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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야여화-76화 (76/649)

76화. 환각 속에서의 대화 (1)

탕!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눈앞에 있던 기이한 노파와 무시무시한 갓난아기 해골이 사라졌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전부 다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손전등으로 방 깊은 곳 어딘가를 비추자, 한데 합쳐진 여러 테이블 위에 또 다른 여자 하나가 있었다. 붉은색으로 된 짧은 방한복을 입은 여자였다.

테이블을 엉기성기 옮겨붙인 건, 나름대로 누울 침대를 마련한 것 같았다. 여자는 그렇게 테이블 위에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누워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형편없이 헝클어진데다 기름에 가닥가닥 뭉쳐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초라한 행색임에도 그녀의 눈엔 기이한 악의가 형형했다.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혼탁하고 충혈된 눈에 흐르는 야수성밖에 없는 듯했다.

여자 역시도 전형적인 무심자였다.

그녀가 입은 색바랜 짧은 방한복의 지퍼는 채워져 있지 않았다. 활짝 열린 옷 사이론 높이 솟은, 털이 부숭부숭한 배가 드러났다. 또한 하의는 입지 않고 있었는데, 옷 대신 남루한 솜이불로 살짝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행색보다 자세가 더 기묘했다. 두 다리를 살짝 벌리고,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엔 다소 기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용여홍은 이 광경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건우는 달랐다. 그간 집회에 여러 차례 참석하며 성찬도 여러 번 먹었기에, 그는 여자를 보자마자 단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여자 무심자는 아기를 낳고 있었다.

무심자에게도 번식 본능은 있었다.

한편, 장목화의 총알이 향한 곳엔 한 남자가 또 있었다. 흰색 러닝셔츠를 입은 남자의 피부는 고동색, 얼굴은 수염으로 뒤덮였으며 곳곳에 털이 무성했다. 그의 눈도 여자와 다르지 않았다. 혼탁하고 흉악한 눈빛이었다.

결국 이들이 조금 전 본 노파는 환각이었다.

장목화의 총알은 남자 무심자를 맞히지 못했다. 미리 위험을 예견한 듯한 남자가 다리에 힘을 주고 펄쩍 뛰어올랐기 때문이었다.

탕탕탕-!

이제 성건우와 백새벽도 곧장 반응하며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남자 무심자는 그보다 한발 앞서 복도의 벽을 차고 올라 위치를 바꿨다. 위로 튕겨 오른 그는 천장에 난 구멍의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팔을 당기며 아예 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탕- 탕탕-!

성건우와 장목화는 쉬지 않고 위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남자 무심자는 매번 정확한 움직임으로 총알을 피했다. 꼭 기묘한 예지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용여홍도 분명 반응이 좀 느리긴 해도, 끝까지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돌격 소총을 쥔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여자 무심자를 감시하며 습격 대비를 철저히 했다.

용여홍이 차마 방아쇠까지 당기지 못한 건, 저 무심자가 출산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눈동자를 살짝 굴리던 백새벽이 돌연 방향을 홱, 틀더니 여자 무심자를 겨냥했다. 언제나 그렇듯 침착한 그녀에게선 연민의 표정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백새벽 바로 위쪽의 천장이 갑자기 떨어져 내렸다. 금방이라도 백새벽의 머리를 강타할 기세였다.

동시에 남자 무심자도 그곳을 통해 펄쩍 뛰어내렸다. 그는 곧장 테이블 위의 여자 무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등 근육은 러닝셔츠를 다 찢어버릴 듯 불끈 솟아올랐다. 지금 그는 꼭 날개를 활짝 펼친 나비 같아 보였다.

백새벽도 이를 예견한 듯, 천장이 떨어지기 전 이미 옆쪽으로 몸을 굴려 피신한 상태였다.

