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화풍 파괴자
유리로 만들어진 빌딩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어쩌면 구세계가 파괴된 이래 내내 닫히지 않은 채로 남아있던 건지도 몰랐다. 그로 인해 드넓고 어두운 홀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차으뜸은 곧장 안으로 달려가는 대신, 종합 경보 시스템을 이용해 문밖에서 20초 정도 관찰을 했다. 그러곤 허리를 살짝 굽힌 뒤,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렸다. 팀원들도 시종일관 전술 대형을 유지하고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홀엔 금속 외골격과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와 무겁지 않은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를 제외한 다른 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지않아 일행은 엘리베이터에 도착했다. 이 빌딩엔 좌우 양측으로 흑회색 엘리베이터가 세 대씩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전기가 통하지 않으니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순 없었다. 차으뜸도 엘리베이터가 아닌, 그 옆쪽에 자리한 비상 통로 문이 목적이었다.
붉은 나무 문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겉보기엔 그냥 얌전히 닫혀 있는데 잠겨있는 건지, 열렸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백새벽은 차으뜸을 위해 먼저 앞장서 문을 열려다, 순간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이 문 뒤에 아주 진귀한, 그래서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하는 물건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갈망과 충동에 휩싸인 그녀는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가 그 물건을 차지하고 싶었다.
이런 욕망에 휩싸인 건 백새벽 하나만이 아니었다. 차으뜸과 용여홍, 성건우도 다급히 이끌리듯 문으로 달려들었다.
그때, 장목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큰소리로 외쳤다.
“오수혁의 팀원이 했던 말 기억해?”
그녀가 말하는 건, 고등 무심자의 유혹과 그걸 미끼로 한 함정이었다. 장목화가 갑작스러운 충동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었던 건 이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장목화의 몸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제자리에 단단히 버티고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잠시 갈등 끝에 멈춰 섰다. 맨 뒤에 있던 성건우도 어느덧 이만큼 달려 나가 있었으나 더는 나아가지 않고 장목화의 곁에 섰다. 그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안에 인류를 구원한 비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비밀은 수많은 보호막에 둘러싸여 있겠죠? 그 주위에는 그보다 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테고요.”
순간 장목화는 성건우를 노려봐야 할지, 칭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 2초간 고민하던 성건우가 말을 덧붙였다.
“조심해야겠습니다. 방심하면 안 돼요.”
성건우는 그 즉시 한 엘리베이터 앞으로 뛰어갔다. 문에 그의 모습이 비쳤지만, 창틈을 겨우 비집고 들어온 별빛은 그다지 시야를 밝히진 못했다.
그래도 성건우는 흐릿한 자신과 마주하며 입술을 뗐다.
“장목화는 롱다리고, 나도 롱다리다. 장목화는 대단하고, 나도 대단하다. 그러니까?”
어느새 눈동자 색이 짙어진 그가 낮은 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같아.”
본래 차으뜸은 성건우를 저지하려 했지만, 알 수 없는 강렬한 갈망에 저항하고 있었던 데다 성건우가 만들어낸 다른 변화로 상황을 탈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로 잠시 주춤했다. 결국 차으뜸은 일단 준비만 해둔 채 냉정하게 지켜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윽고 스스로를 속인 성건우가 장목화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더욱더 짙어져 있었다.
그 순간, 장목화는 한 생각을 떠올렸다.
‘난 저 문 뒤에 있는 물건을 무척이나 원해. 저걸 손에 넣고 싶어. 근데 절대로 그런 절박한 모습을 보이거나 그 욕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어. 그건 너무 부끄러운 짓이야.’
결론을 내린 장목화가 몸을 반쯤 돌리면서 가볍게 발을 굴렀다.
“가려면 너희들만 가. 난 안 갈 거야.”
그때, 성건우가 그녀와 똑같은 방향으로 돌아서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가려면 너희들만 가. 난 안 갈 거야.”
순간 용여홍과 백새벽이 동시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이로 인해 그들의 마음을 잠식했던 강렬한 갈망이 적잖게 중화가 됐다.
