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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야여화-77화 (77/649)

77화. 환각 속에서의 대화 (2)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 무렵, 성건우가 고개를 돌려 장목화를 바라봤다.

“팀장⋯⋯.”

“가.”

성건우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 장목화가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러곤 그녀는 무심자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전방의 허공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한테 다른 환각을 만들어줄 수 있나?”

그 사이 총구를 바닥으로 돌린 장목화는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그곳에 떨어져 있던 비수를 멀찍이 차버렸다.

팀원들도 그녀의 뒤를 따랐지만, 어떠한 공격 의사도 내비치지 않았다.

여자 무심자는 좀 멍한 얼굴이었다. 장목화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곳을 떠나기 위해 더 좋은 조건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이후 여자 무심자가 한 번 더 묵직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일행의 눈앞에 갑자기 초록빛 나무들과 버려진 폐차들이 나타났다. 눈 깜짝할 사이 구조팀은 건물 바깥 거리로 이동한 것이다.

장목화는 다시 마음의 변화를 느끼고 진지하게 말했다.

“역시 현실로 돌아오면 자동으로 차으뜸한테 엄청난 매력이 느껴져. 다시 또 그 사람을 쫓아다니고 싶게 만드네.”

그러자 백새벽이 물었다.

“그렇게 반사적인 거면 왜 그 두 무심자에겐 아무 영향도 없던 걸까요? 차으뜸이 그랬잖아요, 가위 말처럼 인간이 아닌 생물도 자길 덮치려 했다고.”

순간 성건우가 강조하듯 말했다.

“그건 내가 한 말인데.”

백새벽은 그제야 자신이 성건우에게 약간 세뇌돼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부리나케 얼른 말을 바꿨다.

“아니, 내 말은 가위 말 같은 생물도 그 사람한테 매혹됐다면, 변이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무심자도 매혹돼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지.”

“아이를 낳는 중이라 모든 감정이 그쪽에만 쏠렸을 수도 있지.”

용여홍이 말했다.

이에 장목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차으뜸의 매혹 능력에도 강력한 제약이 있나 봐. 그러니 여기까지 오는 동안 딱히 악독한 모습이나 적의를 보이지 않았던 거지. 매혹의 효력을 잃게 될까 봐 걱정했던 거야.

더는 시간 낭비하면 안 돼.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현실로 돌아간 후에도 매혹당하지 않을 방법이야. 우린 아직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어.”

장목화는 다른 사람이 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끝맺었다.

“제가 한번 해볼게요.”

성건우가 제일 먼저 나섰다.

“좋아.”

내심 장목화도 각성자 성건우가 뭔가 보여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성건우는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새벽, 나 거울 좀 빌려줘.”

백새벽은 뜬금없는 부탁이 의아하긴 했지만, 항상 갖고 다니는 손바닥만 한 거울 함을 꺼내주었다.

성건우는 뚜껑을 열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이내 그의 눈동자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넌 차으뜸을 좋아해. 수많은 사람이 다 차으뜸을 좋아해. 넌 차으뜸을 가질 수 없어.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순간 성건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 음산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질문에 짧막한 답을 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죽여야지. 내가 가질 수 없는 거라면 다른 사람들도 가질 수 없어.”

성건우의 음성은 살기등등하면서도 단호했다.

“⋯⋯.”

할 말을 잃은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그거면 돼?”

용여홍이 불쑥 물었다.

성건우는 단 하루도 용여홍을 속이거나 놀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에 용여홍도 자연히 그를 약간 두려워하고 있었다.

백새벽도 다른 사람들처럼 좀 멍하게 있다가, 성건우가 내미는 거울을 받아들었다. 동시에 그녀는 성건우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근데 왜 우리한텐 능력을 안 써?”

성건우가 웃었다.

“환각 속에선 나한테만 영향이 있거든. 환각에서 벗어나면 팀장님이랑 너희들한테도 차례대로 능력을 쓸 거야. 그땐 날 막을 수도 없을 거고.”

“하, 관점까지 바뀌었네.”

장목화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이 성건우를 일깨워, 추리 광대 능력에서 벗어나게 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대신 그녀는 오른손을 들고 기억 속 나무 의자가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향해 총을 쐈다.

탕-!

