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87화 (87/649)

87화. 경고

장갑차는 계속 전진했다. 길 양옆엔 여전히 가로등 불빛이 비치고, 빌딩의 유리창으로 흘러나오는 빛도 변함이 없었다.

이 빛의 향연 속에서, 장갑차는 터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동하는 도중엔, 멍하니 차를 고치는 남자, 빈 프라이팬을 재차 뒤집개로 뒤적이는 여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왔다 갔다 하는 어린아이를 포함해 각자 일에 몰두하고 있는 무심자들을 볼 수 있었다.

숫자는 그다지 많진 않지만, 노랗고 하얀 등불 아래 비친 그들의 모습은 꼭 구세계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전경이 되어있었다.

이윽고 장갑차는 또 한 대의 거대한 차를 지나쳤다. 그 차량은 또 상당한 폐차를 길가로 떠밀어내고 있었다.

이를 보고, 장목화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길 중앙이 왜 비어있나 했네.”

뒤이어, 한동안 길을 바라보고 있던 백새벽이 말을 받았다.

“처음에는 많지 않았을 거예요. 최초의 무심자들도 현재의 무심자 같았다면 직접 자신의 차를 몰아 더 적합한 곳에 세웠을 테니까요.”

장갑차는 곧 그들이 출발했던 그 거리에 이르렀다.

[족욕] [슈퍼마켓] [바비큐] [훠궈] [경찰]…….

빛을 되찾자, 길가의 간판들이 더 환하게 드러났다.

주거 구역의 대문이라고 할 수 있는 황갈색 패방(牌坊)도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남아있는 글자 ‘양’, ‘원’은 전보다 훨씬 더 존엄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쪽에 자리한 일고여덟 채의 빌딩들도 유리창을 통해 서로 다른 빛을 발산하며 이곳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익숙한 구역으로 돌아와 이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구조팀은 순간 따뜻하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들어가자.”

장목화가 제일 먼저 느릿하게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성건우 역시 눈길을 돌려 대문 안쪽으로 장갑차를 몰았다. 길 대부분이 협소해서, 장갑차는 일단 지프 근처 아무 곳에나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은 이 안에서 지내나요?”

용여홍도 이젠 장갑차에 상당한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의 물음에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다른 곳이라면 장갑차 안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을 거야. 근데 폐허가 된 이곳엔 고등 무심자도 많고, 강력한 변이 생물도 있어. 그들의 능력은 하나같이 다 엄청나게 위협적이지.

자칫 잘못했다간 그 영향에 휩쓸릴 수 있으니, 단순히 불침번을 서는 것만으론 그 모든 위험에 대비할 수가 없어.

또 이 장갑차는 너무 눈에 띄어서 사냥꾼들의 목표가 되기도 쉬워. 그들에게 발각된 순간 장갑차는 우리를 보호하기는커녕 우릴 가두는 철창이 될 거야.”

용여홍은 순간 소름이 쭈뼛 돋아 황급히 질문했다.

“그럼 어쩌죠?”

장목화는 전에 들어간 적 있던 빌딩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서 무심자가 없는 방에 숨자. 불침번을 서는 동안 한 사람은 지프와 장갑차를 감시하고, 어떤 생명체가 접근하면 곧장 사격하는 거야. 간단히 말해서 지프와 장갑차를 미끼로 삼는 거지.”

용여홍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팀장을 칭찬하려다 별로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친구 성건우가 참 친절하게도 용여홍을 도와주었다.

“팀장님, 여홍이 좀 보세요. 팀장님더러 음흉하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얼굴인데요.”

“아, 아니야!”

용여홍이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장목화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소리 내 웃기만 했다.

“멍청한 것보다는 음험한 게 낫지. 어쨌든 내 총명함과 지혜로움을 칭찬하려던 거잖아, 안 그래?”

구조팀은 곧 장갑차에서 하차했다. 이후, 지프차 트렁크에서 통조림 여러 개, 압축 비스킷, 에너지 바 등을 꺼내 각자의 배낭에 나눠 담았다.

덕분에 정말로 강력한 적을 만나더라도, 차 트렁크에 담긴 식량을 모조리 빼앗기거나 하는 일에 대한 걱정은 접을 수 있었다.

