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절망
팀장 장목화도 온몸으로 공포에 저항하고 있는 듯 작게 몸을 떨었다.
성건우 역시 아이처럼 몸을 살짝 웅크렸지만, 빠르게 회복했다. 아니……, 아니었다. 그는 몹시 상기된 얼굴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걸 과연 정상적인 상태라고 볼 수 있을까? 무섭다 못해 아예 미쳐버린 느낌이었다.
그 순간, 뭔가 변화가 있었다. 고함이 멈춘 것이다. 성건우도 이를 느끼고 웃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폐허 곳곳에서 메아리만 물결처럼 울리고 있었다.
이내 차으뜸이 낮게 웃었다. 하지만 진짜 웃음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질 않았다.
“그 실험실, 방금 저 소리가 난 곳에 있어.”
순간 모두의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우렁찬 고함이 울려 퍼지는 미지의 실험실이라니. 게다가 구세계 파괴 이후에도 여태까지 운행 중인 수력 발전소, 꾸준히 유지된 폐허가 된 도시, 지금도 사용 가능한 전선과 설비들, 강제적으로 잠들게 할 수 있는 고양이 괴물까지 봤다.
실제적인 악몽을 만들어 심지어는 목숨까지 앗아가 버리는 가위 말⋯⋯, 고등 무심자로 의심되는 존재, 방사능에 오염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괴물이 도사리던 늪 깊은 그곳⋯⋯.
지금까지 많은 정보를 얻었다. 진상은 이미 지척에 있는 것 같은데, 그럴수록 더욱 두려움만 커졌다.
그런데도 장목화는 들뜨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건 그녀가 구조팀을 만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실험실 연구랑 구세계 파괴가 관련됐는지 궁금한데⋯⋯.”
장목화가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차으뜸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검은 외골격 장치에 싸인 두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전기를 통하게 해야지.”
장목화가 곧장 뒤를 쫓아가 빠르게 물었다.
“여기 배치도 갖고 있어?”
“일단 지하 기계실 스위치를 켜서 이 빌딩 전력을 회복시킬 거야. 그리고 17층 전력망 센터로 가서 전력을 연결하는 거지.”
곧 팀원들도 차으뜸을 따라 대문 왼편을 지나 정원으로 들어갔다.
* * *
정원은 상당히 넓었고, 곳곳엔 초록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높고 낮은 식물들은 거의 어둠에 숨은 괴물처럼 온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폐차도 여러 대 있었는데, 각자 위치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어 길을 막진 않았다.
원래부터 두려워하던 용여홍은 언제라도 공격에 나설 수 있게 경계를 강화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에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전력을 회복시키면 안 될 것 같았고, 그 미지의 실험실 문을 열어서는 더더욱 안 될 것만 같았다.
그 결과가 가뜩이나 나약한 애쉬랜드 사회에 새로운 재난을 일으킬지 아닐지에 관한 건 차치하더라도, 일단 자신들부터가 그 실험실과 폐허 도시에 도사리는 위험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용여홍은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 나이에 80개월 치 보상금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 빌딩 전방엔 연못이 하나 있었다. 물은 탁한데다 적잖게 불순물이 떠 있기도 했지만, 생각만큼 더럽진 않았다.
그때, 용여홍이 순간 흠칫했다. 희미한 밤빛 아래, 물속에 휙 스치는 검은 그림자를 목격한 것이다.
“뭔가 있어!”
겁에 질린 그가 냅다 그쪽으로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겨눴다.
이내 차으뜸이 용여홍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냥 평범한 물고기야.”
용여홍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충격의 여파는 상당했다. 여태 차곡차곡 쌓여가던 두려움에 완전히 불을 붙여버렸다.
“아니, 안 평범해! 하나도 안 평범해! 무심자는 물고기를 먹잖아? 나, 난 안 들어갈래, 포기할 거야! 지프차로 돌아가서 기다릴게!”
용여홍은 단숨에 지금껏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을 쏟아냈다. 순간 차으뜸도 이전만큼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헬멧 속, 차으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도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다 차으뜸이 소리 없이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팔을 들어 올렸다. 이후, 그가 용여홍을 향해 특이하게 생긴 은색 소총을 겨눴다.
장목화와 백새벽은 동시에 그를 저지하려다 약간 망설였다. 행동에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순간적으로 깊은 내적 갈등에 빠졌다.
차으뜸은 그들은 물론, 주변의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행동할 틈을 주지 않고, 그저 방아쇠를 당길 준비만 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놀랍게도 방아쇠에 건 차으뜸의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것 말고는 모든 행동을 할 수 있었지만, 유일하게 방아쇠에 건 손가락만 당길 수 없었다.
이내 차으뜸의 시선이 곧 용여홍을 지나쳐 그 뒤쪽을 향했다. 용여홍의 뒤엔 성건우가 있었다.
성건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듯 몸을 살짝 굽혔다. 짙어진 눈빛으로 차으뜸을 마주 보던 그가 아주 힘겹게, 그렇지만 매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 아무리 누군가를 좋아하게 돼도 그 사람의 나쁜 버릇까지 내버려 둬선 안 된다고.”
* * *
폐허 도시 모처에 수많은 조각상이 세워진 한 광장이 있었다.
콰광-
노란 승복에 붉은 가사를 걸친 기계 승려 정법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들린 소리 때문이었다.
때는 성건우 일행이 막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 초입에 들어섰을 그 무렵, 장목화가 수면 고양이를 향해 유탄을 발사했던 바로 그 소리였다.
정법의 앞엔 엉망진창이 된 여성 무심자들의 시체 몇 구가 널려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음이 울려 퍼진 곳에서 다시 또 황량하고 거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정법의 눈에 붉은빛이 몇 번 번쩍이는가 싶더니, 정법이 돌연 시신들을 내버려 둔 채 소리의 방향으로 뛰어갔다.