하지만 아직 억지쟁이 상태인 장목화는 성건우를 노려보았다.
“왜 날 따라 해?”
“왜 날 따라 해?”
성건우는 말투, 표정뿐만 아니라 눈빛까지 장목화를 똑같이 흉내 냈다.
그제야 장목화는 비로소 억지쟁이 상태에서 벗어났다. 이후 그녀는 방금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우리를 웃겨서 그 묘한 갈망에서 벗어나게 해준 거야?”
“우리를 웃겨서 그 묘한 갈망에서 벗어나게 해준 거야?”
성건우도 장목화를 따라 소리 내 웃었다.
이를 보고 차으뜸이 입꼬리를 뒤틀었다. 좀 진지할 수 없냐고 경고하고 싶었다. 여긴 폐허 도시의 정보망 센터였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솜털이 쭈뼛 솟을 정도로 적막한 곳에서 한가롭게 박장대소나 하고 있다니.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웃음을 참으며 다시 운을 뗐다.
“내 머리는 길지만 네 머리는 짧잖아.”
“내 머리는 길지만⋯⋯.”
성건우는 이 말까지 따라 하려다 돌연 입을 다물었다. 눈동자도 원래 색을 되찾았다. 원상태로 회복하자마자 그가 한 말은 이거였다.
“기회를 잡아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장목화가 다시 그 묘한 갈망에 침식되기 전에 서둘러 붉은 대문 앞으로 향했다.
“양옆에 바짝 붙어.”
그녀는 지시와 동시에 녹슬어 얼룩덜룩한 금속 문고리를 움켜쥐고 세차게 문을 밀어젖혔다.
탕탕탕! 탕탕탕!
장목화는 재깍 옆으로 몸을 날리며 몇 바퀴를 구른 뒤 엘리베이터 옆쪽으로 피신했다. 총성이 계단 위아래에서 쉴 틈 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사이, 비상 통로 입구는 아예 총알 폭풍에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만약 다른 사람이 성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더라면…….’
장목화는 그 끔찍한 결과를 굳이 입 밖으로 내긴 싫었다.
마찬가지로 차으뜸도 강렬하고 기이한 욕망에 사로잡혀서, 외골격 장치의 종합 경호 시스템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계속 요란한 총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장목화는 벨트에 걸려있던 전술 수류탄을 쥐고 안전핀을 뽑았다. 비상 통로 안으로 던져넣기 전, 적합한 궤적부터 계산했다. 수류탄을 벽에 튕겨 계단 아래쪽에 떨어지게 할 생각이었다.
그때, 총격이 멈췄다.
장목화는 다시 묵묵히 전술 수류탄을 벨트에 차고, 한 손엔 유탄 발사기를, 다른 손엔 연합 202를 쥐고서 비상 통로 내 각종 전기 신호를 감지했다.
“위쪽에 있던 무심자는 이미 물러났어. 아래쪽 전기 신호는 제대로 확인할 순 없는데, 많아봤자 둘 정도만 남은 것 같아.”
이젠 모두의 머릿속에서 진귀한 무엇이 이곳에 숨겨져 있을 것 같단 생각도 씻은 듯 사라졌다.
차으뜸은 본인의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자마자, 외골격 장치의 종합 경보 시스템을 활성화하고 앞으로 굴러 비상 통로 안으로 진입했다.
* * *
지하 기계실로 이어지는 계단 안쪽엔, 위를 올려다보는 한 인영이 있었다. 겉보기엔 그냥 젊은 여자였다. 키는 165센티미터 정도에 이목구비도 단정했지만, 눈은 남달랐다. 흰자위에 비해 검은 동자가 지나치게 작았다. 그 눈동자도 상당히 혼탁한데다 잔뜩 충혈된 상태였다.
그래도 어쨌든 쪼글쪼글한 흰색 다운재킷을 입고 있는 그녀는 다른 무심자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참 깔끔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깊은 밤 유령처럼 어둠 속에 가만히 서서, 죽이려는 목표를 말없이 응시했다. 만약 종합 경보 시스템이 없었더라면 차으뜸은 그녀의 생김새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터였다.