* * *

일행은 주위 상황을 점검하다 빌딩 첫 번째 라인으로 들어갔다.

밝은 빛 아래, 단박에 또 다른 무심자가 보였다.

장년으로 보이는 이 무심자는 어수선하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기름진 머리카락도 몹시 헝클어져 있었지만, 어깨에 닿을 만큼 길진 않았다.

이때 막 실버블랙 색 엘리베이터의 대문을 연 그가 공구를 챙긴 뒤 안전 로프를 움켜쥐었다. 그러다 고개를 든 무심자는 혼탁한 눈으로 네 사람을 바라보더니 다시 얌전히 시선을 거두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르고, 용여홍이 먼저 운을 뗐다.

“저 무심자는 지금 엘리베이터를 정비하는 걸까요?”

“응, 아마 그럴 거야.”

장목화가 답했다.

이때, 성건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전에 불침번 설 때 저자를 봤었습니다. 제 쪽으로 오는 걸 보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꼭 야수 같았습니다.”

성건우의 말을 듣고, 장목화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백새벽과 용여홍 역시도 약간 무거워진 마음에 호응을 잊어버렸다.

잠시 후, 장목화가 물었다.

“몇 층으로 가지? 이 엘리베이터 두 대는 사용할 수 있을 텐데.”

그녀의 시선은 액정 화면 파란 바탕의 흰 글씨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2대는 화면 숫자가 정상적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6층? 예전 그 방은 자세히 살펴보기도 했으니 가장 안전한 겁니다.”

백새벽의 말에,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웃었다.

“좋아. 차으뜸이 돌아온다 해도 우리가 거기 남아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거야. 우리를 보고 화들짝 놀란 틈을 타 공격하기도 좋겠어.”

장목화는 곧 앞으로 몇 발짝 옮긴 다음, 아이스모스 권총을 쥔 손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아주 오래돼 케케묵은 냄새가 풍겨왔다.

장목화는 먼저 안을 한번 자세히 살핀 후, 먼저 탑승했다.

“문제없어.”

팀원들까지 다 탑승하니,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도 안정적으로 상행했다.

* * *

구조팀은 복도를 지나 605호 앞에 이르렀다.

방에선 하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이곳을 떠날 당시, 이들은 605호의 문을 잠그지 않고 그저 살짝 닫아놓기만 한 상태라 문틈 새로 방안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건우가 문을 열려는데, 갑자기 장목화가 손을 뻗어 가로막았다.

“안에 사람이 있어.”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몇 명입니까?”

성건우는 마치 손님 인원을 묻는 듯 덤덤한 얼굴이었다.

반면, 용여홍은 곧장 총구를 쳐들며 사격 준비를 했다.

장목화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성건우를 힐긋 바라보았다.

“한 명.”

백새벽은 얼른 분석에 나섰다.

“차으뜸이 우리보다 앞서 도착했을 리는 없어요. 힘이 있는 자들은 다들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로 몰려갔을 테고, 힘이 없는 자들은 섣불리 단독 행동을 하진 않을 거예요.

동료가 전부 죽어서 홀로 피할 곳을 찾아 들어온 유적 사냥꾼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공교롭겠죠? 이 드넓은 도시에 집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우리가 전에 묵던 그 방을 딱 골라 들어올 수 있겠어요?

아니면 이 방의 원래 주인인 무심자일 수도 있어요. 불빛이 켜지자 본능에 따라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거죠.”

“맞아.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전자일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해. 하지만 우리도 여태까지 수많은 우연을 경험하다 결국 이곳에 이르렀잖아? 사람은 말이야, 괜한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 조금 더 조심하는 게 나아.”

사실 장목화는 요즘 우리가 워낙 불운하다고 말하려다, 혹시 또 용여홍을 자극할까 봐 표현을 달리했다.

그녀는 다시 다른 방을 찾자고 지시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성건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전 들어가서 한번 보고 싶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음⋯⋯. 그래. 나도 원래 방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네. 조심하자.”