* * *
같은 시각, 어둠에 잠긴 폐허 도시의 한 거리.
이 거리에 자리한 어느 건물엔 검은 가운을 걸친 중년의 미남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의 입가엔 검은 수염도 멋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남자는 바로 연구원 이두형이었다.
“여기가 아닌가?”
이두형은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왔으나 이두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또 황량한 포효가 뒤이어졌다. 조금 전 폭발음이 울린 그 근처에서 나는 소리였다.
“저쪽인가?”
잠시 고민하던 이두형은 계단으로 향했다.
* * *
폐허 도시 길가의 한 가게 안.
매우 부드러운 검은색 가죽 의자에 한 여자가 누워있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도사, 갈루란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연거푸 들려오는 폭발음 때문이었다.
“휴……, 아직 수양이 부족하군. 사부님께선 공장 옆에서도 잘만 주무셨는데⋯⋯. 어쩔 수 없지, 잠자긴 글렀으니 움직이자. 가다가 차를 얻어탈 수 있을지 모르겠네⋯⋯.”
갈루란은 자책도 우아하게 했으며, 혼잣말할 때도 애쉬랜드어를 썼다.
그렇게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난 갈루란이 포효가 울려 퍼진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폐허 도시의 또 다른 쪽엔, 수많은 기계가 자리한 광장이 있었다.
여기엔 차 다섯 대가 있었다. 그중 녹회색 장갑차 옆에, 녹회색 베레모를 쓴 한 장년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이번에 거둔 수확이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 형님,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온 차에 물건이 가득합니다. 이 김에 고칠 수 있을 만한 차를 찾아 한 사람이 한 대씩 끌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머리를 박박 민 남자가 다가와 기쁨에 찬 얼굴로 물었다.
형님이라고 불린 베레모 남자는 콧대가 높았으며 이마는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꽤 특이하게 생긴 편이었다.
이름은 임서준, 일명 하이에나로 통하는 남자였다.
임서준은 시선을 느릿하게 옮기며, 열두세 명 정도 되는 핵심 구성원들을 느릿하게 살폈다. 모두의 얼굴에는 환희와 흥분이 가득했다.
“좋지, 우린 아직 우리 위력을 증강할 무기, 대형 세력의 좋은 물건이나 기술 자료와 교환할만한 걸 찾지 못했다. 우린 당연히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 검은 쥐 마을 뒷배는 분명 대형 세력이었을 거다. 그들이 모든 진상을 밝혀내기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내둬야 한다!”
임서준이 대머리 남자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윽고 몇 마디 당부를 덧붙이려는데, 폭발음과 포효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어느 정도 간격은 있었지만 분명 같은 곳에서 난 소리였다.
잠시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하이에나 임서준이 문득 미소를 지었다.
“저쪽에 좋은 물건이 있을 것 같은데, 가보자! 기회가 있으면 곧장 공격에 나서고, 기회가 없으면 다른 물건을 찾는 거다.”
이는 하이에나 강도단이 줄곧 고수해온 방식이었다. 이들은 하이에나처럼 썩은 고기 냄새가 나면 그쪽으로 몰려가더라도, 위험한 상황에 달려들지는 않고 멀찍이 떨어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예, 형님!”
원래 이곳에서 교대로 잠을 청하려 했던 핵심 구성원들은 수장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정신을 번쩍 차렸다.
* * *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
성건우의 말을 들은 차으뜸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다. 물론 육안으론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용여홍은 이제야 차으뜸이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태껏 쌓인 모든 환상이 무너지더니 단숨에 현실로 돌아왔다.
“저, 저 사람은⋯⋯.”
용여홍은 겁에 질렸다. 애초부터 차으뜸은 쫓아다닐 만한 인물도, 절대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도, 동료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어디 귀신에라도 홀렸던 걸까. 너무도 기이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용여홍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 순간 차으뜸의 금빛 눈동자 속에서 허상의 물결이 일렁였다.
동시에 장목화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녀는 차으뜸을 저지하자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일순간 철저하게 현실을 깨닫게 됐다.
장목화는 팀원을 데리고 위험 지역에서 빠져나가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팀은 외려 더 극도로 위험한 폐허로 왔다. 평범한 수준에 그쳐야 할 야외 훈련이 이 정도까지 이른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팀장의 실책이었다.
일찍이 장목화가 품었던 꿈은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그녀의 심신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마음은 저 까마득한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결국 장목화는 모든 저항을 포기한 채 얌전히 죽음을 기다렸다.
백새벽, 성건우, 용여홍까지도 장목화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모두 다 절망감에 휩싸여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차으뜸이 은색 소총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서늘한 눈빛은 여전했지만, 목소리만은 매우 부드러웠다.
“걱정하지 마, 다 지난 일이니까.”
절망에 빠진 모두에게 차으뜸의 말은 꼭 천사의 위로처럼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밀려든 절망감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다들 금세 원상태로 돌아왔다. 용여홍은 여전히 겁을 먹고 안으로 들어가길 꺼렸지만, 천사 같은 차으뜸을 위해서라면 모험을 해봐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차으뜸은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기 위해 일찍이 기계식 손목시계를 벗어 주머니에 넣어둔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을 파악하는 덴 아무 문제도 없었다. 스크린을 겸하는 고글에 시간이 나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글 오른편 하단 구석을 보며, 차으뜸은 매혹 능력에 변이가 일어날 때까지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이내 그가 팀원들을 재촉했다.
“지하 기계실로 가자.”
그 누구도 단 한 번의 이의제기 없이, 제8 연구원 특파원 차으뜸을 따라 연못을 빙 둘러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 빌딩 앞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