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지하 복도
이윽고 장목화가 손전등을 쥐고 등을 살짝 굽힌 채, 비상 통로로 들어갔다. 언제 당하게 될지 모를 기습을 경계하느라 감히 속도를 높일 수도 없었다.
연이어 성건우, 백새벽, 용여홍이 차례로 비상 통로에 들어서자, 장목화가 뒤를 돌았다.
“내가 엎드리라고 하면 곧장 엎드려.”
무심자들이 멀리서 유탄을 발산하거나 수류탄을 던질 수도 있다는 걱정에 내린 지시 사항이었다.
뒤에 있는 차으뜸이 종합 경보 시스템이나 정조준 시스템으로 미리 유탄을 폭발시킬 수도 있겠지만, 흩어진 파편의 위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한 만약에 무심자들의 유탄과 수류탄이 유독 가스를 발생시킨다면 장목화에게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모두에게 숨을 꾹 참고 1층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백새벽은 모르겠지만 유전자 개량자들은 회사에서 생산한 범용 생물 해독제를 먹을 때까지 힘겹게나마 버틸 순 있을 터였다.
한편 외골격 장치에는 방독 여과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어, 차으뜸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장목화는 이 계획이 끝까지 유효할진 확신하지 못했다. 무심자들이 열압력탄까지 갖고 있다면 겸허히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망상에 가까운 얘기였다.
그녀는 무심자들이 열압력탄, 가스 등 좋은 총기나 탄약을 가졌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판단했다. 구세계가 파괴된 이후 여기에 진입한 이들이 거의 없는데, 기껏해야 몇 명에 불과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장비를 갖추고 있을 리 없으며, 내내 좋은 무기를 잘 손질하여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그때, 순간 장목화는 고등 무심자의 기이함과 그들이 쓸 수 있는 각종 무기가 떠올랐다.
‘아…….’
정말이지 머리가 다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네, 팀장님!”
용여홍이었다. 장목화의 지시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답한 것이다.
웅웅-
잔뜩 기합 들어간 목소리가 좁은 비상 통로를 위아래로 크게 울렸다. 용여홍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래, 참 잘했다.”
“훌륭해.”
“패기가 넘치네.”
장목화, 백새벽, 성건우가 동시에 그를 향한 칭찬을 쏟아냈다.
차으뜸은 냉랭한 눈빛으로 네 사람을 바라보다가 외골격 장치에 딸린 전등을 켰다. 그는 그렇게 빛기둥으로 더는 낭비할 시간이 없음을 알렸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는 팀원들에게 지시 사항이나 따로 강조할 게 있는지 확인한 후, 손전등과 아이스모스를 쥐고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 * *
비상 통로 안은 싸늘했다.
우측 벽은 칠이 다 벗겨져 있었고, 좌측 손잡이 검은 페인트도 얼룩덜룩해진 상태였다. 금속 난간 역시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노란빛 아래 드러난 계단은 빙글빙글 돌아가며 어두컴컴한 지하를 향해 뻗어있었다. 흡사 거대한 괴수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용여홍은 더욱더 긴장하고 겁을 먹었다.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 각양각색의 생각에 다시금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작전이 정말 필요한 건가?’
아래로 내려가는 내내 계단은 계속 적막했다. 모든 생명체가 이미 다 죽어서 세상이 멸망한 것만 같았다. 용여홍은 동료들의 희미한 발소리라도 없었다면, 일찍이 정신이 나갔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은 자꾸만 더디게 흘러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대열 맨 뒤에서 있던 차으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여기야.”
“휴⋯⋯.”
용여홍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단에 있는 동안 아무 습격을 받지 않은 것만큼 다행인 일도 없었다.
일단 이 협소하고 밀폐된 공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달리든, 굴러서든, 어떻게든 피할 공간은 생길 것이다.
“이 틈을 노릴 수도 있었는데. 습격을 안 했어⋯⋯.”
백새벽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장목화가 이에 무의식적으로 대꾸했다.
