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됐다, 나중에 설명해줄게.”

먼저 계단으로 들어간 그녀가 손전등을 켰다.

* * *

지금은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야 했다. 다행히 구조팀원들은 체력이 꽤 훌륭한 편이었고, 심지어 이중 세 명은 유전자 개량자였다.

덕분에 805호로 돌아와서도 다들 숨만 살짝 헐떡일 뿐 지친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성건우와 장목화는 흩어져 방을 한 번 더 수색했다. 누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그 어떤 위험한 생물도 난입하지 않았다.

장목화는 손전등을 쥐고 다시 거실로 갔다.

“새벽아, 이제 여홍이랑 좀 쉬어. 내가 지프와 장갑차 감시를 맡고, 건우가 바깥 거리를 살필 거야.”

“네.”

백새벽은 식당 창문 앞으로 다가가는 팀장을 눈으로 쫓다가, 장목화가 제 위치로 섰을 때야 오렌지 소총을 내려놓았다. 그 후, 잠시 좀 머뭇거리는가 싶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방금 폭발이 일어난 곳……. 차으뜸이 말한 그 실험실 같았어요.”

장목화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빌딩 아래만 주시하며 호응했다.

“방향과 위치로 보면 분명 그렇겠지. 차으뜸의 임무가 그곳을 파괴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기계 승려랑 싸우다가 뜻하지 않게 대폭발을 일으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건우도 조금 전 화염과 연기가 일어난 곳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제 생각에는 전자일 가능성이 클 것 같습니다.”

“제8 연구원 이두형이 말한 것 때문에?”

장목화가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성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전 아래로 지나치는 차량 숫자를 세어봤어요. 홀수였습니다.”

장목화는 침을 한번 뱉으며 중얼거렸다.

“⋯⋯너랑 나누는 대화에 이렇게 진지하게 임하는 게 아니었는데.”

한편, 용여홍은 옥상을 떠나온 이래로 여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창밖으로 다시 어둠에 잠긴 도시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그가 약간 공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팀장님, 이제야 팀장님이 왜 구세계 파괴 원인을 조사하려 하는 건지, 왜 폐허 도시에서 과거 역사 발굴하는 걸 좋아하는 건지 알 것 같아요⋯⋯.”

그의 말을 가만히 듣던 장목화가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알았으니 다행이네.”

용여홍은 무슨 말인가 더 하고 싶었지만 더는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수많은 위험이 숨겨진 도시를 내려다보다 화제를 전환했다.

“앞으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장목화 역시 지프와 장갑차를 주시하며 답했다.

“누가 알겠어? 모든 변화가 우리에게 여파를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또 차으뜸이 정법 때문에 이 도시 밖으로 내쫓겼거나 서로 극한으로 몰아서 중상 정도는 입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날이 밝고 우리가 이곳을 벗어날 때까진 부디 안전하기만 바라야지.”

“팀장님, 뭔가 좀 불길하게 들리네요.”

성건우의 대꾸에, 장목화는 짜증이 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우린 진짜 내내 운이 없었잖아. 물극필반(*物極必反: 달도 차면 기운다)이라고, 이제는 운이 좀 좋아질 때도 됐어.”

운이 없었다는 말에 약간 뜨끔한 용여홍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장목화의 말은 정말로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이후로 몇 시간 동안 도시 곳곳에서 수시로 폭발음과 총성, 비명이 들리긴 했지만, 터널 방향까지 확산이 되진 않았다.

그렇게 심야가 되었을 무렵, 이곳은 완전히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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