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선생 노릇 하길 좋아합니다
이어, 주위 환경을 관찰하던 장목화가 짜증스럽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차으뜸에게서 벗어났는데도 왜 아직 일정한 영향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원래 그랬던 것만큼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아. 계속 몇 가지 문제들을 빼놓고 생각하고 있잖아.”
그때, 수종이 엘리베이터 로비로 들어섰다. 그는 실망 가득한 얼굴로 장목화를 올려다보았다.
“안 놀아?”
장목화가 창문을 가리켰다.
“다음에. 우리 저쪽으로 가자. 그래야 정문을 향해 오는 사람과 안 부딪혀. 건우 네가 수종이 안고 앞장서, 얼른! 누군가 오고 있어.”
말하는 동시에 유탄발사기를 든 장목화가 바로 정문 쪽을 겨냥했다.
뒤이어, 성건우는 수종을 안고 두어 번 도움닫기 후에 몸을 훌쩍 날려 창문 밖으로 나갔다. 용여홍과 백새벽 역시 차례대로 창문을 넘었다.
이때, 장목화는 노란 승복에 붉은 가사를 걸친 정법을 발견했다.
정법은 여자 목소리에 새빨갛게 빛나는 눈을 번득이며 돌진하는 중이었다.
장목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콰릉!
정문 근처에서 화염이 피어오르더니,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정법이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자, 이 틈을 타 장목화가 재빨리 창문을 넘었다. 그녀는 낮은 허들을 넘듯 아주 가뿐하게 밖으로 나갔다.
1~2초 후, 정문 구역 유리 벽을 깨고 빌딩 안으로 들어온 정법이 절그럭절그럭 소리를 내면서 내달렸다.
열린 창문으로 유탄을 발사하려던 그때, 정법이 돌연 머리를 반 바퀴 돌렸다. 그의 시선은 엘리베이터 여섯 대 중 한 곳으로 향했다.
정법의 눈은 피처럼 붉은빛을 번득였다. 그는 곧 미친 듯이 그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돌진했다.
이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 서자, 안과 바깥쪽 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정법은 양손을 들어 팔에 장착된 모든 무기로 그 안을 겨냥했다. 하지만 안에는 서늘한 금속 벽만 존재할 뿐, 그 어떠한 인영도 없었다.
정법이 흠칫 놀란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다시 위를 향했다.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안, 이곳 천장 위 어두운 공간에 한 사람이 있었다. 엘리베이터 상자에 연결된 강철 와이어 로프 근처, 어렴풋이 군용 외골격 장치가 보였다. 바로 차으뜸이었다.
그는 얌전히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시각, 1층 엘리베이터 로비에선 정법이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그는 뭔가를 깨달았는지 다른 엘리베이터를 잡기 위해 미친 듯 버튼을 눌렀다.
* * *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 뒤쪽 정원.
장목화는 허리를 굽힌 채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닿지 않는 곳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전기 신호에 따라 팀원들을 찾아냈다.
“수종이가 사라졌습니다.”
구석에 기대 반쯤 쪼그려 앉은 성건우가 조용하게 말했다.
“어디로 갔는데?”
장목화가 최대한 목소리를 줄이려 애쓰며 물었다.
“여기 내려놓자마자 오줌마렵다고 수풀로 들어가선 그대로 사라졌어요.”
성건우는 요점만 간추려 설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겠어.”
팀원들도 특별한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다들 장목화의 안내에 따라 측면으로 돌진했다. 울타리를 넘어 우회하기 위함이었다. 나무와 풀 사이를 가로지르며 목표지점은 더 가까워졌다.
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그 황량하고 거친 포효가 들려왔다. 전보다 소리는 훨씬 커져, 꼭 귀 바로 옆에서 포효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팀원들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다시금 거대하고 익숙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공포는 아예 심장마저 움켜쥔 듯, 심장 박동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홀연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닿았다.
“겁먹을 것 없습니다. 진정하세요.”
몸까지 살짝 떨던 구조팀은 이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일순간 이들을 삼킨 두려움이 밀물처럼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소리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울타리 그늘 속에 쪼그려 앉은 누군가가 보였다. 긴 머리, 우아해 보이는 수염, 품이 넉넉한 검은 가운을 걸친 남자는 온화하면서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전에 구조팀도 황야에서 한 번 만난 적 있던 남자였다.
자칭 골동품 학자이자 역사 연구원, 이두형이었다.
이두형은 앞쪽 나무 그늘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단 움직이지 말고, 이상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시죠.”
지금 온 도시엔 포효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장목화는 이두형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팀원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동하기 전에 이미 이두형의 옆으로 몸을 날렸었던 성건우는 매우 자연스럽게 그곳에 쪼그려 앉았다.
용여홍은 꼭 반고 바이오로 돌아간 듯했다. 눈에 익숙한 광경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마다 활동 센터 입구에 이렇게 쪼그려 앉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도 약간 망설이던 장목화 역시 성건우를 따라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해주다니요. 전 그저 여러분을 미리 회복시켰을 뿐입니다. 이상 현상이 가라앉기 전에 아무 공격도 받지 않으면 언젠가는 회복했을 거거든요.”
이두형이 웃으며 대꾸했다.
장목화는 짐짓 무심한 척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구해주신 거죠. 선생님은 이런 두려움에 영향받지 않으시네요.”
그 사이 백새벽과 용여홍도 그늘 속에 쪼그려 앉아, 각자의 무기를 들고 서로 다른 방향을 경계했다.
이두형은 한숨 섞인 장목화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전 대부분을 혼자서 활동하는 골동품 학자고, 역사 연구원입니다. 믿을 구석이 없었다면 어떻게 여태까지 살아남았겠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건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각성자십니까?”
