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깨달음
“헉……! 설마 변이된 생물은 아니겠지?”
남자는 순간 음량을 조절하지 못했다. 아직도 전에 겪은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깊은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행여 뭔가 이상한 조짐이라도 보일라치면, 생각은 어김없이 그런 쪽으로 튀곤 했다.
“지능이 있어 보였잖아. 그러니 무심자는 아닐 거야. 아직 인간 모습이기도 했고.”
하지만 안여향은 망설임도 없이 동료의 추측을 부정했다.
“아니, 진짜 괴물인데 그냥 자기를 인간으로 느끼게 했을 뿐이라면? 생각해봐, 우리가 처음에 만났던 고등 무심자도 사실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 여자한테 뭔가 귀중한 게 있다고 생각하게 했잖아.”
구멍 뚫린 털실 모자를 쓴 남자가 빠르게 반박했다.
안여향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근데 다른 가능성도 있어. 그 남자가 남을 매혹하는 능력이 있는 각성자일 수도 있잖아.”
남자도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네. 하하, 내가 생각하는 각성자는 변이된 생물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서. 아니지, 변이 생물들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기이하다고 해야지. 우리가 이번에 맞닥뜨린 존재들처럼.”
변이 생물 대부분은 검은 늪 철갑 뱀이나 검은 쥐 마을 주민들과 비슷했다. 신체 부위도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강해졌다.
안여향은 동료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이번에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벌써 몇 시간 전의 일이 됐지만, 그만한 경험과 의지를 가진 그녀도 아직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발버둥을 쳐도 깨어날 수 없는, 생생한 악몽 같은 기억이었다.
이내 안여향이 느릿하게 심호흡하다, 방금 지나쳐 온 거리를 돌아보았다.
“저 사람들도 홀렸나? 황야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네 명뿐이었거든. 각성자로 의심되는 남자는 없었어. 깨워줘야 하는 거 아닐까?”
남자는 곧장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너무 위험해!”
안여향은 몇 초간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은 수혁의 상황도 알려주고, 중요한 물건도 돌려줬어. 거기다 수혁이 시체를 밀폐된 공간으로 옮겨주기까지 했잖아. 무심자들이 최대한 수혁을 발견하지 못하게, 수혁을…… 잡아먹지 못하게. 이건 진짜 큰 배려야. 엄청난 가치를 갖는 일이라고.”
“너도 그 사람들한테 정보를 공유했잖아. 그리고 너 못 봤어? 그 남자,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있었어. 설령 각성자가 아니라고 해도 우리를 쉽게 해치워버릴 수도 있다고!”
남자는 초지일관 안여향을 막으려 애썼다.
안여향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위험한 짓은 안 해. 수혁이 시신을 가지고 돌아가야 하잖아. 얼마 걸리지도 않을 거야. 저 사람들이랑 아직 그렇게 안 멀어졌어. 그냥 여기서 소리만 크게 지르려고.
저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내 소리를 듣고 저 사람들이 자신들 상황을 깨달을 수 있을지까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남자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여기서 소리치겠다고? 좋아, 나도 같이할게. 그리고 바로 떠나는 거다?”
곧장 돌아선 안여향은 검은 권총을 허리에 차고, 입 가까이 손나팔을 만들었다. 이윽고 그녀가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 사람에겐 매혹 능력이 있어! 통제당하지 않게 조심해!”
* * *
용여홍은 대열 좌측에서 주위를 경계하며 가볍게 달리고 있었다. 손에는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꼭 쥔 채였다.
안여향의 설명과 팀장 장목화의 이야기를 듣고, 용여홍의 두려움은 더 깊어졌다. 강제적인 수면도, 실제적인 꿈도, 저항하기 어려운 함정도, 모두가 견디기 힘든 압박이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만약 성건우의 추리 광대 능력과 기계 승려 정법의 아귀도를 직접 보고 겪지 못했다면, 용여홍은 충격적인 현재 상황에 이미 정신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억누를 수 없는 두려움 속에, 그는 저도 모르게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번 작전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해야 하는 거지? 팀장은 우리가 애쉬랜드에서의 생활에 완벽히 적응하고, 충분한 경험을 쌓기 전까진 지나치게 위험한 곳은 데려가지 않을 거랬잖아.
