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밝혀진 도시 (2)
사진 속 볼이 통통한 남자아이는 괴수 복장 차림을 하고 있어 퍽 귀여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조팀과 함께했던 수종이었다.
수종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용여홍은 머리가 저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두형이 사람을 찾으러 이 폐허 도시로 왔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찾는 사람은 그 괴이한 남자아이 수종이었다.
장목화 역시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다가 고개를 틀어 방금까지 있던 곳을 가리켰다.
“지하 기계실 부근에서 만났어요. 함께 게임을 하고 싶다면서 저희를 따라 나오기도 했죠. 근데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오줌이 마렵다는 핑계를 대면서 사라져버렸어요.”
이두형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군요.”
방금까지 있었던 곳을 쳐다보던 성건우는 다시 이두형을 바라보았다.
“근데 수종이는 왜 찾으시는 거죠?”
이두형은 피식 웃었다.
“여러 중요한 정보가 연루된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그만한 값을 치를 수 없을 거예요. 나중에 또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그리고 여러분들이 또 중요한 정보나 단서를 갖고 계신다면 그때 거래하도록 하죠.”
이내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물었다.
“건우야, 너 더 묻고 싶은 거 있어?”
하지만 성건우보다 이두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심령의 복도에 관한 일은 정말로 그곳에 진입하고 난 뒤에나 이야기하시죠. 지금으로서는 말을 해도 모를 테니.”
성건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화제를 전환했다.
“혹시 제8 연구원이라는 곳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이두형이 약간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곳의 특파원을 만났습니까?”
구조팀 전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두형은 잠시 생각 끝에 운을 뗐다.
“제8 연구원은 매우 미스터리한 조직입니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다른 세력과 접촉하지도 않고, 이따금 밀수 상인을 통해 특수한 물품들을 손에 넣을 뿐이죠. 하지만 그 특파원은 애쉬랜드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임무를 진행 중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그리고 이두형이 재차 또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모든 이들은 그 조직이 구세계에서부터 남아 유지되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더러는 그들이 각종 자료를 수집해서 신세계를 건립하려 한다고 여기고, 더러는 그들이 단서를 없애 구세계 파괴의 진정한 원인을 계속 매장하려 한다고 여기죠. 제가 아는 건 이 정도입니다.”
말이 끝나고, 성건우가 불쑥 물었다.
“매혹 능력은 어느 달지기 영역에 속해있습니까?”
“당신 사고 흐름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군요.”
가벼운 농담을 던진 이두형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5월을 관장하는 달지기, 감찰자일 겁니다.”
이후, 이두형은 다른 이들이 행여 끼어들기 전에 덧붙였다.
“이젠 제가 물을 차례죠?”
장목화와 성건우 모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은 어느 대형 세력 출신입니까?”
이두형의 말투엔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반고 바이오입니다.”
장목화도 솔직하게 답했다.
“반고 바이오⋯⋯. 전 빙원에서 반고 바이오 프로젝트팀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쪽에서 지원자를 모집해 추운 환경이 인간의 육신과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한 실험을 진행했거든요. 결국 피실험자들은 얼어 죽었습니다. 쯧쯧, 정말 끔찍했어요.”
장목화는 민망함에 순간 진땀이 났다.
“……예, 뭐 그래도 배불리 먹기는 했겠죠.”
“그렇긴 합니다.”
이두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계속 질문을 이어나가려던 그때, 갑자기 주위 건물들이 한층, 한층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 폐허 도시에 존재하는 건물 반 이상이 동시에 각기 다른 정도의 빛을 발하며 유리창을 속속들이 밝혔다. 도시를 뒤덮은 어둠은 빠르게 폐허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온 도시의 전력이 회복된 것이다.
다들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눈앞의 전경이 다 환상 같았다. 꼭 땅으로 내려온 은하수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팀장 장목화도 완전히 멍해진 얼굴이었다. 처음으로 진정한 하늘과 태양을 마주했을 때와 같은 충격이 다가왔다.
그렇게 몇 초간 야경을 감상하다가, 이두형이 몸을 일으켰다.
