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밝혀진 도시 (2)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 뒤쪽 정원.
장목화는 이두형의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당장 떠나자.”
그녀는 다시 이두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이두형도 웃으며 화답했다.
“조심하세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만날 그때는 거래할 수 있는 중요 정보나 소식이 충분했으면 좋겠네요.”
뒤이어 그가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본인의 각성자 능력을 높이려 노력하는 건 딱히 좋은 일만은 아니에요. 그로 인해 치루는 대가는 영원히 메꿀 수 없으니까요. 잘 고민해 보세요.”
성건우가 답을 하기도 전, 이두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히고 떠나갔다. 그는 나무 그늘을 타고 수종이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가자.”
장목화의 말에, 성건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그는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들고 이전의 전술 대형으로 대열 맨 끝에서 가볍게 뛰었다.
구조팀이 옆쪽 울타리에 이르렀을 때, 대열 좌측에 있던 용여홍이 빠르게 울타리 바깥을 훑다가 혼탁하고 충혈된 눈을 마주쳤다.
무심자였다.
용여홍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돌격 소총을 든 채 옆으로 살짝 피했다.
울타리 바깥 거리엔 금속 장대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 장대 끝마다 등불이 있어, 주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용여홍이 알기로 저 장대는 구세계의 가로등이었다. 지금은 적어도 가로등의 반 이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발견한 무심자는 바로 그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전방으로 비스듬히 떨어진 곳에 자리한 가로등 아래였다.
쪼글쪼글하게 마른 파란 솜옷을 입고, 같은 색 플로피 햇을 쓴 그는 빗자루 하나와 철제 쓰레받기 하나를 쥐고 있었다. 얼굴엔 주름이 꽤 많았으며, 피부는 상당히 거칠었다.
지성의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눈에선 공격 의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멍하게 팀원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좀 의아해진 용여홍은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가락을 거뒀다. 그러자 맞은편 무심자도 빠르게 고개를 숙인 후, 거리에 쌓인 낙엽을 쓸기 시작했다. 구조팀원들도 그의 모습을 통해 상황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다.
“일단 나가자.”
금세 정신을 차린 장목화가 재빨리 금속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용여홍과 백새벽, 성건우도 차례로 서로를 엄호하며 바깥 거리로 나갔다.
구조팀은 드디어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를 벗어났다.
“낙엽을 쓸고 있어요⋯⋯.”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아무런 공격성도 없어 보이는 무심자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에 장목화가 맞은편을 내다보며 말했다.
“저쪽 봐봐.”
그녀의 턱짓을 따라 고개를 돌린 팀원들은 한 고층 빌딩을 보았다. 위로 시원하게 쭉 뻗어 있는 드높은 건물이었다.
1층에 자리한 상점들을 시작으로, 각층 유리창에선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용여홍은 주위로 뭔가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는 듯한 그 빛에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중 비교적 낮은 층 창문 뒤쪽으로 뭔가 움직이는 인영들이 보였다. 더러는 아이를 안은 채 창가를 서성거리고, 더러는 걸레를 든 채 유리창을 깨끗하게 닦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창가 소파에 앉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쥔 채, 맞은편 벽에 걸린 액정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기도 했다.
힘겹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모두 낡은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다들 동작도 뻣뻣한 데다 눈빛이 멍했다.
특별히 확인할 것도 없이 저들은 다 무심자들이었다.
무심자들이 보는 액정 화면은 화려했다. 멋진 풍경과 인물, 글자, 틀이 떠 있긴 해도 전체적인 화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도 무심자들은 그 화면에 매우 집중하고 있었다.
이를 몇 초간 가만히 보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좀 복잡한 심경이 어린 듯한 목소리였다.
“이 도시를 정기적으로 깔끔하게 유지하고 있던 건, 이 무심자들이었어. 저들은 불이 밝혀질 때마다 일반인처럼 변하는 거야.”
장목화의 말을 듣고 용여홍은 뭔가를 깨달은 듯하면서도, 꿈속에 빠진 것처럼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그래도 지금 저기 열심히 낙엽을 쓸고, 창문을 닦는 무심자들과 평소 무심자의 표상이 잘 섞여들진 않았다.