“지하 기계실로 가려는 우릴 막을 생각이 없었던 거지. 거기가 그들 소굴이 아닌 이상, 그럴 동기도, 지능도 없으니까.
사냥꾼도 지나치게 크거나 처리하기 어려운 사냥감은 몰래 숨어서 관찰하다가 기회를 엿보는 게 낫잖아. 지원해줄 동료가 있어야 가능성도 커지니까. 저들도 몇 대를 이어왔을지 모를 무심자라서, 그 정도 본능이나 지능은 가지고 있을 거야.”
이 순간, 용여홍에게 이보다 더 신경 쓰이는 말은 없었다. 그는 걱정스럽다는 듯 주위를 한번 둘러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이렇게 어두운 주변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이번엔 성건우가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 잔뜩 겁먹고 나약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즉각 표적이 될 거야. 그러니까 계속 집중해서 경계해야 해.”
순간 용여홍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주어만 없었지, 완전히 용여홍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는 순간 거짓말처럼 공포를 극복하고, 그 어떤 허점도 보이지 않게 정신을 무장했다.
다시 장목화가 말을 이었다.
“좋아, 문 뒤쪽 구역엔 전기 신호도 없어. 그래도 조심히 움직이자.”
일행은 서로를 엄호해 주는 한편, 화력으로 화력을 압도할 준비를 했다. 느슨하게 구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뒤이어 장목화가 힘을 적절히 통제한 뒤, 지하 기계실로 통하는 비상 통로 문을 벌컥 열었다. 더불어 그녀는 그 힘을 그대로 이용해 동그랗게 굴러가 옆쪽에 몸을 숨겼다.
아무 기습자도 없었다. 일행은 다시 전투 대형을 갖추고 비상 통로를 나와 지하의 어떤 한 층에 진입했다.
장목화는 손전등으로 이곳저곳을 비춰보며 이곳 구조를 파악했다.
전방엔 십자 갈림길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왼쪽, 오른쪽, 앞쪽 모두 복도가 뻗어있고, 복도의 양옆으론 방들이 딸려 있었다. 그 수도 적지 않았다.
“지하 기계실은 어디야?”
장목화가 차으뜸에게 물었다.
차으뜸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답했다.
“나도 몰라. 일단 너희들이 먼저 가서 길을 좀 찾아봐. 기계실을 찾으면 곧장 알려주고, 못 찾으면 다른 곳을 찾아봐.”
그는 고민도 거의 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팀장 장목화도, 팀원들도 차으뜸의 지시가 당연하다는 듯 예전 대형 그대로 전방 복도를 향해 나아갔다.
잠시 후, 차으뜸이 몇 발짝 앞으로 다가가 강조했다.
“끝까지 간 뒤엔 다른 곳으로 방향 틀지 말고 일단 보고부터 해.”
“알았어, 그럴게.”
답은 성건우가 대신했다. 심지어 그는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장목화는 다시금 전방을 주시했다. 팀원들도 모두 손전등 불빛을 따라 계속해서 앞으로 향했다.
* * *
복도 양옆으로 자리한 방 중엔 열린 곳도, 닫힌 곳도 있고, 문도 제각기 다 달랐다. 나무로 된 것도, 남회색 금속으로 된 것도 있었다.
열린 방 안엔 정사각형 테이블, 사각형 테이블, 의자, 각종 기계가 보였다. 하지만 전력을 공급하는 기계실 같은 곳은 보이지 않았다.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장목화가 손을 들었다.
팀원들을 멈춰 세운 그녀는 곧장 옆쪽 방을 향해 총을 쐈다.
탕-
그 방의 또 다른 문으로 한 인영이 비틀거리며 튀어나왔다. 그 무언가는 맞은편 복도를 향해 달아나버렸다.
모두가 손전등 불빛을 그쪽으로 돌렸다. 상대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기에, 총 맞은 부위가 확연히 도드라져 보였다. 오른 어깨가 붉게 젖어있었다.