“이상 현상이 사라졌습니다. 이쪽 담을 넘어 도망치시면 됩니다.”
* * *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 17층.
차으뜸은 엘리베이터 로비로 돌아갔다. 여전히 그는 외골격 장치와 은색 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이내 앞서 16층에 세워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데, 순간 층수 표시기 숫자가 16에서 17로 바뀌었다.
이는 곧 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탑승객은 아군이 아닌 적일 확률이 99.9%였다.
차으뜸은 망설임 없이 행동을 개시했다. 고글로 가려진 그의 금색 눈동자엔 보일 듯 말 듯, 파문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차으뜸의 시야로 주위에 자리한 수많은 인영이 들어왔다.
허상의 인영들은 엘리베이터 로비 화분에서 솟구쳐 올라, 누렇게 뜬 잎과 시들어 오그라든 가지와 말라버린 흙을 미친 듯이 씹어댔다.
차으뜸은 생리적인 배고픔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상황에 감염이라도 된 듯 잔뜩 굶주린 것 같다는, 뭔가를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욕구가 그를 집어삼키며 그 외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게 했다.
아귀도였다.
곧이어 차으뜸은 검은색 금속 외골격에 뒤덮인 두 팔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육포 한 봉지를 꺼냈다. 그러곤 힘주어 뜯자마자 검고 마른 소고기를 걸신들린 듯 입에 털어 넣었다.
하지만 돌처럼 딱딱한 육포는 침에 녹지도 않고, 이로 잘 씹히지도 않아 삼키려야 삼킬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고집부린다면 그는 목이 막혀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차으뜸도 순간, 정말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아마 연구원 중에서 가장 우스운 이유로 죽어버린 특파원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과 굶주림이 뒤엉키고, 차으뜸은 이걸 씹어 삼키면 안 된단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이 딱딱한 육포를 씹는 걸 멈추지 못했다.
바로 그때, 옆쪽에 있던 실버 블랙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남루한 승복에 붉은 가사를 걸친 검은 로봇 하나가 튀어나왔다. 로봇 승려 정법이었다.
그 검은 얼굴에 달린 로봇 눈에선, 온 세상을 다 피로 물들일 듯한 붉은빛이 밝게 번득이고 있었다.
정법은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차으뜸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성큼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두 손을 들었으나 유탄발사기와 레이저 무기를 사용하는 대신, 말 그대로 철갑 주먹을 이용해 차으뜸을 때려눕히려 했다.
차으뜸은 육포를 끊임없이 씹어 삼키면서도, 억지로 몸을 웅크려 옆쪽으로 몸을 굴렸다. 그렇게 가까스로 정법의 주먹을 피했지만, 차으뜸은 여전히 먹을 것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는 다시 오른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번에 꺼낸 건 에너지 바와 포커 카드 한 뭉치였다.
차으뜸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육포를 꿀꺽 삼켜버렸다. 그래도 지독한 허기는 가시질 않았다.
그때, 차으뜸은 다시 빠르게 방향을 틀어 자신 쪽으로 달려드는 붉은 눈을 발견했다. 그는 남은 힘을 쥐어짜 포커 카드를 바닥에 뿌린 후, 한 번 더 굴러 비상 통로 입구에 이르렀다.
“카드⋯⋯ 게임이나⋯⋯ 해⋯⋯.”
차으뜸은 육포와 에너지 바를 씹느라 다소 좀 웅얼거리며 말했다.
그에게 막 달려들려던 정법은 순간 그대로 멈춰 섰다. 이후 고개를 반 바퀴 돌려 바닥에 떨어진 포커 카드를 보던 그가 붉은 눈을 번득였다. 정법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다가가 허리 굽혀 카드를 한 장씩 집어 들었다.
이 순간, 정법에게 카드 게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어 보였다. 설혹 동료에게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라도, 위험이 지척인 상황이라 해도 일단 카드 게임부터 한 판 하려는 작정인 것 같았다.