구조팀은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로 오는 동안 이 폐허의 무심자들과 맞닥뜨렸다. 그들은 바깥 동족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흉악하고 비이성적이며, 공격성과 사냥본능으로 충만했다. 방금 막 야수 상태에서 벗어난 인류 단계로 퇴화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만약 그때 누군가 용여홍에게 여기 무심자들은 청소도 하고, 창문도 닦고, 회로도 연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면, 그냥 코웃음만 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정말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 먼 곳까지 자리한 가로등은 환히 밝혀져 있으며, 그 빛 아래로 여러 인영이 보였다.
도시가 새로이 밝혀진 이후, 수많은 무심자들이 거리와 창가로 나와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흉악해 보이지도 않았고, 구조팀을 사냥감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정해진 규율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수행하며, 폐허가 된 도시를 다시 영화롭게 밝히려 노력할 뿐이었다.
이 순간, 용여홍은 그들과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들과 함께 공존은 해도, 같이 어우러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데, 장목화의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꼭 과거 구세계로부터 투영된 실루엣 같아.”
성건우도 불쑥 물었다.
“저들은 왜 바닥을 쓸고, 창문을 닦고, 외벽이랑 거리를 보수하는 거지?”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답했다.
“본능 같은 거겠지. 구세계에서 했던 일들이 무심자로 변한 지금도 본능으로 남은 거야.”
용여홍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완전히 끊어졌다. 그도 잘못된 추측이라고 생각했다. 구세계가 파괴된 지는 벌써 70년이 다 돼가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무심자들이 몇 대를 이어온 무심자인지는 몰라도, 당시 이곳에서 생활했던 이들이 저 무심자들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다시 용여홍이 입을 열었다.
“그런 본능은 부모님의 본보기랑 지도가 있었던 거지. 계속 대를 이어서……. 그렇게 수리공 후손은 여전히 설비를 수리하고, 청소부 후손은 여전히 거리를 청소하는 거지⋯⋯.”
피식 웃던 장목화가 성건우보다 앞서 대꾸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전부 유전자 탓으로 돌리면 안 되지. 정말 그랬다면 육체가 다 붕괴됐을 걸. 대대로 지도를 했을 수도 있지만, 학습으로 전할 수 있는 건 간단하고 중복적인 일들 뿐이야.”
사방을 경계하던 백새벽도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말했다.
“초대 무심자로부터 몇 대를 이어온 무심자들이면 복잡한 일이라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지, 현재 무심자들은 가능할지 몰라도 선대 무심자들이 배울 수 없었을 테니, 관련 기술은 중간에서 이미 소실됐겠네요.”
“누군가 그들을 지도하며 몇몇 본능을 주입한 것일 수도 있지.”
성건우도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추측을 밝혔다.
구조팀은 동시에 누군가를 떠올렸다. 전에 만난 그 기묘한 아이, 수종이었다. 장목화와 백새벽, 용여홍도 성건우의 말을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 * *
이야기를 나누며 네 사람은 거리 맞은편으로 몇 걸음 이동했다. 창문 안쪽에 자리한 인영들 하나하나를 조금 더 제대로 살피기 위함이었다.
몇 초 후, 용여홍이 저 멀리 거리를 청소하고, 나뭇가지를 치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무심자들을 바라보다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바로 구세계의 모습이었을까요? 당시 사람들도 이렇게 생활하고 일했을까요? 당시엔 밤에도 별들이 땅으로 내려온 듯, 대낮처럼 밝았을까요?”
그 말에 장목화는 한 번 더 고개 들어 맞은편 빌딩을 바라보았다.
빌딩 창문에서 노랗고 흰빛들이 새어 나왔다. 층마다 거의 3분의 1이 넘는 곳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 안에서 다양한 인영들이 곳곳을 오가고, 창문을 닦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아이를 달래고, 도마에 칼질을 하고 있었다. 소리를 들을 순 없어도, 생생한 활기가 느껴지는 전경이었다.