소리와 함께 구조팀은 동시에 환각으로부터 빠져나왔다.

* * *

남자 무심자와 아기는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 방에 딸린 또 다른 출구로, 죽 이어진 핏자국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반면 여자 무심자는 떠나지 않고 그 출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구조팀이 깨어난 걸 확인하고, 다시 한번 허리 굽혀 인사한 뒤 곧장 돌아서 맞은편 복도로 뛰어갔다.

사라진 여자 무심자를 보고, 장목화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회복력이 진짜 강하네⋯⋯.”

종종 장목화가 주목하는 부분은 성건우만큼이나 남달랐다.

이때,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 절 보세요.”

성건우와 장목화의 눈이 마주치자, 성건우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팀장님은 차으뜸을 좋아해요. 수많은 사람이 다 차으뜸을 좋아하죠. 팀장님은 차으뜸을 가질 수 없어요. 그러니까?”

몇 번의 표정 변화를 보이던 장목화가 매섭게 답했다.

“그러니까 난 걔를 때려눕혀서라도 끌고 와야지!”

성건우는 이 말에 동의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똑같은 방식으로 백새벽, 용여홍에게도 차으뜸에 대한 공격 욕구를 부여했을 뿐이었다.

물론 각자 공격 욕구의 원천이 다른 만큼, 발현 형식도 다 달랐다. 한 사람은 강제적으로라도 상대를 덮치려 했고, 다른 한 명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왜곡된 심리를 안고 있었다.

사전 준비를 다 끝내고, 성건우는 돌격 소총의 옆면을 두드리며 웃었다.

“지금 우리 팀이라면 실연 전선 연맹이라고 불러도 되겠네요.”

그러자 장목화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차으뜸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접근하면 안 돼. 그 사람도 각성자니 분명 다른 능력을 갖고 있을 거야. 차으뜸이 복도 입구에 나타나면 바로 사격을 개시하자. 각자 다른 부위를 노려서 교차 화력망을 형성해보자고.”

“알겠습니다.”

팀원들 모두가 적당한 목소리로 답했다.

또 다른 검사를 마친 후, 장목화는 벨트에 찬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버튼을 누른 장목화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린 지금 복도 끝에 있어. 여기엔 고등 무심자 하나랑 평범한 무심자 둘이 있었어. 고등 무심자는 아이를 낳던 중이라 우리를 공격하는 데 집중하는 대신 바로 여길 빠져나갔어.”

몇 초 후, 무전기에서 차으뜸의 냉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장목화는 무전기를 넣은 뒤, 팀원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가 먼저 방을 나가고, 팀원들도 줄지어 따라나섰다. 복도에서 그들은 말없이 이전의 전투 대형을 갖췄다.

장목화의 별도 지시가 없었지만, 다들 사격 방향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중점적으로 훈련받은 부분 중 하나였다.

그러니 모두 이런 전술 대형 아래 교차 화력망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어서, 누가 어느 부위를 노릴지 같은 건 따로 토론할 필요가 없었다. 각자 선 위치에 할당된 구역만 노리면 됐다.

손전등 노란 빛기둥이 가리키는 복도 입구에서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차으뜸의 모습이 조금씩 보였다.

용여홍은 극도의 긴장으로 몸을 미미하게 떨기 시작했다.

차으뜸도 종합 경보 시스템을 통해 용여홍이 떨고 있단 걸 예리하게 간파했다. 순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차으뜸이 걸음을 늦췄다.

상황을 파악한 장목화는 차으뜸이 예정된 사격 범위 안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곧장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낮게 외쳤다.

“발사!”

동시에 그녀가 조준한 곳은 금속 헬멧으로 가려진 차으뜸의 머리였다. 만약 상대가 위로 펄쩍 뛰어올라 총상을 피하려 한다면 아이스모스의 총알은 목에 박힐 터였다. 그곳은 외골격 장치의 가장 약한 부분이자 급소였다.

탕!

장목화는 누구보다 앞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녀의 곁에서 내내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던 백새벽과 성건우는 각각 차으뜸의 왼팔과 사타구니를 향해 총을 쐈다.

두 사람도 모든 가능성을 고려한 후에 조준했다. 차으뜸이 자신들 쪽으로 몸을 날려 피신할 가능성을 생각한 것이었다.