차으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면 저 사람을 도와야 하는 건 맞는데⋯⋯. 그, 그게 그렇게나 가치 있는 일일까? 난 아직 결혼도 못 했잖아⋯⋯.’
가볍게 뛰던 용여홍은 제일 앞에서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달리는 남자를 보며 강렬한 내적 갈등에 사로잡혔다. 차으뜸을 보고 있으려니, 왠지 모르게 슬픔이 밀려들었다.
‘난 유전자 개량을 받았는데도 키가 175cm밖에 안 돼. 생긴 것도 그저 그렇고, 학교 시험 성적도 중간 정도였지. 그것뿐인가? 안전부에서도 가장 위험한 팀에 배정될 정도로 운도 더럽게 없잖아. 차으뜸이 나를 잘 봐줄 리가 있겠어? 됐어, 차라리 내가 먼저 포기하는 게 나아⋯⋯.’
포기⋯⋯. 용여홍의 눈빛이 점차 흐릿해졌다. 뭔가 이상한 부분이 포착된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딱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때, 바람결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실려왔다.
“매혹⋯⋯. 통제⋯⋯. 조심⋯⋯.”
목소리는 아주 날카로웠지만, 거리가 멀어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이내 장목화가 잠시 속도를 늦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뭐라고 하는 거야?”
“전 조심밖에 못 들었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축복해주나 보네요.”
성건우가 진지하게 답했다.
그 순간, 다시 바람을 타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높고 힘찬 남자의 목소리였다.
“매혹⋯⋯. 통제⋯⋯. 조심⋯⋯.”
“통제⋯⋯?”
백새벽도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자 애쓰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 지체하면 안 돼, 가자.”
대열 제일 앞의 차으뜸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왠지 그의 표정이 약간 변한 것도 같았다.
“알겠어.”
장목화는 그의 지시를 거부하지 않았다.
다섯 명은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여홍은 자꾸만 조금 전 들었던 목소리에 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통제⋯⋯. 조심⋯⋯. 통제 조심? 통제를 조심하라고⋯⋯?’
순간 용여홍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대열 끝에 자리한 성건우와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뛰던 성건우는 용여홍을 보며 씩, 미소를 그렸다.
‘무슨 뜻이지⋯⋯?’
용여홍은 성건우의 미소에 담긴 뜻을 알아내려 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있던 일들을 꼼꼼히 돌이켜 보며, 문제와 관련된 단서를 파악해보려 노력했다.
* * *
2~3분 후, 일행은 빌딩 하나를 끼고 방향을 꺾었다.
드디어 어둠에 잠긴 목적지가 드러났다. 백 미터 높이에 거대한 정원이 딸린, 매우 고요한 빌딩이었다.
정원 문에는 현판이 가로로 걸려있는데, 빌딩까진 아직 이삼백 미터나 남은 터라 뭐라고 쓰여있는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 대열을 이끌던 차으뜸이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순간 뒤로 기우뚱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모두가 깜짝 놀라 근처로 다가가려 했다. 문제를 확인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삐- 삐-!
그 순간, 외골격 장치가 소리를 내며 모든 보조 관절이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차으뜸의 육신도 천천히 일으켜졌다.
이내 장목화는 뭔가를 느낀 듯, 유탄 발사기를 쳐들고 측면에 있는 가로수 위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콰광-
급속도로 부푼 불덩어리 하나가 시야를 밝혔다. 타오르는 잎사귀 속, 폴짝 뛰어 옆쪽 빌딩으로 들어가는 한 인영이 있었다.