장목화 역시 백새벽이 총구를 돌렸을 때 무심자의 생각을 간파한지라, 기회를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홱 돌아서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과 함께 총구에서 튀어나온 노르스름한 총알이 짧은 거리를 가로지르며 남자 무심자의 왼쪽 어깨 아랫부분을 파고들었다.

무심자는 때맞춰 허리를 굽히며 심장 쪽을 피했다. 그의 어깨에 난 총상은 장목화의 예상만큼 크지 않았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근육 덕인 듯했다.

장목화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도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당황할 여유 같은 건 없었으니, 장목화는 얼른 방아쇠를 또 한 번 당겼다.

이번에 총알은 무심자의 허벅지 뒤에 박혔다.

콰당!

남자 무심자는 결국 사방으로 피를 튀기며 쓰러졌다.

테이블 위, 여자 무심자가 몸부림치며 날카롭게 울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장목화는 눈 깜짝할 사이 남자 무심자의 몸이 꿈틀거리는 피와 살점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로부터 풍기는 형언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장목화는 물론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 모두가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다리에 자꾸만 힘이 빠져서 더는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끝내 속속들이 주저앉아버린 일행은 몸을 단단히 웅크린 채 더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했다.

다들 온 인류를 무너뜨릴 수도 있을 정도의 두려움에 저항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래봤자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겨우 좀 더 느리게 주저앉았던 것뿐이었다. 실로 엄청난 절망, 통제할 수도 없는 절망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성건우는 뇌가 경련하는 느낌에 저절로 폴짝 뛰어올랐다. 뒤이어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는 이상하리만치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에 갑자기 철학적인 문제를 고심하기라도 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장목화가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다독이며 힘겹게 물었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해?”

성건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진지하게 답했다.

“환각 속에선 차으뜸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는 걸 느꼈거든요.”

성건우의 말을 듣고, 장목화도 한 가지 요점을 파악했다.

‘맞아……. 나도 차으뜸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꼈어.’

차으뜸은 분명 잘생긴 데다 키도 컸지만, 한번 보자마자 흠뻑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거기다 성격도 냉담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도 몰라서, 함께 오랜 시간 어울려도 호감은커녕 나날이 비호감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는 여태껏 마음 깊은 곳에 흐릿하고 모호한 형태로 숨어있던 감정이었다. 아주 가끔 고개를 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썰물 때를 맞아 바닥을 보인 바다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장목화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쩐지 칩을 보면 뭔가 심상치가 않았어. 본능적으로 계속 날 무장하고 차으뜸과 거리를 벌리려 노력했던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야…….”

곁에 있던 백새벽도 성건우의 말을 듣고 몇 차례 표정 변화를 보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돌이켜보면 볼수록 이상하네요. 우린 왜 그렇게 차으뜸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고, 그 사람을 따라 이렇게 기이하고 위험한 폐허 도시에 왔을까요?”

고등 무심자는 물론, 변이된 무시무시한 생물, 이해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을 유지하는 방식까지, 이곳은 그야말로 공포의 도시였다.

이것뿐이던가? 이상하고 비밀스러운 실험실과 사방을 진동시킬 정도로 포효하던 미지의 생물도 있었다. 이 도시는 백새벽이 여태 가본 그 어떤 폐허 도시보다 훨씬 무서운 곳이었다.

이내 용여홍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난 진짜로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성애자인데, 가끔…… 가끔은…… 차으뜸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웩⋯⋯!”

용여홍은 끝내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냅다 구역질부터 했다.

“뭐, 꿈에서 벌써 끝까지 갔어?”

장난인지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심하게 묻던 성건우가 용여홍이 무슨 대꾸도 하기 전에 바로 말을 덧붙였다.

“이것도 무슨 능력일까요?”

장목화는 혀를 차며 답했다.

“여홍이가 저렇게 짜증 나게 구는 것도 걔 능력이냐고 묻는 거야, 아니면 차으뜸의 매혹 능력을 묻는 거야? 매혹이라면 그래, 분명 능력이겠지.