이두형은 성건우를 한번 바라보더니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럼 기원의 바다에 진입한 후에는 뭘 해야 합니까?”
성건우의 질문은 매우 직접적이었다. 현재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고민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이두형은 여전히 웃음을 보였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 어떤 각성자도 다른 사람에게 이런 방면의 지식을 알려주진 않죠. 서로 엄청나게 사이가 좋지 않다면요. 그건 자신이나 친구의 적을 키우는 꼴밖에 안 되니까요.
하하, 근데 전 아주 못된 고질병 하나를 앓고 있어요. 겸손할 줄도 모르고 선생 노릇 하길 좋아하지요.
좋습니다. 제가 간단히 알려드리지요. 기원의 바다에 진입하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여러 섬을 만나게 됩니다. 그 섬에서 또 당신은 다양한 괴물들이랑 악랄한 환경에 맞서 싸워야 하죠. 그건 당신 마음에 잠재된 두려움이나 과거 기억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두형은 처음부터 한번 상세히 설명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을 예로 들어줄게요. 이건 제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라 무조건 옳다고 할 순 없어요.
각성자의 힘은 심령에서, 자신의 의식에서 기인합니다. 소위 뭇별 홀이니, 기원의 바다이니 하는 건 잠재의식을 형상화한 표현일 뿐이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건 본질적으로 마음의 힘을 발굴하고 찾아내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심령의 갖가지 그림자와 싸워 이겨내야만 하죠.”
성건우는 예의 있게 이두형의 설명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모든 각성자가 똑같은 뭇별 홀을 보게 되는 이유는 뭡니까?”
이두형은 얼굴을 약간 구기며 쓰게 웃었다.
“어려운 질문이군요. 저로서는 그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네요. 하지만 몇 가지 추측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
첫째는 비슷한 광경이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인류의 공통된 기억 속에 숨겨져 있다는 가설입니다. 구세계보다 더 오래된 시대, 모든 인류의 선조에게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으리라고 보는 거죠.
둘째는 각성자가 신령의 사도이자 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죠. 13 달지기는 자신의 총아가 자라서 새로운 세계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함께 뭇별 홀 등의 장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추측은 각성자의 능력이 크게 열세 종류로 나뉘어 있고, 각각 서로 다른 달지기 영역에 대응된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지요.
그 때문에 각각의 달지기를 믿는 종교 집단 내 각성자 비율은 다른 집단의 각성자 비율보다 더 높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높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 수에는 여전히 한계가 존재하죠.”
진지하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쩌면 여러 각성자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신의 은혜로 여기면서 자발적으로 각각의 종교 집단에 가입했기에 그런 수치가 나온 건지도 모르죠.”
그녀의 말은 달지기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총애해서, 특별히 그들을 더 많이 각성시킨 것은 아니리라는 뜻이었다.
이두형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조사나 실험을 할 순 없는 일이라 확답을 드리진 못하겠네요. 안타깝습니다. 구세계가 파괴된 지 거의 70년이 다 돼가고, 그 사이 무려 2, 30년 동안 대규모 전란이 이어졌어요. 결국 조사 자체가 불가능해져 버렸죠.
안 그랬으면 저희도 달지기에 대한 신앙의 기원을 조금씩 찾아 나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들의 영역과 권능, 신앙의 전파 과정을 기반으로 특정 각성자들이 의도적으로 덧붙인 내용을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지, 심지어는 구세계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게 바로 저희 역사 연구원들의 임무죠.”
장목화는 그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맞아요. 그건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고요.”
이두형은 이제 이에 관한 이야기는 접고, 본론으로 돌아왔다.
“뭇별 홀에서 기원의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심층적인 발굴과 파악이 필요합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성건우를 한번 바라보며 웃었다.
“당신은 이미 이 과정을 거의 마무리했군요. 그러지 않았더라면 방금과 같은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기원의 바다에 들어가면 마음속 모든 그림자를 해치워야 합니다. 당신에게는 스스로를 찾고, 받아들이고, 포용할 기회가 생길 거예요. 그로 인해 당신의 심령도 보완이 될 거고요.
그건 당신 능력에 일정한 질적 변화도 안겨줄 거예요. 효과의 경계도, 영향 범위도 모두 강화될 거거든요.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당신이 치러야 할 대가도 조금씩 깊어지고, 당신의 문제도 점차 심각해질 겁니다. 왜,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여기까지 말을 잇던 이두형이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모든 각성자는 자신이 치른 대가를 비밀에 부쳐야 합니다. 대가는 그 자체로 약점이라 남들에게 이용당하거나 노려지기 쉽기 때문이죠.
또한 이러한 방면에 밝은 이들은 서로 다른 대가를 통해 당신의 능력을 기초적으로 추측할 수도 있어요. 각성자끼리의 전투에서 자신이 가진 능력의 특징을 남에게 들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성건우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장목화는 그런 성건우를 힐긋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난 네가 손뼉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이때, 이들 주위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해져 있었다. 이두형의 말대로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어있으니 이상 현상을 피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박수보다 감사하다는 인사가 더 진정성 있잖아요.”
성건우의 진지한 설명에, 이두형은 소리 없이 웃었다.
“스스로를 찾고 난 후 기원의 바다를 건너면 심령의 복도에 이르게 되죠. 네, 이 정도면 꽤 많은 이야기를 해드린 것 같은데, 여러분도 제게 어느 정도의 정보는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건우는 대답 대신 장목화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장목화가 이두형을 보고 물었다.
“뭘 알고 싶으신가요?”
이두형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다가 누렇게 바랜 사진을 한 장 꺼냈다.
“혹시 이 아이를 본 적 있습니까? 아이 이름은 수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