그러나 움직임이 매우 빠른 그는 총을 맞고도 일찍이 저만치 거리를 벌렸다. 일행은 미처 그에게 한 번 더 총을 발사할 새도 없었다.
“근데 저 상처, 아무래도 이상해.”
백새벽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뭐가?”
용여홍이 물었다.
백새벽은 곧 장목화를 바라보았다.
“아이스모스 위력이 연합 202에 비할 건 못 돼도, 그렇다고 크게 약하지도 않아요. 사람 몸에 명중했을 때 상처가 겨우 저 정도에 그치진 않잖아요.”
장목화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후세대 무심자의 근육이 그렇게나 진화됐다는 건가? 총알 회전 피해도 줄일 수 있을 정도로?”
“그 이유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주의는 해야겠어요. 저들의 부상 상태를 오판해서는 안 되니까요.”
백새벽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저들 뇌도 그만큼 단단해졌다면 좋을 텐데.”
성건우는 웃으며 말했지만, 용여홍은 조용히 이 주의사항을 기억해두었다.
구조팀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더 이상 무심자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 * *
일행은 마침내 복도 끝에 이르렀다.
장목화는 손전등을 들어 오른편에 열린 방을 한번 비춰보았다. 빛이 닿은 순간,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몸이 살짝 굽은 상대는 짙은 색 털모자를 쓰고, 검은 모직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또한 양손으론 붉은색과 파란색이 섞인 강보를 들고 있었으며, 모자 밖으론 흰 머리칼이 드러나 있었다. 상대는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였다.
이내 고개를 든 그녀가 혼탁한 눈동자로 일행을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너희는⋯⋯ 수종이를⋯⋯ 방해했어⋯⋯.”
노파는 적어도 여든 살은 넘어 보였다. 구세계 파괴 이후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았다. 일찍이 죽은 이 도시에서 여태 목숨을 부지해온 모양이었다.
탁한 눈동자는 야수의 그것처럼 악의로 가득했다. 전형적인 무심자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아주 힘겹긴 해도 띄엄띄엄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는 상대가 인간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장목화는 순간 충격과 공포와 동시에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그녀의 목표 중 하나가 무심병의 발병 원리와 전파 방식을 알아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노파가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 와중에 그녀가 품에 안은 강보가 바깥쪽으로 4분의 1 정도 회전해서, 안이 훤하게 드러났다.
장목화와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손전등 불빛 아래, 강보 안에 싸인 뭔가가 보였다.
작고 하얀, 갓난아기의 두개골이었다.
두개골 아래쪽으로도 수많은 흰색 뼈가 연결돼있는 듯했지만, 붉고 푸른 강보에 가려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노파는 대체 언제부터 이 해골을 안고 있었을까. 장목화는 공포로 인해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그대로 멈출 것만 같았다.
장목화와 용여홍, 백새벽, 성건우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얼굴이 허옇게 질려버린 네 사람은 한 발짝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던 그때, 장목화는 곁눈으로 성건우의 낯빛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보았다. 심지어 그의 얼굴은 매우 엄숙해 보이기도 했다.
이내 성건우가 눈앞의 노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장목화만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왜 총을 안 쏩니까?”
“……왜 총을 안 쏘냐고?”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 말을 그대로 되뇌던 장목화는 몇 초 후 깨달음을 얻었다.
장목화도 이렇게 위험한 장소, 억제된 환경 속에선 주위 무심자에게 습격 의도가 있는지 제대로 판별할 수 없었다.
선두에서 전기 신호를 감지하던 장목화는 인영을 봤을 때도 바로 방아쇠를 당겨 잠재된 위험을 제거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장목화는 반사적으로 총을 쏘는 대신, 노파가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와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장목화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때, 그녀는 노파를 보던 시선을 거두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전기 신호를 감지했다. 전기 신호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장목화는 곧장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더는 두려움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망설임도 없이 오른손에 아이스모스를 쥔 장목화는 짐작되는 위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