근데 모든 능력엔 한계가 있어. 미신 속 달지기가 되지 못하는 이상, 범위나 목표 수량 같은 거엔 다 한계가 있어.

맞아, 내가 전에 빌딩 아래로 가서 볼일을 보겠다니까 차으뜸이 한사코 막으면서 같은 층에 딴 방에서 해결하랬잖아. 아까도 복도 끝에 가면 방향 틀지 말고, 일단 자기한테 돌아와서 보고부터 하라고 했고.

이건 차으뜸의 능력 범위가 이삼십 미터를 못 넘는다는 거야. 목표 수량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번에 한 명 아니, 한 생물에게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아닐 거야. 상응하는 범위 안에 진입만 하면 자연스레 그 능력이 발동되나?”

용여홍과 백새벽은 장목화의 분석을 듣고 두려움이 더 커졌다. 전부터 좀 이상했던 부분이 이제야 다 심층적으로 이해됐다. 당시만 해도 이들 모두가 무슨 귀신에 홀린 듯 당연하게 받아들인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무섭네요, 정말로 무서워요.”

한숨을 내쉬던 용여홍은 순간 뭔가 하나를 더 깨달았다.

“어? 근데 우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서 옴짝달싹 못 하지 않았어요? 근데 지금은 왜 이렇게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거지?”

답은 언제나처럼 진지한 표정의 성건우가 담당했다.

“전에 보고 느낀 건 다 환각일 뿐이었어. 그걸 신경 쓰지 않고 무시하면 아무 영향도 안 받는 거지.”

“환각⋯⋯.”

용여홍은 그제야 성건우가 이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다 용여홍이 다시 또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물었다.

“그럼 일단 환각에서 깨어나야 하는 거 아냐? 무심자들이 이 기회를 틈타 습격해오면 어떻게 해?”

“맞아.”

장목화가 손전등을 든 왼손을 들어올렸다. 자신의 뺨을 때려 정신을 차려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손전등까지 쥐고 자신의 얼굴을 친다는 건 아무래도 좀 과하단 생각이 든 것 같았다.

이내 장목화는 여전히 꿈틀거리는 피와 살점을 향해 총을 쏘려 했다. 환각을 만든 무심자가 더는 이 능력을 유지하지 못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때였다. 눈앞에서 꿈틀거리던 피와 살점이 돌연 와르르 무너져 내리더니, 다시 남자 무심자로 돌아왔다. 무심자는 발버둥을 치듯 일어났다. 동시에 챙, 하고 가벼운 소리가 나기도 했다.

돌아보니 그건 여자 무심자가 낸 소리였다. 그녀의 손엔 어디서 났는지 모를 날카로운 비수가 있었다. 무심자는 한참 몸을 일으키려 낑낑대면서 일행을 습격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테이블 위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하고 하반신의 통증 때문에 다시 쓰러져 버렸다. 손에 쥐고 있던 비수도 바닥에 툭 떨어졌다.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린 여자 무심자가 상반신만 억지로 일으켜선, 남루한 솜이불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런 뒤, 다리 사이에서 축축한 갓난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기 배꼽엔 하얗게 불은 탯줄도 달려있었다.

“으아아앙!”

맑고 높은 아기 울음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곧장 총을 쏘려 했던 장목화도, 팀원들도 모두 총을 든 상태였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다.

그사이 빠르게 탯줄을 끊은 여자 무심자는 아기를 꼭 안고 몸을 반쯤 틀었다. 방에 난입한 침입자들로부터 아기를 지키려는 행동이었다.

흉악한 얼굴엔 경계심이 가득했고, 혼탁한 눈동자도 어느새 축축해져 있었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애원의 빛이었다.

“으아아아앙!”

아기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여자 무심자는 연신 허리를 굽히면서 계속 부탁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입으론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네 명 모두 침묵에 빠졌다. 총을 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심자의 말에 호응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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