이 순간, 장목화는 꼭 세상이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구세계가 파괴되지 않았을 그 시절, 평범한 일상의 향취를 엿보고 온 느낌이었다.
끊임없이 위로 시선을 올리던 그때, 홀연 장목화의 눈이 커졌다.
멀지 않은 빌딩 꼭대기에 붉은 점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저격 소총의 불빛 같았다.
“전방으로 피해!”
장목화가 크게 외치며, 몇 번이나 굴러가 열린 가게 안으로 피신했다.
탕!
동시에 방금까지 그녀가 서 있던 곳에서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총알이 그 단단했던 지면의 돌을 파괴한 것이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팀장의 명령을 굳게 신뢰하던 팀원들은 각기 다른 동작과 자세로 피신했다. 다들 민첩하게 움직여,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 옆문 맞은편 거리에 붙은 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탕! 탕!
뒤이어 각기 다른 빌딩에서 날아든 총알 두 개가 다시 땅에 박혔다.
* * *
장목화는 가게 벽에 바짝 기대서서 무전기를 꺼냈다. 계속 숨을 헐떡이고 있지만, 호흡을 가다듬을 여유는 없었다. 그녀가 서둘러 버튼을 눌렀다.
“주변 빌딩 중에 적어도 세 곳에는 저격수가 있어. 이상 현상 근원에 진입하지 않고 주위에 매복한 방식을 보면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야, 하이에나!”
이는 하이에나 강도단의 가장 전형적인 행동 방식이었다. 물론 오직 그들만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직 가운데, 적어도 저격 소총 세 대를 가진 조직을 꼽자면 그중 가장 유명한 조직이 바로 하이에나였다.
아무래도 저격수는 그들일 가능성이 컸다.
- 너무 비겁하지 않습니까?
무전기 속, 용여홍의 원망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이에나는 이상 현상에 대해 알아보고 싶진 않지만, 더 가치 있는 물건을 손에 넣고 싶어서 이곳을 철수하려는 유적 사냥꾼만 노릴 생각인 것 같았다.
이내 장목화가 웃으며 대꾸했다.
“야, 그 사람들은 강도단이야. 다행히 그 사람들도 도시가 갑자기 밝아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네. 밖으로 나온 우리를 곧장 공격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일 거야.”
- 근데 우리도 폐허의 변화에 영향을 받았잖아요.
무전기 너머에서 백새벽이 말했다.
- 20층이 넘는 건물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느라 숨이 차서 헐떡이고 있는 와중에 우리가 나온 건지도 모르지. 게다가 이제 전력이 회복됐으니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도 있어. 하……. 안타깝네.
성건우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용여홍이 약속이나 한 듯 물었다.
- 뭐가?
- 나도 도시 변화에 홀렸던 게 말이야. 그러지 않았다면 저들이 보는 앞에서 훌라춤을 춰줄 수 있었을 텐데.
성건우의 목소리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감정이 묻어있었다.
장목화도 이젠 뭐 더 놀랍지도 않다는 듯,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그래. 나중에 또 그럴 기회가 오기를 바라자고.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하이에나의 매복을 피하느냐는 거야. 아마 저격수말고 다른 조치도 취해놓았을 게 분명해.”
백새벽은 전에 들은 갖가지 정보를 떠올려 냉정히 상황을 예측했다.
- 하이에나에게는 장갑차도 있고, 중형기관총도 있고, 바주카포도 있어요. 저격수를 통해 우리 활동 범위를 통제한 뒤 누군가를 보내 이 구역을 쓸어내려 할 거예요.
- 어떡하지?
용여홍은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포함한 구조팀이 엄청난 위험에 직면했음을 느꼈다.
만약 지금 군용 외골격 장치가 있었다면 전자파 무기 정도는 사용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은 군용 외골격 장치를 잃었다. 그 때문에 유한한 범위 안에서 중형기관총 소사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또한 유탄발사기나 소총, 수류탄으로는 두꺼운 장갑을 깨부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