만약 차으뜸이 구조팀 오른편으로 도망친다면, 백새벽의 총알은 차으뜸의 팔과 어깨 경계 부위를 관통할 가능성이 컸다. 그곳은 외골격 장치 장갑으로 덮이지 않은 부분이었다. 혹은 목을 스쳐 지나갈 가능성도 있었다.

백새벽이 쏜 총알이 왼쪽을 향한 건, 상대와 마주한 입장에선 차으뜸의 오른쪽이 그녀에겐 왼 방향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차으뜸이 몸을 굴려 공격을 피하려 든다면, 성건우의 돌격 소총은 차으뜸의 부드러운 복부를 파고들 수도 있었다.

용여홍도 긴장은 했어도 그동안 적잖은 경험을 했기에, 팀장의 명령이 떨어지던 순간 조건반사적으로 망설임 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탕탕- 탕- 탕탕!

용여홍은 차으뜸의 오른팔을 향해 연발했다.

하지만 차으뜸은 장목화가 오른손을 들었을 때부터 서둘러 반응했다. 그는 은색 소총을 쥔 오른팔을 들어 금속 외골격에 덮인 부분으로 목 앞을 가린 뒤, 왼팔론 하복부를 감싸며 검은 금속 골조가 구조팀을 향하도록 했다. 그 사이 다리에 힘을 주고, 보조 관절을 이용해 오른쪽 복도로 몸을 날렸다.

팅- 팅-

금속 외골격에 부딪힌 총알이 불꽃을 튀기며 적막한 지하 복도를 울렸다.

장목화는 그의 움직임을 다 예상한 듯 손목을 살짝 틀더니, 짐작했던 차으뜸의 도피 경로를 따라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바로 그때였다. 군용 외골격 장치 파워팩 아래에 자리한 몇 개의 구멍에서 흰색 기체가 몇 갈래로 뿜어져 나왔다.

그 강력한 추진력은 차으뜸을 천천히 위쪽으로 띄워 올렸다. 이로 인해 그는 장목화의 총알 하나하나를 빠르게 피할 수 있었다.

차으뜸은 그렇게 한 손으로 천장을 떠밀면서 오른쪽 복도로 튕기듯 진입했다. 어느 순간, 그는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쾅-!

차으뜸이 떠민 천장 판이 그대로 떨어져 내리며 산산조각이 났다.

“아깝네⋯⋯.”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외골격 장치만 없었더라도 차으뜸에게 중상을 입히고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다.

* * *

오른쪽 복도.

차으뜸은 연거푸 두 바퀴를 구르고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종합 경보 시스템으로 주위 동정을 살피는 한편, 왼손으론 아래턱을 훔쳤다. 그의 손등은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었다.

그는 외골격 장치에 달린 전등 불빛에 기대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떻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껏 경험에 따르면, 차으뜸의 매혹 능력으로 생긴 호감은 적어도 하루는 지나야 점유욕과 공격성이 다분한 마음으로 왜곡됐다. 그런데 저 네 명은 어쩌다 저렇게 갑자기 변한 걸까. 그들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금세 발광하고 마는 야수도, 번식과 점유 본능만 남은 무심자도 아니었다.

이내 차으뜸은 하늘색 거울 함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거울 속, 미끈한 아래턱엔 피가 흥건한 상처가 하나 생겼다. 튄 탄환에 긁힌 상처였다.

“어떻게 감히⋯⋯.”

차으뜸의 눈에 분노의 빛이 어렸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요리조리 거울을 살피던 그는 하늘색 거울 함을 집어넣고, 의료용 붕대로 상처를 감쌌다. 그러곤 서늘한 빛을 번쩍이는 눈으로 구조팀이 있는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2초쯤 고민하던 차으뜸은 당장 복수하는 대신 휙 돌아 복도의 끝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지하 기계실이란 걸 잊지 않았다.

그래도 구조팀원을 통해 그는 이곳에 자신의 매혹 능력을 제거할 수 있는 고등 무심자, 혹은 변이 생물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애초에 그들을 이용한 목적도 어느 정도는 달성한 셈이었다.

차으뜸도 이 빌딩에 수많은 위험한 생물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전에 그 가위 말을 맞닥뜨린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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