곧 차으뜸이 유탄을 발사하려는데, 무심자는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한 채 아래쪽으로 뛰어내린 후, 계단 안쪽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오수혁의 팀원들이 봤다던 그 고등 무심자인가?”
입구 근처로 다가온 장목화가 물었다.
“맞아.”
차으뜸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휴, 역시.”
장목화는 한숨을 내뱉었다.
뒤이어, 용여홍은 아직도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한탄을 했다.
“무심자에게 지능이 없어서 다행이네요. 만약 우리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로 공격했다면, 우리 중에 절반은 벌써 다 죽었을걸요.”
붉은색 나무 문은 총알을 막기에는 지나치게 약했다. 하지만 본능만을 따르는 무심자에게 장애물은 그저 장애물로 인식될 뿐이라, 문이 제거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꼭 그런 얘기 해야겠어? 불길하게.”
백새벽이 고개를 돌려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용여홍은 행운, 재수, 불길, 운명 같은 단어에 유난히 민감해하는 사람이라 곧장 입을 다물었다.
이내 차으뜸이 어둠에 잠긴 계단을 보다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려가자.”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말을 덧붙였다.
“너희가 앞장서.”
이제 이들을 미끼로 쓸 때였다.
“알았어.”
성건우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 그는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쥐고 차으뜸을 지나쳐 지하 기계실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때, 웬 팔 하나가 성건우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앞장설게.”
묵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장목화였다. 그녀는 나름대로 목소리를 낮춘 것이지만, 사실 본래 대조군이 없는지라 음량이 크게 낮진 않았다.
“전 각성자예요.”
고집을 피우는 성건우의 표정은 진지하면서도 엄숙했다.
그를 보며 장목화가 코웃음을 쳤다.
“왜? 인류에 앞서서 우리부터 구원하시려고? 너, 습격자 존재를 미리 감지할 수 있어?”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순간 장목화는 말문이 막혔다.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그녀는 성건우로부터 한 몇 초쯤 흘러서야 겨우 다시 입을 뗐다.
“범위는?”
“10미터입니다.”
성건우는 솔직하게 답했다.
이내 장목화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내 감응 범위는 너보다 넓어. 이런 환경에서는 습격자의 존재를 빨리 알아차릴수록 좋지. 그러니까 내가 앞장설게.”
그리곤 장목화가 살짝 웃어 보였다.
“너한테 책임 지우지 않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야. 각자 다 전문 분야가 있고, 특정 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가장 나아서 그래. 언젠가 우리 팀이 더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그래서 네 능력이 그 상황을 타파하기 적합하다면 그땐 두말할 것 없이 널 앞세울게.”
성건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곧이어 장목화는 마지막으로 총 끈을 조정해 유탄 발사기를 잘 정돈한 뒤, 한 손에 아이스모스를 쥐고 나머지 한 손은 자유롭게 두었다.
계단 내부는 굉장히 협소해 숨을 공간이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기선 그 어떤 어떠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단 뜻이었다. 그래서 장목화는 불발되기 쉬운 연합 202와 자신에게도 여파를 미치는 유탄 발사기를 내려놓았다.
물론 장목화는 여태 연합 202를 잘 정비하고 유지해와서 무슨 문제를 일으킬 거라 생각진 않았지만, 지금은 무엇 하나 가벼이 여길 수가 없었다. 정말 재수가 없어 불발된다면, 도망칠 곳도 없는 여기선 너무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유탄 발사기를 손에 쥐지는 않고, 언제든 쓰기 편하게 메고 있었다. 혹시 무심자들이 계단 아래쪽에 모여있다면 곧장 유탄을 발사해 그들을 단번에 해치울 작정이었다. 유탄이 터지기 전에 엎드리라는 명령만 내리면 팀원들에게도 큰 피해는 없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한 손을 자유롭게 둔 건, 손전등을 쥐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미약한 달빛도 비치질 않았다. 장목화는 적들의 전기 신호는 감지할 수 있었어도, 어둠에 잠긴 계단은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