모습은 고양이 같은데, 길이는 족히 1미터는 돼 보였다. 털이나 가죽도 없어서 피처럼 붉은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데다, 딱딱한 껍데기로 싸인 갈색 꼬리는 긴 갈고리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어 흡사 전갈을 방불케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 어깨엔 하얀 가시 같은 뼈가 장식품처럼 달려 있고, 머리에 달린 귀는 무려 네 개였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고 해도, 절대 정상적인 생물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괴물은 빌딩 2층으로 뛰어 들어가며 유탄의 폭발을 피한 뒤, 순식간에 건물 안쪽으로 달려 장목화의 감지 범위에서 벗어났다.
이때, 차으뜸은 이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있었다. 그는 곧 괴물이 사라진 곳을 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들었었어. 이 외골격 장치에 훌륭한 알람 기능이 있어서 다행이야.”
백새벽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저게 강제적으로 잠들게 하는 괴물인가?”
장목화가 말을 받았다.
“생긴 거로 보면 변이 생물 같던데.”
“가자.”
차으뜸은 고양이처럼 생긴 괴물을 쫓는 대신, 목적지를 가리켰다.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성건우였다. 그가 빌딩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고, 나머지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한참 달리던 와중, 성건우가 갑자기 뜬금없이 물었다.
“뭐라고 부를까요?”
“뭘?”
장목화가 멍하니 되물었다.
“아까 그 괴물이요. 유령 고양이라고 할까요?”
성건우는 여전히 진지했다.
“별론데.”
장목화는 반사적으로 거절하곤, 다른 이름을 붙였다.
“수면 고양이라고 하자!”
* * *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일행은 목적지인 정원 입구에 이르렀다.
미약한 별빛과 달빛 아래, 이젠 검은 현판도 또렷이 보였다.
현판은 돌로 만들어졌는데, 그렇게 더러워 보이진 않았다. 가끔 내리는 비에 자연스럽게 씻겼거나 누군가가 갈고 닦은 것일 수도 있었다.
금색으로 쓰인 애쉬랜드 문자 중 빠진 건 하나도 없었다.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
다만, 용여홍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라는 게 문제였다.
“여긴 어디죠?”
용여홍의 질문에, 장목화가 간단히 대답했다.
“특정 도시에서는 수도관, 천연 가스관, 전선, 광케이블 등 다양한 것들이 하나로 통합돼서 거대한 정보망을 형성하고 있어. 그 정보망을 통제하는 곳이 바로 이 도시 정보망 센터야.”
“……그럼 여긴 왜 온 거죠?”
다시 용여홍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번엔 차으뜸이 말을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좀 서늘해져 있었다.
“이 폐허 도시 주위에 아직 운행 중인 수력 발전소가 있어. 여전히 유지되는 곳이지. 여기 수많은 노선도 그렇고. 다 상태가 아주 훌륭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통제 센터에 들어가 전기를 다시 통하게 하는 거야.”
“왜 전기를 통하게 해야 하는데?”
장목화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차으뜸은 한 2초간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어떤 실험실에 있는 문을 죄다 열어야 하거든.”
장목화는 일행을 둘러보다가 다시 차으뜸을 바라보았다.
“그 실험실이 어딨는데?”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차으뜸이 뭐라고 답하려는데, 갑자기 또 황량하고 거친 포효가 터져 나왔다.
다들 소리가 어느 쪽에서 들려오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포효는 도시 정보망 통제 센터 뒤쪽으로 몇 블록 떨어진 거리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모든 이들의 고막을 울리는 걸 넘어 현기증까지 일으켰다. 사실 그 아찔한 기분은 두려움에 더 가까운 듯했다.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씻어낼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운 공포였다.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바르르 떨었다.
백새벽도 무의식적으로 스카프를 단단히 조였다. 얼마나 세게 감고 있는지 어떻게 보면 꼭 스스로 목 졸라 죽으려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