그렇게 정법이 흩어진 카드들을 모으는 사이, 차으뜸은 일순 달라진 변화를 느꼈다. 굶주림이 씻은 듯 사라지고,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목만 약간 막힐 뿐이었다.
갈망의 여파는 상당했다. 여태까지 차으뜸은 절박한 굶주림과 우습게 죽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눈이 거의 뒤집혔던데다 눈물에 콧물로 얼굴이 젖어있었다.
차으뜸 역시 딱히 거울 같은 건 보지 않아도, 금속 헬멧 아래 가려진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처참할지 눈에 선했다.
이에 극도로 분노한 그가 팔을 들어 올렸다. 유탄발사기와 전자파 무기로 정법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어느새 돌아선 정법이 독특하고 냉랭한 전자 합성음 소리를 냈다.
“같이 하시지요---.”
정법은 너무 큰 대가를 치르며 정신이 심하게 왜곡됐다. 이로 인해 홀로 카드 게임에 집중하기보단 두 취향을 한데 합쳐 차으뜸을 끌어들이려 했다.
기계 승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차으뜸은 또 한 번 셀 수 없이 많은 흐릿한 인영들을 보았다. 다시 그 강렬한 굶주림도 찾아왔다.
다행히 그의 입엔 아직 음식물이 남아있어서, 처음처럼 그렇게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로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차으뜸은 빠르게 왼손을 들어 헬멧 고글을 가렸다. 순간 극도로 절망스러워져서, 심한 굶주림을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뭘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내 목이 꽉 막힌 듯한 느낌에서 벗어난 그가 왼손을 내렸다. 그의 시야로 포커 카드를 쥐고 다가오고 있는 기계 승려가 들어왔다.
절망감엔 전염성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이젠 정법도 이해할 수 없는 절망에 잠식됐다. 그는 갑자기 세상 모든 게 공허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만사는 다 아무 의미가 없고, 만물은 그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 순간, 정법은 뭔가를 깨달은 듯 바닥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기계 승려는 두 손으로 합장을 하고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건 꿈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 같도다⋯⋯.”
동시에 차으뜸은 갑자기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허리와 복부에 힘을 주고 군용 외골격 장치에 의지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더불어 외골격 장치에서 분출된 한 줄기 흰색 기체가 비상 통로로 그를 밀어주었다.
이윽고 비상 통로에 착지한 차으뜸이 곧 팔을 들어 올려 유탄발사기로 기계 승려를 조준했다.
정법은 큰 깨달음을 얻어,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경문을 읊고 있었다.
차으뜸은 잠시 장전된 유탄을 보다, 이것이 폭발성이 강한 유탄임을 알아챘다.
그 사실에 조금 망설여졌다. 여태껏 그는 고등 무심자와 변이된 생물만 생각하고 있었지, 로봇을 맞닥뜨릴 거라곤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그 때문에 이번 작전에 나서기 전에 특별히 유탄을 교체하진 않았다.
지금 장착된 이런 유탄 한두 발로는 기계 승려를 파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 사로잡힌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만 줄 뿐이었다.
같은 원리로 전자파 무기도 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 유탄을 바꿀 수는 없었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으뜸은 절망에 빠진 이를 더욱 절망하게 할 수도, 계속 그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할 수도 없었다.
기계 승려가 이제 막 절망한 이때, 상대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상황은 더 어려워질 터였다.
몇 초간의 고민 끝에, 차으뜸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그는 포기를 택했다.
차으뜸은 곧장 계단 난간을 붙잡고 몸을 훌쩍 날리더니, 다음 층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그렇게 외골격 장치의 능력으로 한층, 한층 훌쩍 뛰어내리며 17층에서 1층까지 벗어났다.
같은 시각, 정법은 경문을 다 읊었다. 고개를 번쩍 든 순간, 검은 금속으로 된 얼굴에 박힌 눈이 다시 피처럼 붉은빛을 번득였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인간의 신체 구조로는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그대로 비상 통로를 향해 돌진했다.
정법도 차으뜸을 따라 난간을 붙잡은 후, 그 아래층으로 펄쩍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