성건우는 고개를 끄덕인 후, 돌격 소총을 들고 조심히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일행이 떠날 당시와 거의 똑같았다. 다만 빛을 되찾았다는 점이 좀 다를 뿐이었다. 빛을 받은 흰 타일과 갈색 바닥은 쉽게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따뜻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안으로 어느 정도 진입한 성건우는 장목화의 도움 없이도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감지했다. 상대는 복도 안쪽 오른편에 붙은 작은 침실에 있었다.

더 천천히 걸어가니, 열린 침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주황빛이 보였다.

방엔 그리 넓지 않은 침대 위에 한 여자가 누워있었다. 침대에는 금빛 별이 박힌 파란 시트가 깔려 있었으며, 여자는 더럽고 쭈글쭈글한 이불을 끌어다 몸 절반 정도를 덮고 있었다. 아마도 파란 시트와 짝을 맞춘 이불인 듯했다.

여자의 몸은 살짝 굽었고, 얼굴은 비쩍 마른데다 피부도 말린 오렌지 껍질처럼 주름져 있았디. 그리고 헝클어진 긴 머리는 다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녀를 보고, 성건우는 이전에 그 침실 베개 근처에서 찾아낸 흰 머리카락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게 되었다. 동시에 저 여자가 불침번을 섰을 때 본 무심자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여자 무심자는 손에 뭔가를 들고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분홍빛과 함께 약간 흰빛이 도는 소매가 드러났다. 딱히 그녀에게 어울리는 옷은 아니었다.

무심자도 성건우의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힐긋 시선을 옮겼다. 성건우를 보는가 싶던 무심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책자에 집중했다.

그녀를 한동안 응시하던 성건우는 돌격 소총을 들고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뒤쪽에 있던 장목화는 경고하려 했지만, 성건우는 천천히 자세를 낮춰 침대 가에 쪼그려 앉아 무심자가 들고 있는 물건을 살펴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는 성건우의 뒤를 따라가 무심자의 정수리 너머로 그 책자를 살펴보았다. 장목화도 나름의 경험과 식견을 가진 사람이기에, 단박에 그것이 사진첩임을 알아차렸다.

사진첩은 한 장, 한 장 다 투명한 비닐로 되어있었으며, 그 비닐 안엔 컬러 사진이 여러 장 끼워져 있었다.

장목화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한 여자아이였다. 털이 보송보송한 옷을 입은, 상당히 귀여운 아이였다.

아이는 젊은 여자에게 안겨 엉엉 울고 있었다. 반면에 단정하고 우아하게 생긴 여자는 아이를 안은 채로 활짝 웃고 있었다.

이윽고 무심자가 다음 장을 넘겼다. 흰 부분이 살짝 누렇게 바랜 사진 뒷면엔 누군가 써둔 듯한 검은 글씨가 남아있었다.

「난이 1살 때.」

장목화는 생각에 잠겨 살짝 눈이 가늘어졌다.

그 후로도 무심자는 차례로 사진첩을 한 장, 한 장씩 넘겼다.

사진 속 여자아이는 점점 자라났다. 때로는 한 남자의 어깨에 올라타 있기도 했고, 때로는 이 사진첩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여자와 남자에게 안겨 있기도 했다. 또 어떤 장에선 꼬리가 달린 녹색 괴물 복장을, 또 다른 장에선 분홍색 옷을 입고 있기도 했다. 분홍 옷을 입으니 뽀얀 피부가 더 돋보이는 듯했다.

이 사진들 뒷면에도 각각 검은 글씨가 남아있었다.

「난이 2살 때.」

「난이 3살 때.」

「난이 4살 때.」

「난이 7살 때.」

7살 때를 마지막으로, 사진첩도 끝이 났다.

모든 사진을 확인한 뒤, 장목화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야로 무심자의 모습이 담겼다. 몸도 굽은데다 비쩍 마른 얼굴에 세월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었다.

장목화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성건우를 향해 조그맣게 속삭였다.

“우리 방해하지 말자.”

성건우도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일어나 거실로 돌아갔다.

장목화가 눈가를 살짝 훔쳐내며 밖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다른 방을 찾는 게 좋겠어.”

백새벽과 용여홍도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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